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17)

#30

“어?”

보라색 머리에 예쁘장한 얼굴. 또래 중에서도 유독 귀여운 얼굴은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깜찍했지만 내가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어, 그….”

“뭐야. 넌 누구야?”

그러는 너는 누군데? 나는 당황해서 한 걸음 물러섰다. 분명 엘리자베스 룩스틸이 이곳에 있다고 했는데.

“나는 르웰린 에드윌이야. 음, 이곳에 엘리자베스 룩스틸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내 말에 여자애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엘리자베스 룩스틸인데. 나를 알아?”

“뭐?”

머리에 종이 뎅 울렸다. 보라색 머리에 룩스틸. 열 살. 당연히 내가 아는 씨씨가 엘리자베스 룩스틸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여자애가 자신이 엘리자베스 룩스틸이라고 한다. 뒤에 있는 여자의 반응을 봐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그러면 내가 찾던 씨씨는 대체 누구지?

“어, 그. 나는 씨씨를 찾고 있는데. 너처럼 보라색 머리에,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였어. 룩스틸가로 편지도 보냈었는데.”

“씨씨?”

곰곰이 생각하던 엘리자베스 룩스틸은 입을 틀어막고 “헉.” 했다. 푸른 눈이 데구루루 굴러갔다.

엘리자베스가 씨씨가 아니라면 그 애는 누구일까. 혹시 자매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렇다면 에르켈이 말해 줬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가문의 사생아? 하지만 사생아가 황성의 초대를 받고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아, 으으음. 그렇구나. 씨씨를…, 찾고 있었구나.”

“미안. 네 이름이 엘리자베스라고 해서, 당연히 그 이름의 애칭인 줄 알았어.”

“아냐. 내 애칭이 씨씨인 건 맞거든. 네가 찾는 그 애도 씨씨고. 둘이 서로 장난치면서 씨씨라고 불렀는데 그게 굳어서.”

다행히 엘리자베스는 그 애를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씨씨도 연회에 참석했느냐 물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난처한 얼굴로 대답을 꺼렸다.

“어어…. 오기는 했을 텐데. 아니, 왔을 수도 있긴 하지만 아닐 수도 있는데. 음. 그러니까….”

“혹시 그 애가 연회에 들어올 수 없는 거니?”

혹시 서녀인 걸지도 모른다. 정부가 낳은 딸이라면 연회에 초대받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면 저번에 황성에서 만난 것도 설명되지는 않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은 그 정도였다. 하지만 신분을 묻는 말에 엘리자베스는 빠르게 부정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런 건 아닌데….”

우는 얼굴이 된 엘리자베스가 뒤쪽의 여인을 흘긋거렸다. 나도 파악하지 못한 사태를 그녀는 파악했는지, 어느새 팔짱을 끼고 엄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내려 보는 중이었다. 나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을 고르던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밖에서도 들릴 만큼 큰 목소리였다.

“그! 네가 찾는 씨씨는! 조금 늦게 올 것 같아! 그 애가 사람 많은 곳을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이야. 으으음…. 오더라도 정원으로 빠져나가지 않을까? 그나마 꽃과 나무는 좋아하거든. 황성의 정원은 아름다우니까!”

“그래? 고마워. 그런데 너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니?”

“어, 음! 목이 메서 그래. 원래 지금쯤 노래를 연습하고 있을 시간이거든.”

“이렇게 늦은 저녁에?”

“루베누스의 저택들은 방음이 훌륭해.”

찝찝했지만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커튼 뒤로 둘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어디 가, 르웰린?”

“응. 잠깐 정원에.”

마주친 에이든은 나를 붙잡고 울상을 지었다. 황태자, 황녀, 그 아래 황자들까지 등장하는 연회에 겁을 먹고 매달리는 것을 적당히 달랬다.

“곧…. 곧 황녀께서 오실 것 같은데.”

“괜찮아. 금방 올 거야. 많이 긴장되면 너도 와인을 조금 마시는 게 어때?”

“어, 어머니께서 오늘, 오늘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취할 정도로 마시는 것도 아닌걸. 따뜻하게 데운 걸로 한 잔 정도만 마시면 긴장이 조금 풀릴 거야.”

“그, 그럴까?”

“물론이지. 엘리엇도 와인 마셨더라.”

엘리엇의 얘기를 하자 에이든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에이든은 엘리엇을 무서워하던 과거를 뒤로하고, 친해진 후에는 많이 의지했다. 우유부단한 자신과 비교되는 엘리엇에게 동경 비슷한 걸 품은 듯했다.

“응, 그래야겠어. 고, 고마워. 르웰린….”

대충 어깨를 다독인 후 빠르게 홀을 빠져나갔다. 그의 말대로 시간이 별로 없었다.

주변이 어두워질 정도로 늦은 시간에 황성에 머무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법으로 띄운 등 아래 드러난 정원은 낮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다. 곳곳에 스스로 빛을 내는 풀이 있었는데, 식물에는 관심이 없는 나도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천상의 화단이었다. 저걸 장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대단위로 심다니. 역시 이런 게 황성인가.

환상의 세계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으로 멍하게 정원을 거닐었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머릿속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 환상 같은 배경에 씨씨가 나타났다.

“르웰린.”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씨씨는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였다. 여전히 머리는 장식 없이 푼 채였고, 이렇다 할 장신구도 없었지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력으로 만든 불빛 아래 씨씨는 충분히 예뻤다.

“어, 너… 오늘. 굉장히 예쁘다.”

“…고마워.”

대답이 돌아올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씨씨는 이전보다 큰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괜히 부끄러운 기분에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나는 네가 엘리자베스인 줄 알고 그 애를 찾았는데. 혹시나 해서 정원에 나와 봤는데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엘, 씨씨는 내…, 친척이야.”

말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구나. 이전보다 조금 높은 목소리로 봐서 씨씨가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정원에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는데,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던 모양이다.

나는 쉽게 말을 고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에이든이 긴장할 때마다 말을 더듬는 걸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 내가 입을 열면 딱 그럴 것 같았다.

“그…. 사실.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았어.”

상자를 내미는 손이 떨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포장을 풀어 본 씨씨의 눈이 커졌다.

“이건….”

“선물이야. 사실… 내가 너한테 사과해야 할 일이 있는데, 아니, 그러니까…. 음. 꼭 그것만은 아니고, 네 생각이 나서. 응.”

입술을 달싹이던 씨씨가 작게 “고마워.” 했다. 다행히 목걸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푸른 불빛이 비친 보석이 반짝였다.

“내, 가…. 해 줄까?”

이게 뭐라고 목이 멨다. 가만히 목걸이를 들고 있는 씨씨에게 손을 내밀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손 위에 목걸이를 건넸다. 씨씨의 뒤로 가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이 떨렸는데,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기만을 빌었다. 하얀 목 위에 가느다란 목걸이 줄이 걸렸다.

“잘 어울린다.”

“응….”

“이제, 응. 슬슬 들어갈까? 이러다 늦겠어.”

화려한 전쟁터로 돌아갈 시간이다. 눈을 마주치지 못한 내가 먼저 몸을 돌리자 씨씨가 소매를 잡았다. 어, 하는 사이에 다가온 얼굴은 금세 떨어졌다.

당황해서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 뽀뽀…. 어. 연애 경험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고, 르웰린이 된 후 애정 담긴 뽀뽀를 받는 게 처음도 아닌데. 당장 헬레나에게도 볼에 뽀뽀를 받은 게 조금 전인데. 그러니까 이건. 감사의 인사 같은 건데.

*

씨씨는 일행과 함께 들어가겠다고 나를 먼저 들여보냈다. 나는 멍청하게 고개만 끄덕이며 홀로 들어갔다. 아까보다 정신을 차린 엘리엇이 아벨과 함께 나를 챙길 때까지도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정신을 놓고 있어?”

“르웰린, 다시 말하지만 이상한 놈을 만났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줘야 해.”

“아니.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그사이 멀끔한 꼴로 돌아온 엘리엇은 내 대답이 영 미덥지 못한 듯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3황자가 입장한다는 안내에 웅성거림이 뚝 멈췄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정원에서의 일을 빠르게 머리에서 털어냈다.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생각보다….”

엘리엇과 말없이 의견을 나누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붉은빛 도는 금발은 아니지만 제 어머니를 닮았다는 화사한 금발. 이제 열한 살 된 3황자는 모두의 시선이 쏠린 부담스러운 상황에도 생각보다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미소를 지어 줄 여유가 없다는 점이나, 굳어서 올라간 어깨가 보였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귀여운 일이다. 오히려 저런 점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접근할 가치가 있다. 3황자가 황태자처럼 완벽한 인간이었다면 협력은 개뿔. 언제 배신당할지 몰라 잠도 잘 수 없었을 것이다.

3황자 리키온의 어머니 아리엘은 황후와 함께 입궁한 그녀의 들러리였다. 황후가 결국 황자를 낳지 못하고, 황가의 증명을 타고난 1황자가 황태자 위를 받으면서 황후와 함께 아리엘의 세도 자연히 줄었다. 아리엘과 황후의 친분이 얼마나 돈독한지는 모르겠지만, 3황자와 황후의 의리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황후는 제국에 세 개뿐인 공작가인 수에닐의 고명딸로 태어나 걸음마를 떼기도 전부터 황후가 되기 위해 교육받은 사람이다. 그 고아한 자존심에 자신의 자식이 황위를 이을 수 없다는 것도, 자신의 들러리가 황자를 낳은 것도 용납할 수 없었을 텐데. 아네트와 황태자라는 공동의 적이 있으니 협력했겠지만, 분명 틈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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