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분명 귀에 익은 목소리인데. 생각하며 옆을 돌아보자마자 보인 것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붉은 눈이었다.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다. 간신히 멎진 않았고, 욕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놀라서 물러나자 여전히 감정 없이 아름답기만 한 눈이 사륵 접혀 웃었다. 하마터면 또 상황을 잊고 쳐다볼 뻔했다. 황태자가 웃기 전 경고하는 법을 만들어야 했다. 사전 예고 없이 마주친 미소를 설명하기에 내 어휘가 여실히 부족했다. 저번에는 기분이 나쁜 티를 내더니. 이번에는 잘 갈무리했는지 섬뜩한 느낌도 없었다. 르웰린 에드윌이 된 후 온갖 종류의 보석을 봤고, 총천연색의 머리카락과 눈도 봤다. 하지만 그중 무엇도 황태자의 붉은 눈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전하.”
급하게 예를 갖추려고 했지만 그가 저지했다. 허리를 굽히지도, 펴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굳어 있는 내게 황태자가 손을 뻗었다. 목소리만큼은 달큼한 채였다.
“많이 급했던 모양이야.”
아직 젖은 입술을 스치고 흘러내린 물을 따라 턱을 쓰는 손가락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거 뭐냐. 그러니까 얘 지금…. 지금 나 꼬시는 건가? 하지만 물을 닦아낸 손은 미련 없이 돌아갔다. 남은 것은 상황 파악이 안 돼서 굳은 머리와 혀뿐이다.
“스펠먼 경이 가끔 그대 얘기를 해. 호위 기사에 이어 스승까지. 주위에서 온통 한 사람에 관해 얘기하니 나도 종종 그대 생각을 하게 되더군.”
“예?”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이제 아닌가?”
“예…?”
상냥한 말투와 그렇지 못한 태도라는 게 이런 건가? 내가 나타나서 꼬우냐 묻는 말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예?’ 만 반복했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내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듣고 싶었던 것이 고작 멍청한 반문은 아닐 테니 이해할 수 있었다.
황태자가 하필 차남을 통해서, 하필 에드워드 스펠먼을 붙여 준 덕에 가족들은 물밑 작업을 열심히 했다. 백작과 케일이 나를 두고 회의하는 일이 잦아졌고, 정치에는 관심도 없던 아벨마저 작금의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반감을 드러냈다. 계속해서 황태자와 인연을 쌓았다간 백작이 아네트와의 관계를 접어 두고 나를 궁에서 빼오기라도 할 기세였다. 덕분에 원망은 그득그득 쌓였지만, 그 뒤로 옷자락조차 비치지 못한 황태자로 인해 흐릿해졌다.
“혹시 스펠먼 경이 ‘예?’ 라고만 답하도록 가르쳤어?”
“아, 아뇨. 그게….”
진정하려는 시도와는 달리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몸에 잠시 냉랭했던 표정이 다시 녹아내렸다. 봄 햇살을 맞아 가지 위에 남아 있던 잔설이 녹는 것보다 극적이다.
“내가 너무 놀라게 한 걸까. 아니면 나이에 맞게 굴기로 한 걸까?”
하마터면 또 ‘예?’ 할 뻔했다. 그 대답은 하지 말라는 듯 손이 다시 다가온다. 이번에는 목 언저리를 스쳤다. 닿을 듯 말 듯, 살에 닿지는 않고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다. 에르켈이 존나 보고 싶었다. 사실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싶었다. 너는, 시바, 너는…. 취향이 왜 이따위라서.
튀어나오려는 딸꾹질을 틀어막고 생각을 정리했다. 생리적 현상에 가슴이 부풀었다 꺼지며 소리가 새어 나갔지만 노력이라도 가상하게 비치길 바랐다.
황성에서 연습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는 핑계로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거리에 두고도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던 황태자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뭐지? 연회가 가까워져서? 그렇다면 연습 중 찾아온 것도, 미심쩍게 구는 것도 아네트와 신경전의 연장선이라고 판단하면 되는 걸까.
“갑자기….”
“갑자기?”
“찾아오실, 줄 몰라 놀랐습니다. 이전까지 오신 일이 없으셔서….”
길지 않은 문장을 간신히 내뱉으며 눈을 아래로 내리고 눈치를 봤다. 부끄럽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애로 비쳤으면 했다. 그가 차남과 스펠먼, 혹은 그 외 누군가에게 들은 르웰린 에드윌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겠다만, 방치해둘 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이렇게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르웰린 에드윌은 조금 똑똑할지언정 나이를 벗어날 정도는 아닌 어린애일 뿐이라고 판단해 주는 게 그의 관심을 끊어낼 제일 빠른 방법이었다.
그러기에는 지난 만남이 제법 자극적이었다는 게 걸렸다. 황자의 고양이를 들고 도망치다 만나서, 목까지 그어버렸으니까.
자칫 고압적으로 비칠 수도 있는 평소의 태도를 느슨하게 풀고 나를 대하는 게 오히려 더 긴장됐다. 황태자가 직접 찬물을 가져다준다니. 에르켈에게 말해도 ‘엥? 뭐지?’ 할 일이고, 다른 사람은 믿지도 못할 일이다.
“내가 궁에 잡아 두고 관심이 부족했어.”
“아니, 그런 것이….”
“놀랄 만한 등장이었겠군. 이해해.”
이해는 개뿔. 그 관심이 앞으로도 계속 부족하도록 노력하는 게 내 인생 목표다. 그러나 관대한 척 구는 그에게 ‘아뇨.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관심 꺼 주십쇼.’ 말할 수 있었다면 내가 에드워드 스펠먼에게 검을 배우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황태자는 ‘하지만….’ 하고 말을 끌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는지.
“그대를 위해서도 내가 찾아오지 않는 게 낫지 않았어?”
“그럴 리가요.”
나는 한참 ‘황태자 전하를 뵙는 건 영광이다.’, ‘오늘도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중요한 날이 됐다.’며 금칠을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황태자가 가볍게 툭 던졌다.
“내가 그대를 찾으면,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꼭 그만큼 불렀을 텐데. 사랑스러운 막내가 휘둘린다면 백작의 원망이 크겠지. 쉬운 상대는 나일 테고. 그건 좀, 안타까워서.”
이 새끼 왜 이래?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이렇게 대놓고 ‘나랑 아네트랑 줄다리기 하는데 중간에 너 껴있어.’ 할 줄은 몰랐다. 떠본다는 건 알겠는데, 떠보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 타이밍에, 뭘 위해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으로 눈을 굴리는데 황태자의 손이 시선을 끌었다. 하얗고, 늘씬한 손가락부터 손등까지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꼭 누가 할퀸 자국 같다고, 생각하자마자 파란 눈이 떠올랐다. 나는 단번에 부정했다. 설마하니 고양이가 황태자의 손을 저렇게 긁어 놨을 리가. 고양이도 자기 목숨 소중한 줄은 안다.
“이름은 모모라고 지었어.”
“…예?”
“열심히 데리고 도망치기에, 한번쯤은 보러 올 줄 알았는데. 무심한 편이더군. 눈앞에서 죽을 것 같으면 구하지만, 아니라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야 황태자가 아직도 고양이를 데리고 있을 줄 몰랐다. 거의 떠넘기듯 안게 된 걸 데리고 가서 기르고 있을 줄은.
무슨 말을 해도 핑계였다. 소재를 찾아볼 생각이었으면 진작 알아보고 찾아갔겠지. 결국 그가 말한대로 눈 앞에 보이지 않자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기르고 계시는 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보러 갔을 텐데.”
알아도 보러 가지는 않았을 거다.
다음에, 정말 실례되겠지만 찾아가도 되겠냐는 말을 꺼내자 황태자는 기다렸다는 듯 허락했다. 그리고는 정말 별거 아니었다는 듯 화제를 전환했다.
“에드윌 경이 동생에게 검을 선물했다 자랑하던데. 들고 있는 것이 그것인가?”
“예. 전하.”
손잡이 부분에 이름이 각인된 게 들켰을까? 차남을 옆에 두고 있으니 황태자도 알고 있겠지만, 가족들의 주접을 직접 들키는 건 조금 부끄러운 일이다.
“진검을 쓰는 날에도 자신이 선물할 거라고 벼르던걸.”
덧붙여진 말은 웃어넘겼다. 그건 이미 장남이 사서 보관 중인 걸 발견했다.
중요한 것은 없는 대화가 몇 번 오갔다. 아네트도 그러더니. 요점에 다다르기까지 빙 돌아가며 시간을 끄는 것은 높은 분들의 대화법인가. 로웨나와는 직접 대화해 본 적이 별로 없고, 에르켈은 속에 든 게 김민지이니 기대할 수 없다.
아니면 둘이 닮은 걸 수도 있겠지. 아네트나 황태자가 알면 화를 낼 말이었지만 둘은 제법 닮아 있었다. 목표를 위해 모든 걸 거는 점이 특히 그랬다. 둘이 친모자 사이였다면 이미 옛날에 라이벌을 해치우고 제국을 차지했을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황태자가 말을 끌었다. 음. 드디어.
아네트는 가벼운 티타임에서 묵직한 걸 던졌다. 황태자가 반격할 건 어떤 건지 궁금했다.
“연습 시간을 나와 비슷하게 조정하는 건 어떨까 해. 스펠먼 경에게는 미리 말해 뒀으니 그대가 좋다 하면 다음부터는 얼굴을 볼 수 있겠군.”
“…….”
“옷을 갈아입은 후에는 차라도 할까? 내가 단것을 즐기지 않아 입맛에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군.”
뭐라고요? 답을 해야 하는데 뭐라고를 뭐라고 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다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형편없었다.
“제가… 거절할 수 있는, 있나요?”
“거절을?”
황태자는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가, 이전보다 화사하게 웃었다. 얼굴 주변에 꽃이 피는 것 같다. 저 부분만 잘라 본다면 화보라고 해도 믿겠다. 그리고 그 화보는 잡지 메인을 장식하겠지.
“그건. 예상에 없던 답변인데.”
예상에 없으니 정답도 아니라는 뜻이다. 간신히 들어간 딸꾹질이 다시 튀어나올 것 같다.
“농이야.”
목소리만 상냥한 황태자가 나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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