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17)

#27

대부분 실용적으로 쓸 데라곤 없지만, 보는 재미는 있었다. 프레이는 손목에 감고 있는 목걸이와 똑같이 생겼는데 가운데 박힌 보석만 다른 것을 집어 들었다.

“이건 아직 실험작이긴 한데, 일단 보여 드릴게요.”

프레이가 반대쪽 손목에 목걸이를 감자 이번에는 손이 사라졌다. 이번에도 “쨘!” 하는 소리가 따라왔다. 소매를 걷어 팔뚝까지 보여 주었는데, 전부 텅 비어 있었다. 분명 옷이 따라 움직이는 걸 보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투명해지는 건가요?”

“맞아요. 아직 신체 전부를 투명하게 만들 수는 없고…. 최대 면적에 한계가 있어서요. 르웰린 정도면 머리부터 허벅지까지는 가능할 수도 있어요.”

공중에서 흔들리는 목걸이를 보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나는 최대한 별거 아닌 척, 담담하게 질문했다.

“그러면요, 프레이. 혹시 존재를 지우는 마법이나 아이템도 있나요?”

위드실 거리에서 가면 쓴 남자를 본 이후.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외형이 떠오르지 않았다.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 체격은 어땠고 머리카락 색은 어땠는지. 직접 대면할 때도 뭔가 사이에 낀 듯 흐릿하던 인상은 돌아서자마자 빠르게 지워졌다.

그래 봤자 우연히 스쳐 지나간 사람이라고 잊으려 했지만, 자꾸 찝찝하게 덩어리가 남았다. 그 뒤로 도서관을 뒤지며 알아봤지만 소득은 없었다. 아카데미 도서관이나 마탑이라면 모를까, 황성 도서관에는 마법을 심도 있게 다룬 서적이 드물었고, 그마저도 대부분 황족들만 읽을 수 있었다. 에르켈에게 부탁한다면 찾아볼 수 있겠지만, 요즘 한창 바쁜 에르켈에게 그런 부담까지 안겨 줄 일인가 싶어 미뤄 두었다.

“예를 들면요?”

“음, 뭐.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주변에서 인식하지 못한다거나.”

“투명해지는 게 아니라?”

“네.”

프레이가 고개를 기울이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안경이 다시 미끄러졌다. 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옅은 청색 눈이 한 바퀴를 데구르르 구르고 나서야 그가 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장서각을 뒤져보면 나올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마 없을 거예요.”

꽤 단호한 말투다. 그러면서도 프레이는 연신 갸웃거렸다. 결국 초조하게 소파를 쥐어뜯던 그가 일어나 서적이 있는 쪽을 뒤졌다. 뽑은 책을 열어 훑고 옆에 던져 버리는 과정이 자연스럽고 빨랐다. 아무리 속독을 한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속도였다.

“건국 이후 만들어진 중요한 물건과 마법은 대부분 외우고 있는데, 말하신 것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범죄에 쓰일 확률이 높잖아요. 이런 건 보통 마법이 아니라 물건으로 제작해서 이동 경로를 반드시 기입하게 되어 있거든요.”

이렇게까지 집중해서 찾아봐 주길 기대한 건 아닌데. 혹시나 프레이가 여기저기 알아보느라 아벨의 귀까지 들어가면 굳이 그에게 물어본 이유가 없어진다.

초조한 마음에 나는 그가 던져서 쌓고 있는 책의 탑으로 다가갔다. 제일 위에 있는 것을 집어 들었지만, 부드럽고 낡은 가죽 표지 위에 새겨진 제목은 고대어라 읽을 수도 없었다. 색이 바래지 않은 금박이 각도에 따라 화려하게 빛났다.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 아니고… 프레이?”

그러나 프레이는 이미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입으로는 연신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를 중얼거리고, 깜빡이지도 않을 만큼 부릅뜬 눈에서는 안광이 나오는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면 소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 덕에 잊고 있었지만, 프레이도 마법사였다. 그것도 마탑의 상층에 연구실을 가지고, 마탑주의 조교 노릇을 하는 엘리트. 아벨의 표현처럼 괴팍하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특이한 부분이 있는 건 당연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몰려 들어오는 일거리와 끝이 없는 연구 속에서도 행복하다고 신제품을 만들어낼 리 없으니까.

“마법으로는 안 되는데…. 없는데…. 유물이라면, 가능할지도.”

“유물? 신화시대의 물건을 말하는 거예요?”

세워진 지 몇천 년이 지나도 처음과 같은 외관을 가진 황성만 봐도 알 수 있듯, 마법으로 웬만큼 시간이 지난 물건은 오래된 축에 끼지도 못했다. 특히 마법사가 ‘유물’이라고 한다면 단위가 남달랐다.

프레이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펜 끝을 잘근 씹던 프레이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들고 있던 책을 던지고 책장을 밀었다. 단순한 디자인으로 보이던 책장은 옆으로 밀어 넘기면 다음 칸이 나오는 형태로 총 다섯 칸으로 이루어진 게 네 세트 있었다. 스무 개나 되는 책장을 빼곡하게 채운 책들은 크기와 낡은 정도는 달랐지만, 하나같이 두꺼웠다.

“찾았다, 찾았어요.”

프레이가 유난히 큰 책을 뒤적거리다 폴짝 뛰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프레이가 펼친 페이지에 펜으로 그게 동그라미를 쳤다. 이런 사람들은 책을 아끼지 않나? 이미 바닥에 책을 막 던지는 것만 봐도 그게 아닐 거 같긴 했지만, 종이 위에 펜을 대는 건 다른 문제니까. 깜짝 놀라 쳐다보자 동그라미 안에 들어간 부분만 복사된 것처럼 위로 떠올랐다.

황실 도서관에서도 보지 못한 기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것도 프레이가 만든 걸까?

“기록이 많지 않아서 실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사르바잔의 성물 이야기는 알고 계시죠?”

이래 봬도 최고 권위자라는 학자에게 속성으로 강의받은 몸이다.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에 기록된 네 개의 성물 말고도 그 시대에 기록된 중요한 유물은 여럿 있는데, 마탑의 기록에 따르면 그중에 이름이 붙어 있는 유물이 1423개, 아직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게 672개, 위치가 파악된 게 221개예요. 그리고 그 중 사르바잔의 일행이 사용한,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유물 중에서도 유독 특별한….”

“브랜드?”

“아, 맞아요. 맞아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될 거 같아요. 그걸 임의로 ‘사르바잔의 유물’이라고 불러 볼게요. 그럼 이제 신화시대 유물 중 등급이 나눠져요. 사르바잔의 성물이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에 있는 단계가 사르바잔의 유물, 그 밑이 이름이 붙은 다른 유물들, 그 아래가 이름 없이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것들이고, 그마저 없는 것들도 있어요. 우연히 발굴했는데, 분명 제작 시기는 신화시대와 맞아 떨어지는데 기록이 없는 것들이요.”

아니글란보다 프레이가 훨씬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는, 황실 역사학자가 들었다면 슬퍼서 뒷목을 잡을 생각을 하며 잠자코 프레이의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르웰린이 말한 것과 비슷한 유물이, 여기.”

가느다란 손가락이 떠오른 페이지 중 한 곳을 건드렸다. 고대어와 제국어가 섞여 있어 제대로 읽을 수는 없었다.

“프루데크의 그림자. 프루펜더스의 가면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둘이 별개의 유물이라는 의견도 있어요. 기록이 적어 어떤 형태의 유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르웰린이 원한 기능을 가지고 있네요. ‘존재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존재하되 실체가 없고, 만나되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어둠을 그림자라고 해석할 수도 있거든요.”

“이 단어가 착용자라는 거 아니에요?”

제국 최고 엘리트 수업을 받은 짬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나는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착용자’와 ‘가린다’는 단어를 가리켰다. 프레이는 고대어도 알아볼 수 있냐고 감탄해 주었다.

“르웰린의 말대로 이 단어가 보통 ‘착용자’라고 해석되기는 하는데, 여지가 많아요. 액세서리나 의류처럼 정말 ‘착용’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게 맞기는 한데, 포션처럼 마시는 것까지 포괄적으로 쓰인 경우도 더러 있거든요.”

나는 이미 위드실 거리의 남자가 쓴 게 이 유물일 거라고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현재는 마법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성능을 가진 물건이 더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학부생도 아니고 무려 마탑주의 조교가 딱 잘라 말했다면 충분히 근거가 있었다.

“프루데크의 그림자와 프루펜더스의 가면이 정말 같은 유물이라면, 가면 형태이지 않을까요?”

“으음… 유물의 이름이 직관적인 경우보다 아닌 경우도 많아서요. 이름은 거울인데 실제로는 책이고, 병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목걸이인 경우도 있고. 어쩌면 가면이라고 해 놓고 망토일 수도 있어요. 아예 생각지도 못한 물건, 검 같은 형태일 수도 있죠.”

뭔가 연구할 거리가 주어지자마자 비 맞은 잡초처럼 파릇파릇 살아난 프레이는 결국 남은 책장을 전부 뒤졌다. 다행히 아벨이 돌아와 질색하며 내 손을 잡고 나가려고 하자 징징거리며 매달리느라 내가 뭔가를 궁금해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프레이가 뭔가에 갑자기 꽂히는 게 일상인 듯했다.

나는 다시 바보처럼 돌아와 웃는 프레이를 보며 따라 웃어 주었다.

*

결전의 날이다.

거울 앞에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더 이상 긴장할 것이 남지 않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더 떨렸다. 괜히 머리를 한 번 더 건드리려다 말았다. 이미 전문가의 손길이 지나간 금발은 평소보다 반짝거렸다. 많은 후보를 물리치고 오늘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흰 재킷도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르웰린에게 잘 어울렸다.

내가 이러고 있으니 에르켈은 더 심하겠군.

지금쯤 청심환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회 전 여유 시간 동안 제일 바빴을 에르켈의 얼굴이 기대됐다. 둘이서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4황자 궁 근처도 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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