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리고… 르웰린도. 내가 네게 가장 가까운 여자 어른이 아니겠니. 백작께서도 신경 쓰시겠지만, 그분은 전부터 유행에는 조금 늦어서.”
나 이거 알아.
아네트의 웃는 얼굴 뒤로 내 쓸모를 계산하는 냉정함이 비쳤다. 황태자가 내 의견 따위 묵살하며 강압적으로 ‘사과’를 건넨 것에 반해 아네트는 내게 친근감을 주려고 노력하며 옛날 얘기를 들췄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지. 데뷔 때에 에메랄드로 장식한 브로치를 차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그해 유행은 루비였어. 에메랄드는 2년도 더 지난 유행이었지. 심지어 그가 입은 재킷은 금수를 놓은 검은색이었거든.”
“백작께서는 유명하셨죠.”
로웨나가 거들었다. 백작의 취향이 베이직한 건 줄 알았는데. 어쩌면 센스가 없어 아예 포기하고 정석만 선택하는 거였을 수도 있겠다.
“케일이 아버지를 똑 닮았는데, 그 점은 어머니를 닮아 다행이라는 게 우리끼리 웃는 얘기였을 정도니까.”
아버지, 어머니, 형까지 들먹이며 ‘내가 너와 이만큼 친하고, 너를 잘 알아’를 어필하는 아네트를 거절할 힘이 내게는 없었다. 웃으며 “정말 좋아요!” 하고 외쳤다. 어린애라 혈색이 좋아 다행이었다. 발그레한 뺨은 사랑스러워 보일 것이다. 적어도 거울을 보며 연습할 때는 그렇게 보였다.
연회, 살롱. 두 단어가 주는 무게가 생각보다 묵직했다.
황태자에 대한 견제보다 찝찝한 건 사람이 모인다는 점이었다. 원작의 주요 인물들은 지금 나나 황태자와 나이가 비슷했다. 성대하게 열릴 연회에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모두 참석하려 할 테고, 그러면 원작보다 빠르게 그들과 마주칠 확률이 높았다.
*
눈코 뜰 새 없이 하루를 보내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동안 연무장 열 바퀴를 뛰고도 쓰러지지 않게 됐고, 드디어 검을 잡는 자세를 교정받기 시작했다. 4황자 궁에서 함께 듣는 수업도 진도가 많이 나갔다. 루이스는 마법에 자질을 보여 적성 검사를 받기로 했고, 엘리엇은 수학을 잘했다. 제프리는 요즘 재능 있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처음의 건조한 태도를 내버리고 나와 엘리엇에게 칭찬을 쏟아붓는 중이다.
의외였던 것은 에이든이 검을 배우기로 했다는 거였다. 그의 선생은 백작이 뽑은 추천 리스트에 있던 이름이었고, 재능이 나쁘지 않은 건지 스승이 나쁘지 않은 건지. 요즘 부쩍 자신감이 올라 보기 좋았다.
시간이 흘렀다는 건 아네트가 예고한 살롱이 가까워진다는 뜻이었다.
황가 모두가 모이는 식사 자리에서 로웨나가 황제에게 입을 열었다. 에르켈은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작가답게 장황한 듯 섬세한 상황 묘사에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황후가 반대하지 않았다는 게 제일 컸다. 이미 또래의 수도 귀족 자제가 아카데미에 간 2황자의 어머니인 엘리샤는 싫을 게 분명했지만, 아네트와 황후가 가만히 있는데 일을 키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심하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3황자의 어머니인 아리엘은 황후의 사람이다. 황후가 반대했다면 거들었겠지만, 잠자코 있으니 본인도 그 주제에 끼어들지 않았다.
황제는 큰 재능을 보이지도 않고, 특색도 없는 자식에게 애정을 줄 만큼 여유로운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황자를 낳아 준 후궁에게까지 박한 남편도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황제는 흔쾌히 수락했다.
아네트는 어느 쪽으로도 의견을 내지 않았다. 목석도 녹일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좌측에 앉아 식사를 챙길 뿐이었다. 하지만 평소 얌전하던 로웨나가 이런 큰 건을 꺼냈다는 것은 그 뒤에 봐줄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네트와 로웨나가 특별히 친하게 군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갑작스럽게 큰 행사가 잡히자 귀족들은 발칵 뒤집혔다.
제일 먼저 움직인 건 수도 귀족이었다. 황제에게 제일 총애받는 후궁을 거스르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평소라면 아네트와 이를 드러내며 부딪치던 황후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니 눈치 볼 것 없었다. 그들이 움직이자 지방 귀족들도 마음이 급해졌다.
유명한 샵과 디자이너들은 예약이 밀려 지금 달려가도 2년 후까지 순번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고, 보석 수요가 크게 늘었다.
아네트의 꼬드김에 황제는 순순히 벨레트 궁을 개방했다. 큰 연회장과 두 개의 홀을 가진 궁이니 많은 어린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다. 부유하지만 평소 수도에 머물지 않는 귀족일수록 조금 더 귀하고, 조금 더 특별한 치장을 위해 눈에 불을 켰다.
정확한 일정이 잡히지 않았으니 더 속이 탈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아네트가 당장 이번 봄이 끝나기 전에 시작하고 싶다고 해도 그에 맞출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할 것이다.
황후의 가문인 수에닐가에서도 한 손 거들었다. 황녀가 아직 데뷔하지 않았지만, 데뷔하지 않은 이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편에 속하니 살롱의 주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한 것 같았다. 아네트의 아들인 루카스는 고작 여섯 살이었으니까. 황후와 아네트의 사이는 농담으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 중요한 것은 개인적 친분이 아니라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권이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 칼을 꽂는 게 이 바닥이었다.
“팔을 내리셔도 됩니다.”
아네트는 수도 최고의 인기 디자이너를 보내 주었다. 장남은 찝찝한 티를 냈지만 에드윌이라고 해도 그를 바로 불러올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어떤 색도 어울리시겠지만, 봄이니 산뜻한 건 어떨까요.”
“연회가 언제가 될지 모르는데.”
“다들 봄옷을 맞추시더군요. 여름까지도 유행하는 색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보여 준 것 중 하늘색이 괜찮더군.”
“안목이 훌륭하십니다. 이른 아침 같은 하늘색이지요. 이번 시즌 많이 찾으셨지만 그만큼 많이 실패한 색이죠. 어울리기가 쉽지 않아서요. 하지만 그 부분은 문제 되지 않을 겁니다.”
“아직 어리니 노란색도 좋지 않을까요?”
“지나치게 화려한 원색보다는 옅은 게 낫죠. 이건 어떠십니까?”
장남과 셋째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단추는 어떤 걸 달지, 옷감은 무슨 색으로 할지, 수는 놓을지, 놓는다면 어떤 색으로 어떤 문양을 놓을지, 칼라는 어떤 종류로 할지, 신발은 무슨 모양으로 할지. 모든 게 다 의논거리였다.
평소에도 내 옷에 제일 관심 많은 게 케일이니 장남이 올 것은 알았는데 아벨도 끼어들 줄은 몰랐다. 평소 패션에 큰 관심 없던 차남은 휴가까지 내고 함께했지만, 저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차남은 대충 셔츠에 코트만 걸쳐도 태가 나는 몸매였다. 역시 사람은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
“르웰린은 뭘 입어도 귀엽고 예쁠 텐데.”
“맞는 말이지만, 레오. 중요한 자리니 평소보다 더 신경 써야지.”
“내버려 두세요. 작은 형님은 이런 걸 이해 못 합니다. 가넷과 루비도 구분하지 못할걸요.”
“붉은 게 루비라는 건 안다.”
“슬프게도 가넷도 붉은색이랍니다, 형님.”
아벨이 한심한 것을 보듯 했다. 예의 그 혀 차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차남은 투덜거렸지만 이미 진지하게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든 셋의 벽을 깨지는 못했다. 내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차남이라도 옆에서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넋을 놓고 그들의 이야기에 휘둘리는 것은 내 일이었을 것이다.
“원래 한 벌 이상 제작하지는 못하지만….”
수도에서 제일 바쁜 몸일 디자이너는 르웰린의 얼굴과 몸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이것저것 한참 원단을 대 보고 보석도 대 본 후에도 결정하지 못한 셋은 종류, 색을 나눠 네 벌을 제작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갔다. 남자에게 잘 먹히는 얼굴이 어디 가는 건 아니구나. 예술가의 혼을 불태우는 디자이너를 보며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만간 뵙겠습니다.”
드디어.
장남과 셋째는 만족스러웠는지 그를 직접 배웅했다. 반면 나는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고, 그들의 요구에 맞춘 자세를 보여 주느라 힘들었다. 운동하며 키운 체력이 아니었으면 진작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스펠먼 경에게 그는 듣지 못할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아났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르웰린, 손님이 왔는데.”
나가면서도 여전히 토론하던 아벨이 문 사이로 고개를 빼끔 내밀었다. 쟤는 내가 귀엽게 구는 것에 무르다는 걸 깨달은 후 가끔 어리게 굴었다.
“손님이요? 저한테요?”
“응.”
에드윌 성에 손님이 찾아오는 거야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지만, 직접 나를 보러 온 것은 처음이었다. 대체 누구지? 차남이 옆에서 치근덕거리는 게 귀찮아 슬쩍 밀어내며 나를 찾아올 법한 후보를 추려보았다. 범위가 쉽게 추려지지 않았다.
장남과 함께 들어온 얼굴은 낯익었다.
“엘리엇?”
“안녕, 르웰린.”
열한 살치고 큰 키. 어린데도 벌써 사나운 눈매. 엘리엇 딜런이었다.
*
차남은 나가고 싶지 않은 눈치로 방을 맴돌았지만 결국 셋째의 손에 잡혀 끌려 나갔다. 르웰린! 외침이 처절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에드윌 형제간의 우애가 좋다더니 정말이었네.”
“그래 보여?”
엘리엇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마주 웃어 주었지만 떨떠름했다. 엘리엇 딜런, 클로이 루스터, 루이스 클로이 중 제일 편한 상대를 고르라면 확실히 딜런이다. 에이든은 나이보다 어렸고, 루이스는 딱 열 살 같았다. 달리 말하자면 엘리엇은 애늙은이 같았다. 나나 에르켈 속에 있는 건 성인이니 그럴 수 있지만 진짜 열한 살이 저럴 수도 있구나, 감탄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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