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17)

#22

“괜찮아. 어차피 루시아랑 제일 친한 건 나니까. 이 정도는 양보할 수 있어.”

어른스러운 대답에 “그래, 그래.” 해 주었다.

무슨 일이냐고 끼어든 루이스를 더하자 멤버는 셋이 됐다. 사실 친구가 없는, 아니 적은 헬레나에게 루시아만큼 친구가 많은 루이스를 소개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둘이 친해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를 가운데 두고 위드실 거리를 거닐던 두 사람은 곧 흥미 가는 주제를 찾아 떠들기 시작했다. 누가 본다면 만난 지 오래된 단짝처럼 보일 정도다. 나는 흐뭇하게 둘을 따랐다. 헬레나가 낯을 좀 가릴 뿐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못 하는 성격은 아니었고, 루이스도 모난 부분이 없었다.

“세상에. 너무 예쁘다.”

헬레나의 발길이 액세서리 가게 앞에서 멈췄다. 진열된 상품들은 철저하게 계산된 조명 아래에서 자체적으로 발광하듯 빛났다. 그중에서도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나비 모양 핀에 꽂힌 헬레나가 유리에 코를 박을 듯 얼굴을 가까이 대고 황홀해했다.

마찬가지로 반짝이는 것에 흥미가 많은 루이스도 맞장구쳤다. 얘는 사파이어를 가공해 만든 펜던트에 꽂혔다.

직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안에 들어와 구경하라고 권했다. 위드실 거리에 오는 건 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어린애들 무리라면 정체는 뻔하다. 돈이 넘쳐나는 부르주아거나, 돈과 권력을 모두 쥔 귀족이다. 돈 많고 어린 손님들을 위해 간식까지 내오는 서비스를 발휘하자 헬레나의 지갑이 열렸다.

진열 부스에서부터 시선을 낚아챈 나비 모양 핀을 두 개나 산 헬레나가 헤헤 웃었다.

“왜 두 개야? 하나가 망가질까 봐?”

“하나는 루시아 주려고.”

원래 이런 건 한 사람이 시작하면 나도 구매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된다. 떠드는 사이 루이스도 결국 펜던트를 구매했다. 턱턱 구매하기엔 숨이 턱 막히는 가격이었지만, 돈 있고 힘 있는 가문의 자식들은 별 생각 없이 잠깐의 기분을 위해 기꺼이 그걸 지불했다.

아직 돈의 단위에 익숙해지지 못한 나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얘네의 불만이라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해 금패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제국의 신용 카드 역할을 하는 금패는 사용할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는 대신 한도가 없다. 확실히 금화를 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편하겠다.

“린은 마음에 드는 게 없어?”

헬레나의 말에 직원의 눈이 빛난다. 손님은 셋. 물건을 두 개 팔았으니 하나 남았다는 생각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단조로운 옷을 스캔한 그녀가 검은 벨벳 함에서 하나를 집었다.

“장식용 단추는 어떠세요? 셔츠 단추에 끼우는 형태로, 종류가 다양하답니다.”

단추라기엔 화려해도 너무 화려했다. 저런 게 잘 어울릴까 싶을 정도다. 직원은 빠르게 거울을 내밀었다. 화려한 금발과 자안. 그것보다 화려한 얼굴. 보석 단추 정도는 르웰린의 얼굴에 비하면 단조로워 보였다.

헬레나는 본인이 신나서 이것저것 골라보고 있었다. 직원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헬레나의 관심을 돌리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엘리엇에게 줄 선물도 여기서 사게?”

루이스와 함께 단추를 보던 헬레나가 시무룩해진다. 뭘 사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며 기가 죽는 헬레나 옆에서 루이스가 몇 가지 목록을 꺼냈다. 데려오길 잘했다. 나는 옆에서 ‘그것도 좋다. 그것도 예쁘네.’ 정도밖에 못 했을 텐데.

결국 가게를 나온 우리는 다음 목적지를 골랐다.

“펜은 어때? 엘리엇은 자기 펜을 들고 다니거든.”

머리를 쥐어짠 끝에 말하자 루이스가 괜찮다고 맞장구쳤다.

“하지만…. 이미 쓰고 있는 게 있는데 내가 준 걸 사용할까?”

“걱정 마. 원래 쓰던 게 있어도 새 걸 가지게 되면 그쪽으로 손이 가게 되어 있다고.”

누나가 좋아하는 가게가 있는데, 엘리엇도 그곳 물건을 사용하는 걸 봤다는 이야기를 길게 풀어내며 루이스가 앞장섰다. 그 뒤를 따라가는데 뭔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얼굴을 덮은 가면의 형태는 독특했지만, 크게 튈 정도는 아니다. 수도에는 온갖 패션이 범람했다.

그가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그의 크다거나,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거나, 특이한 행색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남자는 인파 사이를 유유히 지나고 있었다. 복잡한 거리를 지나면서도 누구와도 몸을 부딪치지 않고 걸었고, 사람들은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피하지도 않았다. 한두 사람이야 상대가 알아서 피하겠거니 생각할 수 있어도, 모든 사람이 그러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친 것 같았다. 거리가 있는 데다 상대는 가면을 써서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남자의 모습을 좇았다. 이상할 정도로 상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르웰린!”

루이스가 팔뚝을 붙잡았다.

“갑자기 왜 그래? 없어진 줄 알았잖아. 저쪽에 뭐라도 있어?”

루이스가 내가 넋을 놓고 쳐다보던 쪽을 살폈다. 나도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가자.”

루이스와 함께 헬레나에게 가는 중에야 뭔가 놓치고 있던 걸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머리 색이 뭐더라?

*

연회가 가까워졌다는 건 모임이 줄었다는 뜻이다. 최대한 많은 애들과 얼굴을 익히는 게 목적이던 초반과 달리 주기가 점점 길어졌고, 마침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모두 이를 악물고 제일 화려하게 꾸미고 오겠지.

헬레나는 진주로 장식한 드레스가 예뻤다며 내게 조용히 스포 하고 갔고, 에이든은 모임 기간 동안 살이 쪄 맞춰 둔 옷이 안 맞는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나는 엘리엇에게 헬레나가 기대해 달라더라 전해 줬고, 에이든에게 앞으로는 디저트를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으면 자제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함께 운동하겠느냐는 제안은 거절당했다.

제일 바빠진 4황자 덕에 놀이 친구 역할도 잠시 휴식기를 맞았다.

시간이 많아졌다는 건 그동안 밀린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고, 덕분에 나는 스펠먼에게 잡혀 오랜만에 수업을 재개했다.

이전과 다를 것 없이 거뜬하게 연무장을 도는 나를 보며 스펠먼은 흡족해했다. 표정 변화가 큰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한 상대의 기분도 읽어낸 적 있는걸. 스펠먼은 기분이 좋으면 왼쪽 입꼬리를 씰룩거렸고, 덕분에 수염도 함께 움직였다. 집에서도 시간 나면 꾸준히 운동하길 잘했다.

스펠먼은 보통 내가 기본기에 충실하길 바랐지만, 가끔은 대련 상대가 되어 주기도 했다. 배운 자세와 기술을 이용해 그를 공격하면 그는 페널티를 가진 채 방어하면서 점수를 매겨 주는 형식이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빈도는 늘었다. 수련치 쌓아 렙업 하는 기분이라 뿌듯했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

“다리에는 힘이 빠졌고.”

“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하나의 적을 정정당당하게 상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버려라.”

물론 수련치가 찔끔찔끔 차기는 했지만.

터진 손가락도, 물집 잡힌 손바닥도, 후들거리는 다리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 내 목표대로 ‘천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쓸 만한 놈’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최악이었으면 스펠먼이 저렇게 열심히 가르치지도 않을 것 아닌가. 바닥에 구른 채 히죽거리자 그는 미친놈 보듯 하며 휴식을 외쳤다.

물론 오늘따라 기분이 상승 곡선을 그리는 건 갑자기 미쳐서 검술이 너무 재미있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레베카 룩스틸에게 조카가 있는데, 그 애가 열 살이래. 이름은 엘리자베스 룩스틸. 한 달쯤 전에 고모와 함께 수도에 올라와 있다고 하더라. 축하해.’

에르켈은 장르를 탈출하겠다더니 벌써 히로인까지 찾았다며 박수를 쳐 주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머쓱하고, 한다고 해도 믿어 주지도 않을 거라 관뒀다. 이러다 내가 씨씨와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걸 알게 되면 결혼 플랜까지 짤 기세였다.

아무튼. 씨씨의 알리바이는 딱딱 맞아떨어졌다. 덕분에 간신히 유지하던 경계는 쉽게도 허물어졌다. 그래. 아무리 남자들과 엮여 인생 좆 되는 르웰린 에드윌의 삶이어도. 살다 보면 여자애랑도 엮일 수 있는 건데 내가 너무 예민했다. 차마 씨씨에게 직접 말할 수는 없지만 미안해서 사과의 의미로 선물이라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 연습이 끝나면 장남과 함께 고르러 가기로 했다.

장남은 함께 시내에 가자는 말에 좋아했다가, 선물을 사러 가고 싶다는 말에 의아해했다가, 선물을 할 상대가 요즘 자주 편지를 하는 여자애라는 걸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네가…. 네가 좋다면, 르웰린. 물론 너는 아직 어리고…. 그래, 상대도 어리겠지만. 아직 준비되지는 않았지만….’ 하고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하기까지 했다. 딸 시집보내는 아버지도 아니고. 아니, 내가 연애를 한다고 했어, 결혼을 한다고 했어?

에르켈이 엘리자베스 룩스틸을 연회 명단에서도 확인했다고 했으니, 선물은 그때 전해 주면 될 것이다.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된 일인지, 르웰린 에드윌의 몸은 아무리 뙤약볕에서 굴러도 타지 않았다. 붉게 그을리는 일조차 없어서 피부에 화염 저항 패시브라도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피부가 타지는 않아도 오래 햇빛 아래 노출되면 체력이 떨어지니까 스펠먼이 올 때까지 그늘로 가 있는 게 낫겠다. 땀을 많이 흘려서 수분이 부족하기도 하고….

“물이 필요할까?”

“아, 감사합니다.”

자각하자마자 목이 마르던 차에 옆에서 건네주는 컵을 고맙게 받아 마셨다. 마법이란 건 편하단 말이야. 여기가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정말 옛날 배경이었으면 여름에 얼음 한 조각 먹기도 힘들었을 텐….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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