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17)

#36

“전하?”

에이든이 말하는 전하라면 에르켈이겠지. 나는 에이든이 건넨 상자를 받았다.

“그, 못 믿거나. 그런 건 아닌데, 응, 너한테만 뭔가, 전해 달, 그, 그러면 엘리엇이 슬퍼할까 봐.”

어쩐지 계속 엘리엇의 눈치를 보더니. 그런 깜찍한 생각을. 엘리엇이 선물을 못 받았다고 슬퍼한다니. 차라리 그가 사랑에 빠져서 가문을 버린다고 하는 게 진짜 같겠다. 나는 조용하게 잠든 엘리엇을 보며 말했다.

“고마워. 전하께서 하신 말씀은 없고?”

“아니. 그냥 너에게 저, 전해 주면 된다는 말씀만 하셨어.”

나는 잘 밀봉된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물었다.

“네가 볼 때 특별한 것도 없었고?”

에이든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너한테 가져다주라고, 하셨으니까. 받은 그대로 가져오기만 해서… 그건 모르겠어. 미, 미안해.”

보지 말라고 사정을 해도 사람이라면 호기심이 들기 마련이다. 나는 도리어 사과를 하는 에이든의 어깨를 두드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에르켈이 내게 가져다주라고 했다는 이유로 받은 그대로 운반만 했다니. 에이든이 충성심 강한 기사도 아니고, 그래 봤자 아직 꼬맹이인데. 에르켈이 굳이 그를 통해 물건을 전달한 이유가 이건가.

나는 일단 상자를 잘 챙겼다. 이게 특별하지 않은 물건이라면 바로 소포를 보내는 게 훨씬 빠를 것이다. 굳이 이런 방법을 썼다면, 천천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

그리고 마침내. 헬레나가 두 손을 모아 기다리던 불꽃놀이를 시작으로 일주일간 이어지는 축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미친.”

내가 입을 연 줄 알았다. 마침 나도 ‘이런 미친.’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엘리엇이 먼저 꺼냈다.

“역시 지정석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몇몇 가문에는 지정석이 제공된다. 보통 황실 연회에 초대될 정도의, 소위 ‘급’이 되는 곳이다. 가져다주는 음료와 간식을 즐기며 앉아서 편안하게 불꽃놀이를 즐길 수 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VIP석인 만큼 쾌적함은 굳이 언급하기에 입이 아프다.

하지만 헬레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대로를 가로지르는 공연단과 운하 위의 배들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게 이유다. 그야, 지정석에 가만히 앉아서 보는 것보다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게 생생하고 재미있다는 건 나도 안다. 나도 마법을 써서 거대하게 부풀린 새 모양 등불을 보며 흔들렸으니까.

문제는 많은, 아주… 존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다. 아직 노을이 지기도 전인데 벌써 거리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제대로 어두워지면 이보다 배는 많아질 거다.

“저걸 뚫고 가자고?”

엘리엇이 질색했다. 어찌나 이를 악물었는지 말이 뚝뚝 끊겼다. 나도 옆에서 보태며 열심히 헬레나를 설득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좋은 자리를 두고 굳이 저기서 부대낄 필요는 없다.

“우리끼리는 위험해.”

제일 의견 피력을 못 하던 에이든마저 나섰다. 제일 현실적이고 중요한 말이었다. 성인도 아니고 그 반이나 올까 싶은 어린애들끼리 축제를 구경한다니. 스왈튼 후작도 보통이 아닌데, 그걸 보고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엘리엇과 나의 반대에 입술이 불퉁 나오던 헬레나는 오히려 그 말에 반색하며 손뼉을 쳤다.

“그건 걱정 마! 아빠가 댄을 보내 줬어.”

댄, 다니엘 셀츠는 갈색 머리를 가진 인상 좋은 기사였다. 그러고 보니 헬레나네가 후작가였지. 후작 이상의 가문은 수도에 사병을 두는 게 허락된다. 그의 이름을 곱씹던 나는 뭔가 굉장히 익숙한 성이라는 걸 떠올렸다.

“셀츠면 혹시, 제임스 셀츠 경….”

“맞습니다. 짐이 제 사촌이죠.”

말을 듣고 보니 웃는 얼굴도 굉장히 닮았다. 붙임성 좋은 성격까지 닮았는지 금세 애들과 말을 튼 다니엘은 우리를 안내했다.

사람은 많았다. 멀리서 볼 때도 많았는데, 가까이에서 보자 정말 기가 질릴 정도였다. 벌써 아득하게 느껴지는 시절에 가본 놀이공원보다 많았고, 주말 대학가보다 빽빽했다. 정확히 우리 주변만 빼고 그랬다. 다니엘은 친절하게 웃으며 축제를 설명했고, 스왈튼가 기사들은 우리 주변을 둥글게 감쌌다. 그들에게 가려 등이 보이지 않으면 안 되니까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 유지한 채다. 그리고 그 원형 안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다. 레오조차 만족할 만큼 완벽한 가드다.

스왈튼의 위상만으로도 그럴진대 일부러 번쩍거리는 갑옷까지 입었으니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솔직히 존나 쪽팔렸다. 편하긴 한데 이 정도면 광역 민폐 아닌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지 애들은 노을과 함께 타오르기 시작한 등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내던 엘리엇조차 화려한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헬레나는 엘리엇을 흘금거렸다. 엘리엇은 그쪽으로 관심도 주지 않았다. 여지를 주지 않는 게 어설픈 희망을 주는 것보다 낫다며, 괜히 끼어들지 말라는 말을 들은 후라 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걸을수록 더 화려해졌다. 가게마다 꺼내둔 장식과, 건물 위로 올라온 대형 등은 모양이 저마다 달랐다. 자주 돌아다닌 거리인데도 낯선 도시에 온 것처럼 모든 곳이 새로웠다.

붉게 물든 하늘이 검푸르게 어두워지며 운하 쪽으로 사람이 모였다. 다니엘은 운하에도 볼 게 많을 거라고 방향을 틀었다. 확실히. 사람이 타지 않은 작은 배들이 지나며 거대한 등을 홀로그램처럼 띄우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검을 든 용사, 마법을 쓰기 위해 내민 손에서 피어오르는 불꽃. 말단 마법사들을 갈아 넣어 만든 만큼 화려했다. 우리는 천천히 운하 옆을 지나갔다. 건너편 사람들과 반대로 움직이는 행렬은 느릿했다.

발끝에 튀어나온 타일이 걸리는 줄도 몰랐던 것도 그 때문이다. 옆을 치고 지나가는 사람 덕에 넘어지지 않으며 재빠르게 중심을 잡았다.

…옆을 치고 지나가?

아까보다 영역이 좁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스왈튼가 기사들이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 웬만한 사람은 그걸 피해 갈 테고, 굳이 들어오는 사람은 제지된다. 그런데 방금은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많은 사람들 중 얼굴도 확인하지 못한 사람을 찾아낼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단번에 상대를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입 부분만 드러난 가면. 주변인이 그를 피해 가는 이질감. 헬레나와 루이스의 손을 잡고 외출했던 날 마주쳤던 그 사람이었다.

남자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찝찝함에 걸음이 느려졌다. 몇 년 만에, 하필 축제에서 마주친 게 과연 우연일까? 저번에도 가면을 쓴 남자는 나를 똑바로 보고 갔다. 이번에는 자신을 확인하라는 듯 기다렸고.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어도, 두 번부터는 우연이 아니지 않나? 나는 마탑에서 듣고 적당히 묻어 둔 정보들의 먼지를 털어야 할 때라고 직감했다.

일단, 오늘을 잘 보낸 후에. 무슨 일이 있냐고 걱정하는 에이든에게 고개를 저으며 다시 행렬에 섞여 걸었다.

앞쪽에서 헬레나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다니엘은 앉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슬슬 그럴 타이밍이긴 했다. 나와 에이든이야 운동을 하는 애들이라지만, 엘리엇과 헬레나는 구두를 신은 채 오래 걸었다.

보호자가 자리를 비우고, 애들은 지친 사이. 지금까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아 모두가 마음을 놓은 타이밍에 일이 일어났다.

빽빽해진 사람들 틈으로 헬레나가 소리 지를 새도 없이 말려들어 갔다. 놀라서 커진 눈과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달려가 그 손을 잡았다. 끌어오려는 시도였지만 혼자 감당하기에는 끌려가는 힘이 너무 셌다. 엘리엇의 목소리가 헬레나와 내 이름을 외쳤지만 그마저 곧 아득해졌다.

팔을 놓치지 않으려 꽉 잡았다. 얼굴이 치이고, 몸이 눌리며 우리가 얼마나 평온하게 걸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주인 모를 엉덩이와 팔꿈치에 머리를 열일곱 번 정도 부딪힌 후에야 간신히 헬레나의 팔뚝을 잡을 수 있었다. 명색이 제국 최고 기사의 제자인데. 이 정도는 해내야 한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하자 간신히 옆으로 방향을 틀 수 있었다.

행렬의 왼쪽 끝에 도달했을 무렵 튕기듯 빠져나왔다. 바닥을 나뒹굴며 먼지가 날렸다. 토하듯 기침이 연신 나왔다. 되는대로 콜록이며 헬레나의 원피스 자락을 붙잡았다.

“괜, 쿨럭. 으, 괜찮아?”

헬레나가 울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로 땋아 장식한 머리가 엉망이 되어 있었고, 원피스도 이리저리 구겨져 처음의 풍성함을 찾기 힘들었다. 먼지가 묻어 새까매진 레이스를 보면 그녀의 하녀가 비명을 지를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놀란 애를 달래며 스왈튼가 기사들을 찾았다. 가까이 있을 때는 워낙 큰 키에 번쩍이는 부분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띄겠네, 생각했는데 막상 정말 멀어지자 찾을 수 없었다.

섣부르게 행렬에 끼어드는 것보다는 알아볼 수 있는 건물을 찾아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문제는 그야말로 제국 최대 행사답게, 가게들이 대부분 문을 걸어 잠갔다는 거다. 한국이었으면 이때가 대목이라고 다들 문을 열었을 텐데. 제국에서는 상인들조차 돈보다는 몇 년 만에 돌아온 성대한 축제를 즐기기 위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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