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준비 다 됐니?”
방으로 들어오던 아벨이 나를 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너무…. 말을 잇지도 못하던 그가 눈물을 훔쳤다. 곧이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다며 찬사를 늘어놓았는데, 그가 말하는 비유를 알아듣기 힘들어 반쯤 흘려들었다. “앤드류 렙스가 자말렉의 압밀 현상에 대한 이론을 증명했을 때도 이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았을 거야.” 따위에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목걸이는 챙겼고, 핀도 챙겼다. 딜런이 준 브로치도 잘 달고 있다. 목록을 하나하나 체크한 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의 연회는 어린 귀족 자제들을 중심으로 한다는 취지에 맞게 보호자도 최대한 줄이자는 방향이었다. 되도록 함께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꼭 필요하다면 작위가 없는 형제로 할 것을 권했는데, 덕분에 백작은 진작 탈락했고, 황성에서 일하는 장남과 차남도 거절했다. 신난 것은 셋째뿐이었다. 혼자 가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미 옷까지 골라 둔 그의 귀에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막내가 너무 귀여워서 어쩌지.”
“제가 귀여우면 왜요?”
귀엽다는 말을 부정하는 시기는 지났다. 르웰린 에드윌은 천사처럼 생겼고, 나는 그 외모를 이용해 귀여운 척을 잘했다.
“세상에는 이상하고 위험한 사람이 많은걸.”
“이상한 사람이요?”
“응. 네가 어린 건 상관없이 껄떡거리는 추잡스러운 새끼…, 아니, 특이하고…. 음. 아무튼 낯선 사람이 지나치게 친근하게 굴면 바로 형에게 말하렴.”
어린애에게 껄떡대는 변태 새끼를 순화할 단어를 찾지 못한 아벨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후에야 뿌듯해했다. 아하. 왜 그렇게 목숨 걸고 따라가려고 하나 했더니, 가족을 제외한 사람들은 다 짐승이야! 하는 느낌인 모양이다. 하긴 르웰린의 얼굴에 변태 한둘쯤은 꼬일 만도 했다. 실제로 조금 더 지나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남자가 꼬이는 몸이 아닌가. 그동안 모임에는 애들만 왔지만 오늘은 보호자들도 있을 테니까 가드가 높아질 만했군.
그 뒤로도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티를 내는 경우도 많지만, 평범해 보이는 경우도 많으니까. 응? 르웰린, 꼭 말해 주기야.” 하는 셋째와 함께 황성으로 이동했다. 종종 드러나는 기세가 얼마나 사납던지. 그의 손에 걸리면 변태는 다시는 세우지 못할 처참한 미래를 가지게 될 기세였다.
보호자는 따로 입장해야 한다는 말에 아벨이 슬퍼한 일을 제외하면 무난했다. 내 이름을 외친 후 천천히 열리는 문 앞에서 바짝 긴장했지만 곧 낯익은 얼굴들을 찾아 어울릴 수 있었다.
“세상에, 린. 오늘 너무 예쁘다.”
“고마워. 엘라도 오늘따라 더 예쁘다. 드레스가 잘 어울려.”
결국 나를 굴복시켜 애칭을 부르는 것을 허락받은 헬레나가 내 말에 한 바퀴를 돌며 드레스를 자랑했다. 옅은 분홍색 드레스와 그 위를 장식한 진주가 잘 어울렸다. 평소 자연스럽게 풀고 핀이나 리본으로 장식하던 머리를 하나로 묶어 나비 모양의 핀으로 고정시킨 것도 훌륭한 선택이었다. 엘리엇의 선물을 산 날 루시아와 나눠 낄 거라고 구매했던 그 핀이다. 오늘 루시아도 저걸 달고 왔겠네.
내 딸이 헬레나처럼 사랑스럽다면 아끼고 돌 만도 했다. 후작의 딸 사랑이 대단하다 못해 넘친다지만,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르웰린이 어디 가서 다른 집에 극성이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긴 했다.
“그 브로치는 뭐야? 꼭 네 눈 색 같아.”
“아.”
화려한 조명 아래 더 반짝거리는 브로치에 시선을 뺏긴 헬레나가 칭찬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어린애 풋사랑이라지만, 그녀가 짝사랑하는 엘리엇이 준 선물이라고 말하기는 좀 민망했다.
하지만 이미 약속한 바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나는 별거 아닌 척 말했다.
“엘리엇이 선물했어.”
“엘이?”
깜빡깜빡. 조금 전까지 활기에 찼던 눈이 브로치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그거지. 질투 맞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망할, 엘리엇 딜런. 내게 브로치를 가져다줄 거였으면 헬레나에게도 뭐라도 선물을 하지 그랬어. 물론 후작이 그 사실을 알았다간 콧김을 뿜어대겠지만.
엘라? 내 부름에도 꼼짝 않는 헬레나를 보자 눈치가 보였다. 엘리엇은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그가 이 상황을 예상한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친구니까. 응. 그래서 선물해 준 거니까.”
“…응.”
이미 기분이 상했는지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러웠다. 어떻게든 저걸 돌려놔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고민하던 나는 젠장, 하면서 품에서 상자를 꺼냈다.
미안해, 씨씨. 너를 위해서는 목걸이를 준비했으니 서운해하지 말아 줘.
장남에게도 짧은 사과를 보냈다. 주인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선물한다는 용도는 그대로였으니 봐주세요.
“나도 엘라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거든.”
“나한테?”
“응. 지금 열어 봐도 돼.”
불퉁하게 나왔던 입술은 상자를 풀며 쑥 들어갔다. 마음에 쏙 들었는지 금세 미소를 띤 헬레나는 세상에, 세상에를 연신 반복하다 두 손으로 핀을 꼭 쥐었다.
“정말 고마워. 린…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어쩌지?”
“네가 잘 사용해 주면 그게 선물인걸.”
나를 한 번 끌어안은 헬레나가 뺨에 입을 맞추고 루시아에게 자랑해야겠다며 떠났다. 이러다 루시아를 달래 주기 위해 또 선물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건 아니겠지?
*
다행히 아직 소란스러운 걸 보면 황족들은 나타나지 않은 것 같았다. 방 안에 애들을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각 잡고 준비한 연회인지라 평소보다 무게 잡히긴 했지만, 어른이 없는 연회라는 건 결국 애들 잔치라 분위기에 적응한 애들은 풀밭에 풀어 둔 망나니처럼 신이 났다. 평소보다 연령대가 올라간 것과 보호자가 함께한 것이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키즈 카페가 될 뻔했다.
수에닐 공작가에서 지원했으니 황녀는 올 테고, 황태자도 연회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얼굴을 비칠 것이다. 그 둘이 온다면 밑의 형제들도 쪼르르 딸려 나올 수밖에 없다. 2황자는 얼핏 봤지만, 3황자는 처음 본다. 과연 어떨지 기대가 됐다. 기 센 형제들 사이에서 기가 죽어 있다면 잘 주워둬야 하고,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면 포섭할 필요가 있다. 원작 에르켈의 죽음까지 7년도 채 남지 않았다.
아네트는 고분고분 말을 잘 듣지만 지나치게 납작 엎드리지 않는 에르켈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모임은 생각보다 잦았고, 에르켈은 또래들 사이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고작 애들 사이의 서열이 그대로 어른들에게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엘리엇이 전해 주기로는 이미 4황자 궁에 들어오는 선물의 양이 달라졌다고 했다.
이대로 잘 처신하면 한 번 쓰고 버리는 패로 낭비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겠지. 하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나치게 세가 크면 아네트는 자신의 손으로 키운 에르켈을 손수 잘라 버릴 테고, 모자란다면 미련 없이 버릴 것이다. 에르켈을 대신할 방패가 필요하다.
“왔냐.”
어째 점점 말투가 저렴해지는 엘리엇이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사람이 많은 황궁 연회에서 채신머리없게. 그의 말투를 지적하려던 말은 퀭한 얼굴에 쑥 들어갔다.
“꼴이, 얼굴이 그게 뭐야?”
모임이 없는 열흘간 푹 쉬고 반질반질 깐 달걀 같은 얼굴을 하고 와도 모자랄 판에. 엘리엇은 나흘 정도 밤을 새운 것처럼 푸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에 초점도 간간이 풀리는 게,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엘리엇이 꼬맹이 같지 않은 부분은 자기 관리에도 적용되었다. 칼같이 운동 시간과 공부 시간, 취침 시간을 지킨다고 뿌듯해한 그는 옷에 놓인 자수 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인간이었다. 절대 이렇게 중요한 날 저런 몰골로 나타날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는 거다.
“말도 마.”
“무슨 일이야. 잘 차려입고 오라던 게 누군데.”
“형이 결혼 상대로 부르주아를 데려왔어.”
“뭐?”
“영지는커녕 작위도 없는 집안과 결혼하겠다고 통보했으니 어머니는 뒤로 넘어갔고. 형은 어차피 명예는 돈으로 지키는 게 아니냐고 대들더라.”
맙소사. 입이 떡 벌어지는 소식이었다. 집안이 난리가 났으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엘리엇이 목을 죈 타이를 조금 풀었다. 매끈한 감색 타이가 풀리면서 모양이 흐트러졌지만 지금 그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정신도 없어 보였다.
“너희, 너희 집은 방임주의라며.”
“아버지야 그렇지. 내가 그랬으면 어머니도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을 거야. 문제는 형의 약혼녀가 로즈벨 영애라는 거고, 더 큰 문제는 그녀가 수에닐 공작의 조카라는 거지.”
“오….”
공작의 조카라는 건 곧 황후의 조카라는 뜻이다. 황족 못지않게 대우받으며 자란 그 콧대 높은 아가씨에게 파혼을 얘기한다면 후폭풍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존심 상한 그녀가 황후에게 눈물로 호소하면 일이 장난 아니게 커질 것이다. 이사벨은 이미 엘리엇의 형인 오리온 딜런과 약혼을 추진하기 위해 황후를 졸랐던 전적이 있다.
이 얘기를 들은 에르켈이 뒷목을 잡는 모습이 상상됐다.
엘리엇이 바스라질 것 같은 얼굴로 알코올 없는 샴페인을 물 마시듯 털어 넣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실연 후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는 장면도 저렇게 슬프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