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17)

#19

나는 엘리엇의 호소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헬레나 옆으로 밀어 주었다. 너희 정말 잘 어울린다. 칭찬에 헬레나가 까르르 웃었다. 정말이야? 기대감 찬 질문에 진심을 담아 답해 주었다.

“르웰린….”

“엘리엇, 설마. 헬레나가 이렇게 직접 너를 찾아왔는데 돌아가라고 할 셈이야?”

숙녀분께 실례야. 덧붙이자 헬레나가 더 좋아했다. 이맘때쯤 애들은 어른 취급을 받고 싶어 했다. 숙녀라는 단어가 아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헬레나에게 잡혀 끌려가는 엘리엇이 “두고 봐!”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살아 보니까 두고 보자는 놈치고 별거 가져오는 놈은 없더라고.

*

정원은 한적했다. 애들을 모두 실내에 몰아넣고 놀 거리를 던져 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햇빛도, 바람도,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향기도 좋아 기분이 들떴다.

애들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귀찮은 것도 맞아. 가끔은 속으로 루스터를 애새끼라고 폄하했는데, 실상은 그보다 더한 애들이 많았다. 특히 자신의 영지에서 떠받들고 키운 애들일수록 그게 심했다.

역시 아카데미는 피해야겠다. 일주일에 두어 번 모이는 걸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 어린 것들을 모아 기숙사에 박아 둔 아카데미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마법을 배울 거라면 아카데미가 필수 과정이지만, 검을 선택했으니 굳이 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심지어 아카데미에 가면 무려 그 세드릭 클라인과 만남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다. 에르켈은 네 명의 주연 중에서도 세드릭 클라인에 특별히 별표를 치며 또라이라고 칭했다. 웬만큼 미친놈은 미쳤다는 소리도 안 하는 에르켈이 직접 또라이 칭호를 달아 줄 정도면 얼마나 미친 건지 짐작도 하기 힘들었다.

한참 광합성을 하듯 햇볕을 쬐며 돌아다니던 나는 나무 그늘을 찾아 움직였다. 한숨 자고 들어가야지. 푹신한 침대에서만 자던 몸이니 불편한 잔디에서 깊은 잠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20분 정도만 뒹굴다 들어가서 엘리엇을 달래줘야지. 에르켈도 나를 찾고 있을 거다.

꽃만 잔뜩 핀 정원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썩 괜찮은 나무가 나왔다. 그 아래에 재킷을 벗어 깔고 누웠다. 선선한 바람에 기분 좋게 눈이 감겼다. 바닥은 풀과 흙 덕에 그렇게 딱딱하지 않았고, 이대로면 금세 잠이 들 수….

“억!”

갑작스럽게 몸 위에 떨어진 무게감에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내구도가 쓸 만해졌으니 다행이지, 몇 달 전의 서른 보 이상 걸을 일 없던 르웰린의 몸이었다면 아작이 났을 것이다.

“뭐야?”

튀어나오는 기침을 틀어막고 성질을 내며 내 위에 앉은 것을 향해 짜증냈다. 까맣고 순한 눈이 본인도 놀랐는지 그대로 굳어 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헬레나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아니, 사랑스럽다는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미형이었다. 궁에 들어온 애들 중 이런 애도 있었나? 사람이 많아도 눈에 튈 외모였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내 성질에 놀란 그 애와, 그 애의 얼굴에 놀란 내가 말없이 대치했다. 정신을 차린 내가 “좀 비켜 줄래?” 하고 지적한 후에야 그 애가 후다닥 옆으로 떨어졌다.

“미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하는 걸 듣자 더 화를 내기도 뭐했다.

“됐어. 그보다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거야?”

위로 고개를 올리자 이 애가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나뭇가지가 꺾여 있었다. 작은 손이 무언가를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깃털도 다 나지 않은 새끼 새였다. 위를 좀 더 살피자 둥지가 보였다.

“빼려던 거야, 넣어 주려던 거야?”

대답 없이 새를 조심스럽게 든 손을 위로 올린다. 넣어 주려던 모양이었다. 한숨이 튀어나왔다. 나야 갑작스러운 봉변에 당황했을 뿐이지만, 저 애는 입고 있던 원피스가 엉망이 됐다. 뒤로 맨 리본은 풀려 있고, 끝자락에 달린 레이스도 흙과 풀물에 더러웠다. 머리 장식은 어디에 뒀는지 보이지도 않아 긴 머리가 멋대로 풀어 헤쳐져 있었다.

어린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걸 보자 마음이 안 좋았다. 기사도 같은 건 나와 상관없었지만 이런 순간을 외면할 정도로 몰인정하지는 않았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를 올려 주려다 실패한 여자애, 힘없이 우는 새끼 새. 갈등하던 나는 그 애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무 타는 건 자신 없지만, 줘 봐.”

눈만 깜빡이던 애는 내 손 위에 조심스럽게 새를 올려놓았다.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모습이라든가, 입술을 오물거리는 거나,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움직이다 치마에 묻어 굳은 흙을 긁는 것에서 대충 감정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손수건 위에 새를 담아 끝을 입으로 물고 나무를 올랐다. 다행히 발을 디딜 만한 옹이가 많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퍼뜩 무언가 머릿속을 지나간 것은 간신히 둥지 안에 새를 넣어 준 후였다.

이거 좀… 미연시에서 볼 법한 만남 이벤트 아닌가?

르웰린 에드윌에게 만남 이벤트라 함은 곧 남자와 찐하게 엮인다는 걸 뜻했다. 불안감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러고 보면 이 나무도 그래. 열 살도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된 아이템 같지 않은가. 주르륵 미끄러지듯 나무를 내려온 후 다시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황태자 정도로 화려한 얼굴은 아니지만 확실히 시선을 잡아끄는 외모다.

아냐, 아니다. 나는 가능성을 부정했다. 쟤는 여자애잖아.

“너. 이름이 뭐야?”

새가 무사히 둥지에 돌아간 게 기뻤는지 오물거리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모임에 초대받아 궁에 온 거야?”

끄덕.

“여기 있는 건 빠져나온 거고?”

잠시 망설이다 끄덕.

“나한테 이름 말해 주기 싫어?”

미안하지만 말 안 해 줘도 명단을 찾아볼 생각이다. 모름지기 모든 일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주연들 이름이, 그러니까. 페르온, 세드릭, 카르윈, 루크였지. 페르온은 황태자니까 빼고, 루크는 평민이니까 빼면 남는 건 카르윈과 세드릭이었다. 걔네만 아니면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어차피 르웰린의 인생을 꼬는 주역은 그 넷이니까.

그 둘에게 여장 취미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고, 저 여자애가 남자라는 법도 없지만 아직 2차 성징도 안 온 어린애한테 치마를 입혀 놓으면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옷을 벗겨 성별을 확인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르웰린 에드윌로 살아가는 인생은 존나 고단하고 피곤했다.

“…씨씨.”

“응?”

“씨씨….”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씨씨? 그가 이름을 말해 주기 싫냐는 질문에 대답했다는 것을 알았다.

“네 이름이 씨씨라고?”

끄덕.

“어…. 귀엽네. 잘 어울려.”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코끝을 찡끗한다. 땅을 향한 눈 덕에 긴 속눈썹도 잘 보였다.

저 애를 의심하던 마음이 반쯤 녹았다. 저 얼굴로 남자애면 너무 아깝지 않나? 르웰린 에드윌의 인생에 언제 여자애랑 이렇게 엮여 볼까. 적어도 원작이 끝나는 스물셋까지는 힘들 텐데. 그 고생을 응원하기 위한 운명의 만남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기대인 걸 알았지만 괜히 두근거렸다. 자꾸 ‘하지만’으로 시작하는 핑계가 따라왔다.

하지만, 쟤는 원피스도 입었고. 또 저렇게 귀엽고. 게다가 세드릭은 아카데미에서 만나고 카르윈은 북부에서 만난다며.

이미 원작보다 빠르게 만남을 가진 황태자라는 경우가 있지 않나. 속으로 의문이 차올랐지만 쟤가 어딜 봐서 미친놈으로 보이냐는 반박이 따라왔다.

*

씨씨는 나쁘지 않은 대화 상대였다. 대부분 나 혼자 떠들면 씨씨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거나, 침묵을 선택하는 방식이었지만,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티를 냈다. 남들이 보기에는 우스운 모양일 수 있겠지만 어차피 사람이 없으니 상관없다.

오히려 그 애가 조용해서 좋았다. 자기 말에 남들이 무조건 집중해줘야 한다고 믿는 어린 귀족들에게 시달리다 내 말을 차분히 듣는 상대를 만나자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그 애를 위해 정원의 꽃을 설명하기도 하고, 오가며 들은 농담을 하기도 했다. 무표정은 집중해서 봐야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미미하게 변화했는데,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발견할 때면 제법 뿌듯했다.

가끔은 입술을 우물거렸는데, 그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면 작은 목소리로 본인도 말을 했다. 대부분 문장을 이루지 못한 단어였지만 그래도 기특했다. 뭐라고 비교해야 하지. 꼭 새끼 짐승이 혼자 서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처럼 두근거리고 기대됐다.

예, 아니요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면 목소리를 좀 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몇 번 시도하다 관뒀다. 말하는 걸 별로 즐기지 않는 것 같은데 괜히 부담을 주기 뭐 했다.

“나는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

높게 떠 있던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적당히 숨만 돌리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 버렸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지 않으면 에르켈이 내 목을 졸라 버리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요즘 스트레스를 왕창 받는 에르켈은 단걸 씹어 먹는 거로 부족했는지 담배를 찾았다. 제국에 현대와 같은 담배가 있는지 문제는 둘째 치고 열 살짜리한테 그걸 피우게 할 수는 없었다.

에르켈은 나를 만난 후 신학교에 가는 계획을 접고, 대신해서 본인이 아카데미에 가겠다고 했었는데. 얘 정말 보내면 술과 담배에 손대는 거 아닐까 걱정됐다.

“다음에….”

뭔가 걸린다 했더니 씨씨가 내 바지 자락을 잡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힘을 풀기는 했지만 놓지는 않고 있었다. 쪼끄만 손으로 잡은 게 뭐 그리 떨쳐내기 힘들겠냐만, 그대로 털어내기에는 양심이 좀 아팠다.

너 진짜…. 왜 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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