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17)

#29

“오리온, 시발. 형이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긴 해도 그렇게 막 나가는 선택을 할 줄은 몰랐어. 제일 기막힌 부분이 뭔 줄 알아? 결혼 상대라고 데려온 상대가 남자라는 거야. 귀족이 아닌 것도 문제고, 이사벨 로즈벨도 문제인데, 심지어 후계를 낳을 수도 없는 상대라니. 난 아버지가 그렇게 열 받은 모습을 처음 봤어.”

“맙소사. 진심이래?”

“진심이니까 집까지 데려왔겠지. 이런 제기랄, 말이 돼? 자기가 무슨 로맨스 소설 주인공인 줄 아느냐고.”

급기야 성질을 부린 엘리엇이 시종에게 술을 요청했다. 미성년자에게도 알코올이 허용되는 제국법 덕에 어렵지 않게 와인을 받은 엘리엇은 아예 옆에 잔을 몇 개 늘어놓았다. 제정신으로는 사태를 버티기 힘든 모양이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소한 집에 얘기한 후에 허락이라도 받고 상대를 소개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내 말이 그거야. 본인은 그게 로맨틱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오히려 상대에게는 민폐라고. 고함이 오가는 사이에서 굳어 있는 게 안쓰러워서 내가 방으로 안내했다니까.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세 잔을 연이어 들이켠 후에야 조금 진정한 엘리엇이 욕을 중얼거렸다. 헬레나가 진작 떠나길 다행이다. 지금 상태에서 엘리엇이 그녀를 마주친다면 속내야 어떻든 고운 말이 나갈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침 헬레나도 브로치 일로 엘리엇에게 심통이 나 있었으니 자칫 싸움이 날 수도 있었다.

“음…. 그래서 어떻게 하겠대?”

“어떻게 하긴. 어머니가 그럴 거면 후계 자리는 꿈도 꾸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겠대. 미련도 없다면서. 덕분에 화살이 나한테까지 왔지.”

나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꿈 많을 열한 살. 엘리엇 딜런의 꿈은 가주의 의무 따위 없이 적당히 재산을 물려받은 뒤 놀러 다니는 돈 많은 백수였다.

“르웰린. 엘리엇도 안녕. 너희 형이 저쪽에서 오지도 못하고 서 있던데. 불러다 줄…, 오….”

타이밍 좋게 나타난 아벨이 초콜릿으로 코팅한 과일을 가져오다 엘리엇의 얼굴을 보고 멈췄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검은 머리의 청년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닌 척 시선을 주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는 급하게 다시 눈을 돌렸다. 얼굴을 보니 이사벨 로즈벨이 왜 그와 약혼하기 위해 목을 맸는지 알 수 있었다. 세기의 미청년까지는 아니어도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 이목구비였다. 뭐, 지금은 그냥 사랑에 눈이 돌아 자신의 의무를 팽개친 멍청한 놈일 뿐이지만.

“힘내라, 엘리엇. 왜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저놈이 잘못했겠지.”

아벨은 양손에 든 과일 중 한쪽을 기꺼이 엘리엇에게 내주었다. 엘리엇은 힘없이 감사 인사를 하며 그것을 씹었다. 술과 단것이 들어간 엘리엇은 처음보다는 상태가 나아 보였다. 비록 술기운이 돌아 달아오른 얼굴은 취객의 그것이었지만.

나는 아벨에게 조금 전 들은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어차피 곧 퍼질 소식이었다.

“혹시 앨런 케일러스? 상대가 브루넷에 푸른 눈 아니었어? 좀…. 맥아리 없게 생기고, 아니, 단정하고.”

아벨이 그에 대해 설명하자 고민하던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아벨이 딜런가 장남의 아카데미 동기였겠구나.

“내가 걔네 그럴 줄 알았다니까. 둘이 아카데미에서 아주…, 음, 로맨스를 찍더라.”

맥락을 봐선 ‘아주 지랄을 하더라.’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형제 중 제일 입이 거친 건 셋째였다. 차남조차 말로 다투면 셋째 앞에서 맥을 추리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마법사들은 전부 저런가?

“아카데미요?”

“그래. 앨런이 오리온을 개 패듯 패, 아니, 많이 거부했는데. 앨런은 검술부로 갔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검 실력이 좋았거든. 먼저 졸업해서 어떻게 됐는지 몰랐는데, 결국 성공한 모양이네.”

아벨의 말을 들은 엘리엇은 더 깊게 절망했다. 잠깐 눈이 홱 돈 게 아니라 아카데미 시절부터 이어진 절절한 사랑이라는 말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직감한 모양이다. 게다가 상대는 거부했는데 오리온 딜런이 죽자 살자 매달렸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으니. 나는 불쌍한 엘리엇을 대신해 그의 형을 노려봐 주었다. 차마 이쪽으로 올 생각도 못 하고 거리를 유지하던 오리온 딜런이 움찔거렸다.

그렇게 대단한 사랑이면 제대로 아껴나 주든가. 철이 없어도 저렇게 없나. 하다못해 몇 년 뒤 후계 자리를 공고히 한 후였다면 지금처럼 엘리엇이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었을 거 아냐.

아벨이 왜 뻑 하면 차남을 보며 “에이잉!” 하고 혀를 차는지 알 수 있었다. 오리온 딜런을 보면 나도 탐탁지 않은 기분이 되어 “쯧쯧!” 하고 싶었다.

엘리엇은 브로치를 보며 기운을 차렸는지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다. 이것 때문에 헬레나의 싸늘한 시선을 받았다고 투덜대려는 계획이었지만 그럴 수 없게 됐다. 나는 그를 다시 위로한 후 연회장을 살폈다. 아벨을 떼어 놓느라 제법 힘들었지만 가서 오리온이나 상대하라는 말에 못 이긴 그는 다시 한 번 내게 이상한 놈이 집적거리면 바로 찾아올 것을 다짐받고 오리온 딜런을 골리러 떠났다.

나는 고만고만한 키들 사이에서 보라색 머리를 찾았다. 씨씨, 엘리자베스 룩스틸이 어디에 있을까. 황족들이 도착하기 전에 찾아서 목걸이를 건네주는 게 나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되면 자리를 옮기기 쉽지 않을 테니까.

*

홀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는 연회에서 특정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부터 구석까지, 제법 돌아다닌 것 같은데 보라색 머리는 흔적도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마음이 초조했다. 금방이라도 문이 열리며 황자가 등장할 것 같았다. 황족 이후에 들어오는 무례를 범할 만큼 간이 큰 자는 없으니 지금쯤이면 이 안에 있을 텐데.

허탕만 치는 나를 발견하고 도움을 준 건 루시아였다. 비밀로 하기로 약속해 놓고 헬레나에게 내 얘기를 한 것이 미안했는지 사과를 했던 루시아는 뭔가를 찾는 듯 기웃거리는 나를 의식하며 주변 영애들과 얘기를 나눴다.

“룩스틸 영애가 이번 연회에 왔다는 얘기를 들었어.”

“룩스틸이면, 그?”

“응. 예술에 있어서 룩스틸 자작님의 식견을 따라갈 사람이 로베누스에도 없다고 하잖아. 그런 분의 조카라면 수도의 유행과는 다른 드레스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반 묶은 머리는 예상대로 나비 핀이 장식하고 있었다. 크게 주름 잡은 크림색 드레스를 입은 루시아는 “그렇지 않니?” 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주변에 몰려든 친구들이 “네 말이 맞아, 루시아.” 하고 동의했다.

과연 위로 언니가 둘 있어서 그런가. 루시아의 여자애들 다루는 스킬은 헬레나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엘리자베스 룩스틸이 홀에 도착했으며, 테라스에서 얘기 중이더라는 사실을 알아낸 루시아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대화 중이라면 방해해선 안 되겠지. 곧 중앙 홀로 올 테니, 그때 어울려 보자.”

“그렇게 하자, 루시아.”

“그러고 보니 소피, 오늘의 목걸이가 훌륭한데. 역시 자작 부인의 안목이시니?”

“맞아. 어머니께서 준비해 주셨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루시아 덕에 이미 그 주변 애들은 씨씨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사이 주변이 눈치채지 못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후 테라스로 향했다. 루시아가 윙크하곤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가 입을 열어 엘리엇의 귀에까지 들어간 일은 기꺼이 용서하기로 했다.

테라스 근처에 도착한 나는 괜히 손을 옷에 문지르다,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미쳤어? 그렇게 첫사랑이 아니라고 하더니. 고작 사과의 선물을 전해 주러 와 놓고 왜 이렇게 긴장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럴 리 없다. 상대는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애고, 그런 상대에게 연정을 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럴 바엔 확 혀를 깨물고 뒤져야지, 쓰레기 새끼! 그래. 이건 그냥. 상대를 르웰린 에드윌과 엮이는 미친놈 중 하나가 아닐까 의심했던 게 미안해서 그런 거지. 멀쩡한 애를 여장 변태가 아닐까 걱정했던 게 미안해서.

마음 정리를 끝낸 후 조심스럽게 테라스를 가린 커튼을 걷고 들어갔다.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으니 대화가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테라스에는 수도에서 자주 본 것과는 다른 양식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보라색 머리의 여자애가 있었다. 이제 갓 성년이 됐을까. 어린 얼굴을 보니 레베카 룩스틸은 아닌 것 같았다. 작은 뒷모습을 보며 품에 있던 상자를 꺼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니? 네 어머니가 아시면 어쩌려고.”

“고모는 재미있다고 했는데….”

“그분의 기준대로 살다간 수도에 발도 못 붙이게 될 거야.”

“음, 저기….”

꽤 중요한 얘기 중인 것 같아 끼어들기 민망했지만, 뒤쪽에 서 있다 들키는 게 더 부끄러울 것 같았다.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르고 잔소리하던 여자는 놀랐고, 씨씨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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