#16
기사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가 체력, 둘째가 근력, 셋째가 다시 체력이라고 주장한 스펠먼 덕에 첫날 이후로는 검을 들 일은 아예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좀 너무하지 않은가 했지만 아무리 기술이 있어도, 그걸 실행할 힘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의견은 꺾이지 않았다.
열셋에 검으로 바위를 잘랐다더라, 열넷에 산맥을 굴러다니면서도 쌩쌩했다더라. 풍문으로 떠도는 소문이 거의 진실인 괴물 같은 체력의 차남은 노기사의 교육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 같은 범인에게는 스펠먼의 가르침이 정답인 것 같았다.
아버지와 장남은 엉망이 되어 마차에 실려 오는 나를 보며 곡소리를 냈지만 그들을 달랠 힘도 없었다.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도 나흘이 걸렸다. 에르켈에게 양해를 구하고 오후 일정을 조절해 오전에는 4황자 궁, 늦은 점심 이후 연무장, 집에 와서는 먹고 씻고 자는 일상이 반복되자 하루가 다섯 시간 같았다.
04. 아네트의 살롱
당연한 얘기지만 황태자의 의도가 견제든, 플러팅이든 상관없이 내가 그와 엮이는 것 자체가 아네트에게는 빡칠 일이었다. 덕분에 내 앞으로 초대장이 날아왔을 때에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원작자피셜 ‘겉으로 쉽게 화를 드러내지 않지만 성격 좆같기로는 황태자 못지않다’는 아네트가 곧 뭔가 조치를 취할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신경 써서 차려입은 채 4황자 궁을 지나쳐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계절마다 꽃이 바뀌는 황궁의 화원 중에서도 유독 아름다운 것이 봄의 로세테 궁이었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화원과 벽 한 면을 채운 거대한 창, 흰 외벽이 어우러진 로세테 궁은 본래 황후가 즐겨 찾던 곳이었다.
많은 궁 중에 하필 이곳에서 만남을 가진다니. 황태자에게 한 방, 황후에게 한 방을 날리는 일타이피의 선택이다. 물론 나는 그런 사정은 모르는 순진한 열 살일 뿐이지만.
“르웰린!”
에이든이 나를 보며 반색했다. 황태자도 무서워하는 그가 후궁을 편하게 대할 리 없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초대장을 받은 루스터가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갔다.
“왜 들어가지 않고?”
“가, 같이 들어가고 싶어서…. 네 마차가 오는 걸 봤거든.”
그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예절 선생에게 몇 번 지적받아도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었다. 본인도 알았는지 급하게 허리와 고개를 세웠지만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잔뜩 멋 낸 크라바트와 살짝 넘긴 머리가 부자연스러웠다.
그 긴장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등을 툭 치며 들어가자고 했다.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에이든이 따라왔다.
겉으로는 로웨나가 자신의 아들과, 아들의 친구들을 초대해 티타임을 가지는 화기애애한 시간이었지만, 껍데기만 그렇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에이든 루스터는 몰라도 루스터 백작이라면 알 것이다. 노련한 외교관은 사람을 대하는 법을 알았고, 자신의 아들에게 스킬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해 줄 수 있는 말은 조심하라는 말뿐이었을 그녀가 상상됐다. 나였으면 속이 터졌을 것이다. 오늘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걸음도 조심하고, 무엇보다 말을 제일 조심하라는 충고를 단단히 들었을 에이든의 얼굴은 벌써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냥 티타임일 뿐이야.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그, 그, 냥, 티타임이 아닐, 아니잖아. 이렇게 구, 궁 안쪽으로 들어오는 건 처, 처음이란 말이야….”
원래도 자주 긴장하고, 긴장하는 대로 말을 더듬는 에이든이지만 오늘은 상태가 심각했다. 이대로 아네트와 로웨나를 만났다간 앞으로 에이든을 4황자 궁에서 보기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아네트야 그걸 비웃으며 내버려 두겠지만, 아무리 유순한 로웨나라고 해도 귀족 영애로 자라 궁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자기 아들 옆에 덜떨어진 놈이 있는 걸 볼 만큼 자존심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불쌍한 에이든과, 루스터 백작을 위해 긴장을 풀어 주려 노력했다. 복도가 길어 다행이다.
“나도 처음인걸.”
“그, 래…?”
“응. 너 말고도 다들 긴장하고 있을 거야. 황자께서도 긴장하셨을걸.”
아네트의 초대장을 받은 날, 에르켈은 소파에 반쯤 누워 젤리를 껌 씹듯 씹으며 ‘염병.’ 했었다. 배를 북북 긁으며 티비 보는 아저씨가 겹쳐 보였다. 쟤 분명 20대 중반 여자라고 했는데. 전략을 따로 세울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순진한 척만 하면 됐다.
에이든은 그게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었다. 바짝 긴장해 눈알만 굴리는 게 자신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힘이 좀 나는 모양이었다.
복도를 지나자 시종이 상냥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로웨나와 아네트, 에르켈, 엘리엇이 보였다. 엘리엇이 은근히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왜 이제 오느냐는 것인지, 왜 둘이 같이 오느냐는 것인지 모르겠다. 뭐가 됐든 상관없다. 시간에 맞춰 도착했고, 에이든과는 우연히 마주쳤을 뿐인걸.
“르웰린, 에이든.”
아네트가 상냥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엄밀히 따지면 이 자리의 주인공은 티타임을 주관한 로웨나지만, 이 중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아네트는 아름다웠다. 자신의 눈동자를 닮은 옅은 녹색 드레스는 허리를 조여 더 가냘파 보였고, 이전에 봤을 때는 틀어 올렸던 은발을 내리고 진주로 장식한 대신 드러낸 어깨는 우아했다. 상황을 몰랐다면 나 또한 그녀의 외모에 감탄하며 넋을 놓았을 것이다. 저 정도는 돼야 제국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양이지.
아니, 그런데 그렇게 치면 차기 제국 최고 권력자와 북부의 주인, 천재 마법사, 어둠의 뭐더라 아무튼 암흑가 주인을 비롯한 대륙 남자들의 마음을 훔친 르웰린은 뭐지. 저걸 뛰어넘는 외모가 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지각한 루이스가 급하게 들어온 걸 제외하면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어린애들 입맛에 맞게 준비된 간식과 가향차를 홀짝이며 나란히 앉은 모자를 바라보았다.
에르켈의 갈색 머리와 눈이 어머니인 로웨나를 닮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저렇게 보니 정말 닮았다. 유순하게 쳐진 눈, 부드러운 헤이즐넛 색 눈동자, 얇은 윗입술과 높지 않지만 뾰족한 코끝. 모자가 아니라 자가 복제 수준이었다. 황제의 유전자가 한 톨도 들어가지 않고 로웨나 혼자 낳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롱을 열까 해요. 이렇게 이름 붙이면 너무 거창할까?”
“살롱이요?”
로웨나조차 듣지 못한 얘기인 듯 되물었다. 초콜릿 쿠키만 골라 먹던 엘리엇이 오도독 씹던 것을 멈췄다. 나와 에르켈도 티 나지 않게 긴장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가 오늘 모임의 이유일 것이다.
“아직 데뷔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거죠. 다양하게 친분을 나눌 기회일 것 같은데.”
손톱 끝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두 번 두드렸다. 에르켈과의 암호였다. 원작이야? 묻는 내게 에르켈이 약지를 나뭇결을 따라 횡으로 그었다. 아니라는 뜻이다.
이건 좀 위험한데.
무려 아네트를 중심으로 시작한 일이 작게 끝날 리 없다. 온 수도의 귀족들, 지방의 권세가들이 몰릴 것이다.
일반적으로 제국에서 귀족가 자제의 데뷔는 성인이 되는 열여덟 생일을 기준으로 했다. 너무 일찍도, 너무 늦어도 안 되는 게 불문율이었고, 친분이 있는 가문에서 생일 파티를 열어 주듯 데뷔를 위한 연회를 개최하는 게 관습이었다. 연회가 얼마나 성대한지, 어떤 디자이너의 옷을 입었는지, 장식은 어떤지, 파트너는 누구를 데려왔는지.
데뷔탕트는 가문의 권력, 부, 인맥을 자랑할 수 있는 중요한 행사였고, 그만큼 많은 곳에서 목숨을 걸었다. 가난한 귀족이라고 해도 빚을 내서라도 화려하고 성대하게 열어야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다.
물론 그 전에도 교류는 할 수 있었다. 수도의 영애들은 열넷 정도 되면 친분을 통해 살롱에 초대받아 지식을 나누고 파벌을 형성하는 게 기본 루트였고, 영식들도 아버지들의 모임에 끼어 자기들끼리 어울리는 일이 잦았다. 요즘은 아카데미에 많이들 가는 추세니까 그곳에 가는 걸로도 충분했다.
이 판국에 어린 애들을 모은 살롱을 열겠다는 건… 좀 자의식 과잉 같은 말이지만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에이든은 여전히 맹했고, 루이스는 이 대화의 중요성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설탕이나 요구하고 있었다. 엘리엇과 나, 에르켈이 진지한 눈빛을 나누며 아네트의 말을 경청했다. 로웨나가 너무 좋은 생각이라며 들떴다.
“분기마다 연회를 열어도 좋을 거예요. 안 그래도 바쁜 페르디의 예약이 밀리겠네요.”
“전하의 옷을 미리 맞추는 건 어떨까요? 그가 다음 주에 궁에 방문하기로 했답니다.”
“세상에.”
“어떻게 보면 이것도 데뷔가 될 테니, 제가 선물하고 싶은데.”
로웨나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소녀 같은 얼굴에 싫다는 말도 꺼내지 못한 에르켈은 무념무상인지 방긋방긋 웃기만 했다. 쟤도 연기가 점점 늘어 간다.
“감사할 일이죠. 제 데뷔에 신경 써 주시니, 몇 년 후 루가 연회에 참석할 때면 어머니께서 준비해 주실 수 있겠어요.”
5황자 루카스의 애칭까지 부르며, 5황자 쪽과 최대한 친분을 쌓으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아네트가 듣기에도 나쁘지 않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 살롱이 그때까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