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터미널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게이트에서 마탑까지 이동하는 것도 마법을 이용하자 순식간이었다. 아벨은 내내 들떠서 라히드에 대해 설명했는데, 마탑에 개인 연구실을 가질 정도로 상급 마법사부터 바로 이동할 수 있고, 아닌 경우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가 또 있다고.
아벨은 자신의 연구실은 탑의 상층에 있다고 뿌듯하게 말했다. 연구실의 위치가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말하는 걸 들어 보니 대단한 것 같아 ‘멋있어요.’, ‘대단해요.’, ‘최고예요.’ 3단 콤보를 날리자 아벨은 실실 웃으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거의 공중에 반쯤 떠다니는 수준이다.
아벨과 함께 들어선 마탑은 이전에 봐 온 제국 건축 양식과는 달랐다. 황성도 용이 수호했다는 전설에 걸맞게 오랜 역사를 자랑했지만, 마탑과 라히드는 그 처음이 언제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마탑은 거대한 호수 위에 세워져 있었다. 틈 하나 없어 벽을 타고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외관과 달리 탑의 내부는 여러 건물을 얼기설기 합쳐 둔 것처럼 복잡했는데, 그 높이가 250M에 달했다. 이미 하늘 높이 쌓아 올린 탑은 역사와 함께 꾸준히 높아져 왔으며, 앞으로도 더해질 예정이었다. 아벨은 지식에 완성은 없으며 그저 더해 갈 뿐이라는 것이 마법사가 제일 중요하게 여길 신조이며, 탑은 그 자체로 마법사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런 형태를 유지한다고 했다.
주변에 벽이 없는 판을 타고 위로 올라가며 중간중간 창이 없이 뚫린 곳을 통해 도시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산맥에 둘러싸여 다른 문명이 침범하는 것도, 마탑의 문명을 가지고 나가는 것도 오랫동안 막아 온 라히드는 모든 마법사들의 고향이라는 말에 걸맞을 정도로 광활한 도시였다. 도시를 휘감아 흐르는 거대한 운하와 라히드 중앙에 있는 호수로 모여드는 작은 물줄기들, 그 위를 덮은 바닥은 투명해 물이 그대로 비쳤고, 타일 조각처럼 촘촘하게 바닥을 덮은 돌은 색이 화려해 위에서 올려다보면 무늬를 만드는 것 같았다.
그 위를 사람들이 걷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바닥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거였다. 엘리베이터도 있고, 무빙 워크도 있는데 전화기는 없는 시대라니. 이게 더 놀라웠다.
아벨은 자신의 연구실로 가기 전에 싫은 티를 잔뜩 내며 우선 마탑주에게 가봐 야 한다고 했다. 아카데미에 가서 교장 노릇이나 하지, 왜 자꾸 마탑에 돌아와서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는 걸 보며 웃었다. 집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흉을 보지는 않았을 텐데, 탑에 오자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다.
연구실은 방의 주인에 따라 스타일이 다양했는데, 그걸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게 문이었다. 덩굴과 꽃이 엉겨 열면 숲이 펼쳐지고 새소리가 들릴 것 같은 동그란 나무 문과 보기만 해도 냉기가 느껴지는 살얼음 낀 철문이 나란히 놓인 식이었다. 아벨은 그래도 성질 나쁜 영감님들끼리 싸움 나지 않게, 최대한 상성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연구실을 붙여 둔다고 했다.
몇 년 후 새파랗게 어린 제자에게 마탑주 자리를 물려줄 피사 테콘의 방은 짙은 파란색 문이었다. 만지면 벨벳처럼 부드러울 것 같은 문은 아벨이 성의 없이 두드리자 경첩 소리도 없이 열렸다.
내부에 들어선 나는 꽤 놀랐다. 집에 있는 아벨의 방은 발 디딜 틈이 거의 없는데, 이곳은 서류 하나 흩어져 있지 않았다. 되려 넓고 쾌적하며, 상쾌한 냄새까지 났다.
마법사들이 좋게 말해서 개성 넘치고, 솔직히 말하면 독특하며, 당해 본 사람이 말하면 괴팍하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은 탓에 마탑주 정도 되면 방부터 예사롭지 않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이게 누구야. 에이잉! 그렇게 오라고 할 때는 보이지도 않더니 동생 데리고 왔다고 찾아오는 거냐?”
생긴 것만 보면 점잖은 학자인 방의 주인이 아벨의 입에 붙어 이미 익숙해진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내게 “단 걸 좋아한다며?” 하고 사탕을 건네는 걸 봐서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이제 인사했으니 가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뵈러 왔으니까 방 이동시키지 마세요, 좀.”
“아이고! 내가 널 그렇게 키웠냐. 어떻게 일 없으면 찾아오지도 않어, 정 없는 놈.”
“교수님이 저를 키운 건 아니죠.”
둘이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투닥거리는 걸 구경하며 사탕을 입에서 굴렸다. 꽤 큼직한 사탕은 겉이 사르륵 녹으며 줄어들고, 단단한 속이 나오자 입 안에서 톡톡 튀었다. 레몬 맛인가 하면 복숭아 맛으로 변하고, 또 좀 빨다 보면 체리 맛으로 변하기도 했다.
내가 열심히 사탕을 먹자 피사 테콘이 저것 보라고 웃었다.
“나도 그걸 아주 좋아한다. 심심할 때 입에 넣으면 재미있지. 가기 전에 한 번 더 들르면 간식을 모아 둔 상자를 주마, 응?”
아벨은 그냥 지금 주면 덧나냐고 투덜거렸지만, 내가 좋아하는 걸 봤으니 어떻게든 받아 가려고 할 것이다.
“교수님, 말씀하셨던 자료를 추려 봤는데요. 보존 마법이 잘못됐는지 글자들이 많이 번져 있어서 복원 작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어나겠다는 아벨을 피사 테콘이 앉히길 네 번 정도 반복했을 즈음 문을 열고 서류더미가 들어왔다. 나는 남자를 수식할 다른 단어를 골랐지만, 서류더미라는 것보다 완벽한 것을 찾지 못했다.
본인이 들고 있는 것만 해도 머리를 훌쩍 넘겨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옆으로 끌고 오는 트롤리도 무너지기 직전까지 서류를 우겨넣은 상태였다. 바퀴가 없는 대신 바닥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부유하는 트롤리가 바닥에 밀착할 듯 기울어진 것만 봐도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안녕, 프레이.”
아벨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인사하자 프레이라고 불린 서류더미가 ‘헉!’ 소리쳤다. 재빨리 피사 테콘의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은 남자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벨에게 달려들었다.
“아베에엘!”
“왜 이렇게 친한 척이야.”
머리카락인지 건초더미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푸석한 은발을 질끈 묶은 남자는 아벨의 손에 밀쳐지면서 우는 소리를 냈다.
“세상에,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올라와요? 저는 아벨이 탑을 나간 줄 알았어요. 영감님이, 아니, 죄송해요. 교수님. 교수님께서 그놈 새끼 방을 확 비워 버리라고 하길래 제가 얼마나 떨었는 줄 아세요?”
“내가, 내가 언제 방을 비우라고 했냐. 그냥 좀 치워 두라고, 에잉! 그러게 누가 통보만 하고 자리를 비우래!”
피사 테콘이 황급하게 변명하다 화를 내는 척했다.
“예, 뭐. 이참에 짐 다 옮겨버리죠. 퇴출하시든가.”
그에 굴할 아벨이 아니다. 심드렁하게 말한 아벨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극단적으로 변하는 표정을 목격한 프레이와 피사 테콘의 얼굴이 묘해진다.
그렇게 난장판이 지나간 후 진정한 프레이가 소파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조신하게 훌쩍였다. 이제 보니 꼴이 엉망이었다.
며칠 밤을 샜는지 뺨까지 드리운 그늘 하며, 푸석한 머리카락은 묶어서 모아두기는 했는데 빗질조차 하기 힘들 지경으로 엉망이었고, 입술도 바짝 말라 건드리면 찢어져 피가 베어나올 것 같았다.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남의 일에 무관심한 아벨조차 막 대하지 못할 만큼 가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피골이 상접한 조교를 달래는 피사 테콘의 얼굴을 확인했다. 프레이와 대조될 만큼 기름기가 흐르고 있었다.
프레이가 가져온 서류만으로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회의실 같던 방이 연구실 분위기로 바뀌었다. 나는 그제야 피사 테콘의 방이 유난히 깔끔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조교 하나가 갈려나간 결과였다.
프레이가 아벨을 신나서 반긴 이유는 아벨 피사 테콘의 정식 조교는 아니었지만, 아카데미 출신이자 마탑에서 제일 어린 축에 속한다는 이유로 일을 나눠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햇빛을 못 봐 푸석거리며 말라가는 잡초 같은 프레이를 보고 혀를 찼다.
“나 황성으로 출근하게 될 예정인 거 못 들었어?”
무려 아벨이, 무려 난감해하며 말하자 프레이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워낙 피폐해 보여서 그렇지, 이목구비도 나쁘지 않고 키와 체격도 괜찮아서 밥 잘 먹고 잠 잘 자면 어디 가서 잘났다는 말을 듣기에 충분할 것 같은데. 생긴 게 아까웠다.
더듬더듬 말을 고르던 프레이가 간신히 입을 뗐다.
“거, 거짓말이죠? 아니라고 해 주세요. 저한테는 아벨이, 흑. 조교로 올라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아벨이 피사 테콘을 흘겼다. 나도 불쌍한 제자를 속여 먹은 마탑주를 고운 눈으로 보기 힘들었다.
“아니, 그럴 예정이었지. 그럴 예정이었는데…. 이놈이 황성으로 가겠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막겠냐. 황실 인장이 찍힌 임명장이 직접 날아왔는데.”
“피, 핑계 대지 마세요. 교수님은… 항상 그런 식이죠….”
결국 마른 뺨 위로 눈물을 뿌린 프레이가 방을 뛰쳐나갔다. 아벨이 노려보자 피사 테콘이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흠, 흠. 네가 가서 좀 달래 봐라. 졸업식 이후에 인원 확충해 주겠다고. 응?”
“또 눈에 차는 녀석이 없다고 핑계 대면서 프레이를 이름뿐인 수석 조교 자리로 꼬실 거잖아요. 수석이면 뭐 해. 밑으로 부려 먹을 놈이 없는데.”
“에잉! 아니다, 아니야. 이번에는 정말, 꼭! 반드시 데려오겠다니까.”
아벨은 ‘그 말을 27번 정도 들은 것 같다.’고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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