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17)

#32

화려한 외모가 귀찮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득이 실보다 많다고 생각했는데. 시선을 잡아끄는 얼굴 탓에 끝없이 사람이 붙어오자 성질이 났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엘리엇이 나를 구출해 주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원래 인기인의 삶은 고단한 법이지. 힘내.”

“위로하는 건지, 약 올리는 건지 헷갈리는데.”

“당연히 약 올리는 거지.”

짜증나. 노려봤지만 엘리엇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벌써 저렇게 뻔뻔한 놈이 나중에 크면 어떻게 될지.

이렇게 주변이 복작거려서야 3황자가 다가올 수나 있겠나 싶었지만, 그의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 빛을 발했는지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화려한 금발을 보며 지금쯤이면 그를 인식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겠나 싶었다.

실수는 안 돼. 어린애라고 생각하지 마. 할 수 있어. 내게 그가 필요한 게 아니라, 그에게 내가 필요한 거야.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효과적인 접근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분명 위험하지만, 위험을 감수해야 크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내 각오는 소매를 붙잡는 손길에 끊어졌다. 젠장, 또?

“저기, 헉. 저기…. 에드윌.”

“안녕, 룩스틸. 또 보네.”

주변을 뚫고 나타나 나를 붙잡은 건 엘리자베스 룩스틸이었다. 내 소매를 뜯어버릴 듯 움켜쥔 것과 달리 그녀는 불안하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입술을 짓씹던 엘리자베스는 우는 얼굴로 내게 매달렸다.

“혹시…. 혹시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급한 일이니?”

부드럽게 거절하자 엘리자베스는 이내 발까지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했다.

“급해. 많이 급해. 바쁜데 붙잡은 건 미안해. 하지만 아주, 급하고. 아주 중요한 일이야. 잠시만 시간을 내주면 안 될까?”

“잠시만.”

내가 보라색 머리 여자애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딜런이 이미 흥미롭게 우리를 보고 있었다. 굳이 먹잇감을 던져 줄 필요는 없지.

“엘리엇. 잠깐….”

“그래, 그래. 연애도 중요하지. 걱정 말고.”

실실 웃는 게 미심쩍었지만 어쩔 수 없지. 엘리엇도 엘리자베스 룩스틸이 내가 찾던 그 애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러다 온 제국 사람이 다 알겠네.

엘리엇이 루시아와 함께 3황자에게 이동하는 걸 확인한 후 엘리자베스와 구석으로 이동했다. 테라스로 빠지는 게 안전하겠지만 시야에서 3황자가 멀어지는 것은 불안하다. 엘리엇과 루시아 조합이라면 든든하다. 충분히 시간을 끌어줄 것을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장 그 사이에 끼어들 준비를 해야 했다.

“무슨 일이야?”

엘리자베스는 치마를 쥐었다 놓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씨씨와 친척이라더니, 같은 버릇이 있는 모양이다.

“혹시… 너, 네가…. 씨씨에게. 목걸이를 준 게 사실이니?”

“어…. 맞는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의아했지만 내 대답에 얼굴이 하얗게 변한 엘리자베스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비틀거리지 않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용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 그 애에게… 진심… 이니?”

진심? 당최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진심. 내가 씨씨에게 선물한 게 그 애를 골리기 위한 장난이라도 된다는 뜻일까. 그러고 보면 아직 씨씨의 이름을 듣지 못했는데. 엘리자베스는 한 번 부정했지만 정말 그 애가 사생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떠름한 기분이 됐지만 그래도 씨씨를 아끼고 걱정해서 이러는 거라면 이해할 수는 있었다.

“진심도 아닌데 선물을 하지는 않아.”

“…….”

“네가, 음.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그런 의도는, 그러니까. 씨씨에게 장난을 치려는 의도는 아니야.”

“진…, 진심으로.”

“응.”

엘리자베스는 거의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맙소사, 라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욕을 한 것 같기도 했다. 신을 찾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대로 두면 머리를 쥐어뜯을 기세라서 조심스럽게 손등을 붙잡고 내렸다.

“진정해. 기껏 장식한 머리가 엉망이 되면 속상할 거야.”

“…고마워.”

넌…. 다정하구나. 응. 다정하고, 상냥하고… 그러게. 중얼거리던 엘리자베스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네가 진심인 씨씨는 드레스를 입은 씨씨니?”

“뭐?”

“드레스를 입은, 씨씨냐니까.”

드레스를 입지 않으면 뭘 입는데? 농담인가 싶었지만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너무 비장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그래…. 그렇겠지.” 했다.

“미안해.”

“네가 왜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다 나 때문이야.”

루나 말을 잘 들을걸. 힘없이 말한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목걸이를 풀어, 내게 넘겼다. 혹시 거부라도 할까 봐 손에 쥐여 주고 손가락을 덮어 주기까지 한 그녀가 진지하게 눈을 맞췄다.

“잘 들어, 에드윌. 그 애는…. 씨씨는 분명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아.”

“뭐?”

“잘 듣고 있어. 언젠가 네게 필요한 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 애는 평소에는 좀. 넋을 놓고 다니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 오히려 언제나 생각이 많지.”

내 입술 앞에 검지를 댄 엘리자베스가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급기야 옆에 있던 커튼 끈을 푸는 바람에 주변의 배경이 가려졌다.

“욕심도 있어. 사실 많지. 한번 하기로 한 건 반드시 해. 현악기라곤 들어 본 적도 없는 애가 고모에게서 칭찬을 듣기까지 겨우 2주가 걸렸어.”

이건 칭찬인지 욕인지 당최 알 수 없다. 그녀가 말하는 씨씨가 내가 아는 씨씨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그리고….”

그리고?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좀… 아니, 많이 심하지.”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 번 내 손과, 그 안에 쥐어진 목걸이를 단단하게 잡으며 내게 다짐받듯 말했다.

“그때. 네가 언젠가 오늘의 선택을 무르고 싶어진 순간. 이걸로 거래를 하자고 해.”

“거래라고?”

“포기하지는 않지만 받아는 들일 거야. 그래야 하니까.”

“나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그냥. 기억해 둬. 나도 네가 그걸 쓸 일이 없길 바라. 이왕이면 모든 게 평화롭게 해결되는 게 최선일 테니까. 하지만 만약… 네가 오늘을 후회한다면, 거기에는 내 책임도 있으니까.”

내가 한 거라곤 고작 사과의 의미로 목걸이 하나 건네준 것뿐인데. 당최 이해하기 힘든 반응이었지만 일단 재킷 안쪽에 목걸이를 잘 챙겨 넣었다.

“드레스가 구겨졌더라.”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커튼을 걷고 나오는 것과 동시에 2황자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기가 막히는 타이밍이었다.

*

엘리자베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연회가 끝나면 에르켈과 상의를 해 봐야겠다.

3황자에 이어 2황자까지. 홀에 황족이 둘이나 나타나자 다행히 내게 오는 관심도 흩어졌다. 다시 봐도 신기한 머리 색이다.

엘리엇이 얼간이, 머저리라고 참혹하게 평했고, 내게도 영 평이 좋지 못한 2황자는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이 만족스러운지 웃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절대 못 생긴 얼굴은 아닌데도 호감이 가지 않는 인상이다. 나는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확인했다. 저건, 일회용이다. 저놈이 황태자와 고작 한 살 차이 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르웰린 에드윌입니다.”

이제 미소를 짓는 데 큰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입꼬리와 휘는 눈에 3황자가 마주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찾고 있었는데. 모두가 입을 모아 에드윌을 찾으니, 나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

자연스럽게 나를 높여 주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내게 호감을 사기 위해 입을 열어 준다는데, 굳이 겸손을 보일 이유도 없다.

“부끄럽습니다.”

“무엇보다 내 아우의 친구가 아닌가. 에르켈과 친밀하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는걸.”

“신경을 많이 써 주시는군요.”

“그럼. 그 애는, 내 가족이니까. 에드윌가 형제들도 돈독하기로 유명하다지.”

돈독하다 못해 극성이지.

엘리엇, 루시아, 3황자가 모이자 웃음이 떠나지는 않았지만 애들 대화 같지는 않았다. 엘리엇은 꽤 위험한 수위까지 대화를 이끌어 나갔고, 루시아는 그걸 적절히 커트하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둘이 입을 맞춘 것도 아닐 텐데. 환상의 호흡이었다. 저 둘이 작정을 하면 이후 사교계를 정복하는 건 무리가 아닐 것이다. 사실 이미 루시아는 또래의 중심이다.

커스터드 슈와 초콜릿 슈 중 하나만 먹어야 한다면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던 에이든이나, 생일 선물로 뭘 받을지 고민하던 루이스가 생각났다. 귀찮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었지. 애들은 좀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이런, 이런.”

어깨 위에 올라오는 손에 말을 잇지 못하고 굳었다. 뭐냐, 이건.

손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릴 필요는 없었다. 웃는 소리가 성큼 다가오더니 번드르르한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짧은 사이에 와인을 마셨는지 훅 풍기는 술 냄새와 하늘색 머리카락. 헷갈릴 수도 없는 색이었다. 고양이 학대범이 질 나쁘게 웃었다.

“형님.”

표정 관리에 실패한 3황자가 그를 불렀다. 아무리 황자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구는 것은 무례하다는 지적이었지만 2황자는 알아듣지 못한 척 반대쪽 어깨로 손을 옮기며 팔로 나를 감쌌을 뿐이다.

“아, 이게 그 에드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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