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간신히 삼킨 의심이 다시 올라왔다. 정황이 너무 딱 떨어지니까 찝찝해 죽겠다. 황태자보다 얘랑 대화를 더 많이 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여자가 맞는지 확답을 얻고 싶었지만, 누가 봐도 귀여운 여자애인데 거기에 대고 혹시 다리 사이에 뭐 달린 거 아니지? 했다간 미친놈 취급을 당할 것이다.
사실 얘라면 좀 맹해서 답을 해 줄 것 같기도 한데. 말로 대답을 들어 봤자 찝찝한 기분을 어쩌지는 못할 것 같다는 게 문제다. 차라리 이게 BL 소설이라는 걸 몰랐으면 나았을 텐데. 아쉬움이 들었지만 급하게 정신을 차렸다. 미쳤어? 장르와 스토리를 알고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어떤 놈의 수작에 걸려서 뒹굴게 됐을지 모르는데. 게다가 아쉽다는 건 뭐야. 상대는 겨우 열 살이나 된 어린애인데. 황태자한테 페도, 페도 하더니 이제 너도 페도가 된 거야? 쓰레기 자식!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속과는 달리 목소리는 다정하게 나왔다. 나도 놀랐으니 딜런이나 에르켈이 보면 기겁할 정도였다.
“다음에 볼 수 있냐는 뜻이야?”
끄덕.
“음, 글쎄….”
나야 궁으로 출근하듯 드나드니까 쟤가 궁에 오면 볼 수 있겠지만. 그렇게 대답하기에는 망설여졌다. 엘리엇처럼 계산적인 놈이면 모를까, 4차원 미소녀 속성을 가진 애랑 깊게 엮이기에는 부담스럽다. 맹한 게 귀엽기는 하지만, 얼굴도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반질거리는 눈도 예쁘기는 하지만.
씨씨가 시무룩해졌다.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주변 공기가 침울해진 것 같다.
곧 열릴 연회에 오면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 달래자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실망한 기색의 씨씨는 치맛단을 만지작거렸다. 생각이 많아지거나 기분이 상하면 저러는 모양이다. 짧은 시간 안에도 습관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했다. 그러다 씨씨가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줄이 길어 옷 안에 가려져 있던 목걸이를 풀어서 내게 건넸다.
[보호 중인 분께서는 레베카 룩스틸에게 연락주세요. 아이는 씨씨라고 불러 주세요.]
멋들어진 필기체 대신 또박또박한 정자로 쓴 것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보호자가 보기에도 애가 맹해서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던 모양이다. 어떻게 한 것인지 목걸이 뒷면을 만지자 옆으로 설명서 같은 것이 떴다. 씨씨 사용 설명서였다. 신 것을 좋아하고, 의외로 쓴 것도 먹지만 매운 것은 못 먹고. 자주 말 걸어 줘야 하고….
그러니까 이건….
“미아 방지 목걸이?”
연락처를 넘겨준 것이 뿌듯한 씨씨가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편지… 보내도 돼?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문장을 다 말하는 정성을 무시할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
“명단에는 없었어. 디멘시온이나 클라인이 있었으면 말해 줬겠지.”
에르켈이 소파에 늘어져 초콜릿 슈를 뜯어 먹었다. 뼈를 잡고 고기를 뜯듯 거친 몸짓이었다. 얼마나 시달렸는지, 하루 사이에 10년은 늙은 얼굴이었다. 애들 사이에서 황족의 위엄을 살려야 하고, 다정해야 하고, 잘 통솔해야 하지만 아네트의 눈에 들면 안 되니 적당히 해야 하고. 주어진 미션이 많기는 했다.
나는 씨씨가 건네주고 간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그쪽에서 먼저 편지를 하겠다면서, 굳이 이걸 넘기고 간 이유가 뭘까. 생각이 많아졌지만, 오히려 이럴 때는 더 단순하게 판단해야 할 수도 있다. 걔라면 별생각이 없었을 가능성도 높다.
“레베카 룩스틸은? 관련된 사람 아니야?”
“야, 제발. 나 이거 완결 낸 지 7년 됐다고. 조연들 이름까지 기억했으면 멘사 가입을 했겠지.”
에르켈은 투덜거리면서도 곰곰이 생각했다. 룩스틸, 룩스틸….
“룩스틸이면 거기네. 후원가.”
“후원가?”
“응. 로베누스에서 예술가들 후원하는 거. 그 동네가 수도랑은 교류를 잘 안 해서 이쪽에서 잘 아는 이름은 아닌데 로베누스에서는 유명하다고 들은 것 같아. 거기 널리고 깔린 게 젊은 예술가들 후원하는 귀족이긴 한데, 그 사람 눈에 들면 성공은 보장된 거라고 하니까. 한국으로 치면 대형 기획사 정도?”
“그럼 걔가 룩스틸 가 사람인가?”
“그럴 수도 있고. 씨씨를 애칭으로 쓸 이름이 뭐가 있지? 엘리자베스?”
일단 룩스틸 가계도는 알아봐 줄게. 쟁반 위 슈를 전부 입에 넣은 에르켈이 이번에는 케이크에 손을 댔다. 보온 마법 처리가 되어 있어 사람을 여러 번 부를 필요 없다는 건 좋았다. 이런 걸 한국에 가져갈 수 있으면 떼돈 벌 텐데.
“찝찝한 것도 이해해. 완전 첫사랑 기믹이잖어.”
“첫…, 미쳤냐?”
지금 누구를 변태 페도 새끼로 모는 거야? 질겁하자 그가 낄낄 웃었다.
“귀엽고 사랑스럽다며. 너 그런 말 잘 안 하잖아.”
“예쁘게 생긴 건 사실이니까. 야, 시발, 얼굴 보고 넘어갈 거였으면 진작 황태자한테 넘어가서 목매고 있겠지.”
“씨씨는 여자고, 황태자는 남자니까 그런 거겠지. 이러다 정말 걔가 남자면 네가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것 같아?”
아니겠지, 아마.
씨씨의 원피스 아래 덜렁거리는 것을 상상했다. 으. 뼈대가 굵어지고 수염 날 남자인 걸 알면 지금처럼 예쁘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첫사랑이면 좀 가볍고 아기자기한 단어 아니야? 음흉한 뜻 담지 말고 풋풋하게 생각해.”
“아, 그런 거 아니라고. 내가 지금 첫사랑 같은 걸 할 때야? 그리고 황태자 첫사랑은 존나 질척거리더니만.”
“그건 걔가 음흉해서 그렇고.”
남이 들으면 경을 칠 얘기를 하며 웃었다. 공공의 적 뒷말은 늘 재미있는 법이다.
“애들한테 여장 설정 넣은 적은 없긴 한데…. 지금이 원작 전이라 또 모르니까. 나도 찾아는 볼게. 그러니까, 너도, 어? 나쁜 새끼야. 혼자 튀지 말고.”
그 부분에는 할 말이 없었다. “노력할게….” 얼버무리자 그가 노려보았지만 워낙 순하게 생겨서 그렇게 매섭지는 않았다. 빠지라면 빠질 수는 있는 자리지만 정말 빠지기엔 의리가 있지.
에르켈은 다시 스트레스가 밀려왔는지 아네트 흉을 봤다. 권력을 갖고 싶으면 혼자 하지 왜 나까지 끌어들인대? 여섯 살짜리 제 아들 데리고 하라고 해!
“네가 보기에는 아닐 것 같아?”
“웅.”
“찝찝하긴 하다며.”
“그렇지만…. 주연 중에 새끼 새가 둥지에서 떨어졌다고 다시 올려 줄 만한 인성은 없는걸. 걔네 다 쓰레기거든.”
내 애정이 들어간 애 중에 덜 쓰레기, 더 쓰레기는 있어도 아닌 놈은 없어! 당당한 외침에 어이가 없었지만 납득했다. 참고로 김민지의 덕질 모토는 ‘나는 쓰레기만 보면 가슴이 뛴다.’였다.
05. 선물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왼쪽에 엘리엇, 오른쪽에 헬레나가 붙었다. 엘리엇은 자석처럼 내 옆에 찰싹 붙었고 헬레나는 팔짱을 끼고 늘어졌다. 옆에 엘리엇도 있는데 왜 나한테?
“르웰린, 생각해 봤는데 우리끼리 이름을 부르는 건 너무 삭막한 것 같아. 애칭을 붙여 주는 건 어떨까? 린이라고 하면 어때? 나를 엘라라고 불러도 좋아.”
헬레나가 ‘삭막한’을 느리게 발음했다. 아홉 살이 알기에는 너무 어려운 단어였다. 그녀의 저 대사가 엘리엇의 머리에서 나왔음을 확신했다. 아. 이게 그 ‘두고 봐.’의 후폭풍이구나.
“괜찮아. 거절할게.”
“숙녀의 부탁을 거절하면 안 된다며?”
“맞아. 엘과 나는 이미 애칭을 부르고 있어.”
“둘이 서로 애칭을 부르는 게 보기 좋다. 둘이서만 부르는 게 특별해 보이지 않을까, 헬레나?”
뺨이 머리카락보다 발그레해진 헬레나가 꺄! 작게 소리 질렀다. 그녀를 구워삶아 내 옆에 붙인 엘리엇이 팔뚝을 잡으며 목소리만 상냥하고 나긋하게 헬레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애칭으로 부를 기회는 잃어버릴걸. 연회가 끝난 뒤에도 모임이 계속될지 알 수 없고. 적어도 지금처럼 자주 볼 수는 없겠지.”
엘리엇이 안타깝다는 듯 눈썹 끝을 내렸다.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 환경학자 같은 얼굴이었다. 헬레나가 교수의 강의를 듣는 첫 번째 줄 학생처럼 열렬하게 엘리엇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중간에 추임새까지 넣어 준다. 둘이서 죽이 아주 척척 맞았다.
“린은 아카데미에 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다음에 보는 건 우리가 다 큰 후일지도 몰라.”
“헉!”
“은근슬쩍 애칭 부르지 마, 엘리엇.”
선방을 날리는 엘리엇에게 반격하려 했지만 그가 선택한 헬레나 실드는 생각보다 강했다. 헬레나는 내 팔을 붙잡고 흔들며 왜 아카데미에 가지 않느냐, 그곳에서 함께 공부하고 노는 시간을 기대했다며 징징거리, 아니, 설득을 시도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스러운 헬레나는 말이 많다.
아카데미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한 후에야 만족한 헬레나가 자신의 사촌인 루시아와 어울리러 사라졌다. 영혼이 반쯤 빨린 것 같다.
“거짓말하면 못 쓰지, 린.”
“엘리엇….”
“엘이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친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서운하네.”
엘리엇의 얼굴은 전에 없이 상쾌했다. 얄미운 새끼.
그를 두고 구석으로 향하자 딱 달라붙은 엘리엇이 졸졸 따라왔다. 뭐야? 예민하게 반응하자 “네가 또 혼자 가 버리면 어떡해.” 했다.
“안 나갈 거야. 걱정 마.”
“그래?”
“그래. 너는 헬레나에게 가서 마저 옆을 지키지 그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던데.”
여유롭던 얼굴이 싹 굳었다. 진심으로 정색한 엘리엇이 “헛소리 마.” 하며 치를 떨었다.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단시간 어울린 나도 힘들었으니, 헬레나에게 찍힌 엘리엇은 이미 심신이 너덜거릴 것이다. 그나마 나는 애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엘리엇은 본인도 어린애 주제에 애들을 안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