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게’라고? 황태자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호칭이다. 황제라고 해도 나를 향해 ‘이게’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머저리인 줄 알았더니 미친놈이었다.
나만 굳어 있는 건 아니었다. 3황자도 당황했고, 엘리엇과 루시아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에르켈이 나타났으면 장소와 상대를 잊고 머리라도 후려쳐 줬을 텐데. 음악 소리를 제외하면 주변이 모두 싸해진 상황에 2황자의 웃음소리만 경박하게 울렸다.
“멀리서 봐도 유독 재미있어 보여서 말이야. 리키온, 네가 그렇게 친분을 쌓는 타입도 아니고. 그러니 분명 여기에 특별한 게 있나 싶었지.”
‘특별한 것’의 어깨를 만지작거리는 2황자의 손길에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분명 2황자는 내게 무례를 저지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내가 그의 무례를 지적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않나. 황족의 몸에 손을 대는 것도, 허락 없이 눈을 마주치는 것도 법도를 따지자면 불경이다.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기에 2황자는 고작 열셋이었고, 나는 어린 남자애였다. 영애에게 손을 댄 것도 아니고. 고작 어깨를 좀 내주었다고 난리를 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도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기보다는, 기분이 존나 나쁠 뿐이다.
어린 새끼가 발랑 까져 가지고. 시발.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의 고함 소리가 떠올랐다. 애써 묻어두던 날이 떠오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에드윌가 막내의 외모가 유명하다는 말을 반쯤은 흘려들었는데. 소문도 무시할 게 못 되는군.”
“형님.”
급기야 허리로 내려가는 손에 3황자가 나섰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데, 나설 수 있는 게 그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어린애 허리에 만질 게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변태 새끼들의 심리를 일반인이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엘리엇의 얼굴도 장난이 아니었지만 루시아의 표정이 더 장난 아니었다. 그녀는 들고 있는 부채를 당장 2황자의 얼굴에 내던지지 않는 것에 인내심을 전부 끌어모으고 있었다. 내가 2황자였다면 저 흉흉한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악몽을 꿨을 텐데.
아벨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상한 놈이 나타나면 말하라더니. 말하기 전까지는 손쓰지 않을 셈이야? 오리온 딜런이 그를 어디까지 끌고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상황이 이쯤 되면 그가 절실했다.
“좀 더 크면, 어때. 황가의 일원이 되는 것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듣는 것만으로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서늘한 목소리였다. 3황자의 말을 무시하며 치근덕거리던 2황자가 숨을 들이켰다. 나는 너무 열 받아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일이야. 절반은 나와 같은 피가 흐르고, 나머지 절반도 부족하지 않은데. 어디서 이런 천박함이 튀어나왔을까.”
검은 머리와 창백한 피부. 황태자의 것과 닮은 붉은 눈. 형제 중 유일하게 황후의 태생인 황녀, 리네아 아카레온이었다.
황태자가 붉은 금발과 적안을 동시에 타고 나지만 않았어도 여자는 황제가 될 수 없다는 전통을 깨고 황위에 올랐을 거라는 말이 나온다더니. 과연 치켜든 턱은 우아했고, 오만한 눈은 지배자의 것이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에르켈이 토할 것 같은 얼굴로 2황자를 노려보았다. 설마 같이 들어온 걸까? 정신이 팔려 그들이 입장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누, 님….”
“테시온이 열셋이던가?”
“네, 누님.”
“어린애의 장난이라 보기엔 많은 나이고, 취객의 만행이라 보기엔 어린 나이군.”
황녀가 아직 내 허리와 엉덩이 사이에 있는 손을 가만히 응시하자 2황자가 감전이라도 당한 것처럼 퍼드득 손을 뗐다. 이렇게 쫄 거면서 대체 왜 사람 많은 연회에서 지랄을 한 걸까.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다, 포기했다.
“어떠니, 테시온.”
“제가….”
어떤 것으로 봐주기를 원하느냐는 말에 2황자가 목이라도 졸린 듯 짧은 숨을 연거푸 들이켜려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입을 연 2황자가 더듬더듬 단어를 내뱉었다.
“제가. 흥에 겨워 지나치게 술에 손을 댔습니다. 내, 행동을… 그.”
“흠.”
“무례를, 용서… 용서해라.”
나를 마주치지도 않고 황녀의 눈치만 살피는 성의 따위 없는 사과였지만 받아들였다. 받아들이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황자에게 이런 사과라도 받을 수 있는 상황 자체가 특수한 거였다.
“내 성을 부끄럽게 하지 마, 사랑스러운 동생.”
그렇게 하면 너를 죽여 버릴 거라고 하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나긋하고,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절대 상냥한 내용은 아니었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머저리 변태 2황자가 부축을 받으며 홀에서 빠져나갔다.
“처분이 부족했겠지.”
“아닙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황녀에게 그를 벌할 수 있는 권력은, 그래 물론 있겠지만. 연회에는 사람이 많았다. 어린애부터 데뷔를 앞둔 다음 세대 사교계의 주역들, 그들의 보호자까지. 뒷말이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충분히 행동해 주었다.
오히려 좆같은 경험들을 통해 2황자는 일회용으로도 써먹지 못할 쓰레기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를 이용하려는 계획은 빠르게 접어 폐기 처분했다. 만약 오늘 그가 내게 집적거리지 않고 머저리로만 남았다면 이후에 따로 접근했을 텐데, 그 새끼를 말릴 황녀가 나타나지도 않을 상황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화려하게 등장한 황녀는 쿨하게 떠났다. 고만고만한 열 살쯤의 어린애들 사이에 황녀가 끼어있는 것도 우습긴 하다. 자연스럽게 제 또래 위에 군림하러 간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어쩌면 황태자의 진짜 라이벌은 아네트도, 황후도 아니고 황녀일지도.
“진짜….”
루시아가 답지 않게 목소리를 떨었다. 그래. 너도 많이 놀랐겠지. 달래 주려던 손은 입을 틀어막고 휙 몸을 돌린 루시아 때문에 더 다가가지 못했다.
“진짜 멋있어….”
뭐?
그러고 보니 루시아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완전히 사랑에 빠진 소녀의 그것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는 놀라서 그런 게 아니라 벅차서 그런 거였던 모양인지, 어쩔 줄 몰라 떨리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심지어 정상인으로 보이던 3황자도 루시아의 그런 반응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입꼬리를 씰룩거리던 그는 루시아에게 다가가 황녀의 명장면을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2황자가 나타나기 전 웃으며 떠들었던 건 정말 비즈니스였을 뿐이라는 듯 진심 어린 미소가 만면하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다. 자기 누나밖에 모르는 윌리엄 유스티아의 모습이 겹친다. 혹시 요즘 제국에 시스터 콤플렉스가 유행인가?
혼돈 속에서 에르켈, 엘리엇과 시선을 나눴다.
‘때려치우고 싶다.’
‘그러게.’
*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연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에르켈은 썩 쓸 만한 존재감을 입증하며 로웨나의 치맛자락에 쌓인 별 볼 일 없는 황자에서 아네트의 신임과 사랑을 꽤나 받는 영리한 애로 이미지 변신을 성공했고, 3황자와는 다음을 기약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4황자 궁에 찾아가겠노라 얘기하는 그에게 에르켈이 응답했다. 형이 동생을 찾아가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지. 때마침 동생의 놀이 친구들이 함께 있던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고.
수에닐에서 입김을 실어 준 게 안타까울 정도로 황녀는 금세 떠났고, 황태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연회에서 보자더니. 그거야말로 빈말이었던 모양이다.
나를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해 꽤 성대하게 끝났으니 아네트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황녀와 황태자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테니 이해는 갔다. 아네트가 황제의 신임을 받는 한 모임은 계속될 테고, 다음 주인공은 5황자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 이후에는 흐지부지 사라질 수도 있고, 아네트의 손아귀에 통째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 이후 크고 작은 모임이 몇 번 있었고, 여름이 지났다.
아벨은 황실 마법부에 들어갔고, 케일은 승진했다. 백작은 복귀하라는 명령에 내 핑계, 건강 핑계를 대며 피하다 결국 비공식적으로 황실 행정부 고문이라는 명예직을 받았다. 모두가 황궁에 묶이게 되자 케일은 조심스럽게 타운 하우스로 주 생활 공간을 옮기는 것을 제의했고, 나는 정든 에드윌 성을 두고 수도의 저택으로 짐을 옮겼다. 레오폴드는 여전히 그 얼굴과 몸매를 가지고도 여자에게 관심도 없었는데, 그 점이 승부욕을 자극했는지 이따금 다른 형제들을 통해 선물을 전하려는 영애들도 있었다.
그중 일부가 마법부에 있었던 탓에 아벨은 일주일에 두 번 꼴로 ‘레오폴드 님께.’가 쓰인 향기 나는 편지와 선물들을 짊어지고 퇴근했다. 저러다 한 번 터지겠는데 싶더니 결국 차남을 향해 상자를 던졌고, 차남은 회중시계에 뒤통수를 맞았다. 슬프게도 차남은 아벨이 성질 부리는 걸 가만히 넘겨줄 성미가 아니었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진짜 형제 같은 모습으로 싸우는 걸 구경할 수 있었다.
씨씨와는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로 바빠져 주기가 길어지자 이제는 그냥 여러 번에 걸쳐 쓴 편지를 한 번에 보내는 게 편했다. 그녀는 이름을 물어보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지만 다른 것에는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의아했지만 그 애를 의심했던 전적이 있는데다, 이전보다 확연히 다정해진 말투에 더 이상 캐묻기는 미안해 포기했다. 씨씨의 신분이 어떻든 그 애는 이미 나에게 말이 통하는 편한 친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