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그제야 내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조용해진다. 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어도 큰 금액 앞에서는 유혹을 받는다. 몇몇이 주변의 눈치를 본다. 된다. 이거 먹힌다. 최대한 재수 없는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 2황자를 흉내 내려 했지만 그놈은 좀, 너무… 질 낮은 구석이 있다.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형제가 이 분야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
황태자를 떠올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한 번도 고개 숙인 적 없는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가슴을 편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조용히 말했다.
“2천이면 거절하기 힘들까?”
아직 어린 얼굴들이 굳는다. 조금 물러나는 발도 있었다. 숨이 거칠어지던 재킷이 족제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벤, 어떻게 된 거예요? 지방에서 올라온 촌놈이라면서요!”
수도와 영지만 오가며 살다 순식간에 촌놈이 된 내가 벤이라고 불린 족제비를 바라보자 그가 얄궂게 웃었다. 팔짱을 풀고 앞으로 나서자 나를 둘러싼 녀석들이 홍해 가르듯 갈라졌다.
역시. 이 조합의 상하관계는 확실했다. 저 남자는 무리의 대장 따위가 아니다.
“2천으로 만족할 수는 없죠. 얼마를 부르든 주실 거 아닙니까.”
“얼마나 원하는데?”
“1억 정도는 돼야 가문의 이름값을 하지 않겠습니까.”
미친. 황태자 흉내를 내던 것도 잊고 당황에 말을 잃었다. 설마하니 이 상황에서 은화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금화로 1억을 말하는 걸 텐데. 그 돈이면 저택도 살 수 있다.
나는 조급하게 일어나는 불안감을 누르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확실하다. 헬레나를 그냥 보내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저 새끼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고, 일부러 나만 남긴 거다.
에드윌가에 척을 질 만한 상대가 누구지? 시발, 너무 많아서 문제다. 나는 백작이 좋은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깨끗하며 도덕적인 생활을 했을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높은 곳에서 많은 걸 볼수록 깨끗한 길만 걸어가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는 백작을 원수로 여길 수도 있다.
꼭 복수가 아니어도, 이 세계에서는 정쟁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다. 흔치는 않지만 적지도 않다. 그러면 범위가 더 넓어진다. 수에닐 공작도 백작과 매번 의견이 갈렸고, 아네트도 의리를 챙기는 타입은 아니다. 어쩌면 황태자, 아니면 그 외 다른.
남자가 그런 나를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저 새끼는 내가, 여기서 나가면 족친다. 이를 악무는데 남자가 허리에 찬 검을 빼 바닥에 굴렸다.
“정정당당을 찾으시길래. 이거라도 쥐시면 덜 억울하실 것 같아서요.”
고르지 못한 바닥을 굴러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춘 검을 주워 들었다. 무게를 덜어낸 가검도 아니고, 사용자의 편의를 위한 아티팩트도 없다. 처음으로 드는 진검의 무게는 손을 떨리게 만들었다. 검집을 빼는 것도 잊고 자세를 잡았다가, 뭉툭한 끝을 보고 급하게 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매끈한 소리와 함께 빠져나온 검날이 달빛을 비췄다.
주변 녀석들의 표정도 한층 무거워진다.
“벤, 제대로 설명해 줘요.”
재킷이 이를 악문다. 턱을 긁던 남자가 천천히 표정을 지운다. 재수 없게 매달려 있던 웃음이 지워지자 날카로운 눈이 한층 돋보였다.
남자는 얼굴과 달리 다정한 목소리로 재킷을 달랬다.
“그렇게 날을 세우다니.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벤.”
“받은 게 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요셉. 내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니?”
무리의 대장인 듯 보이는 재킷과, 주변 녀석들의 어깨가 굳었다. 키프라고 불린 꼬맹이도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고조되는 분위기 속에 어떤 녀석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봉을 쥐었다. 녀석들은 하나같이 허리에 봉을 둘러차고 있었는데, 성인 남성 팔뚝 정도 되는 것은 검보다 짧아 보이는 대신, 단단하고 탄력 있어 보였다.
“맞는 말이잖아. 무서우면 빠져 있어, 요셉.”
내가 봐도 동료를 위해 자기가 나서겠다는 뻔히 보이는 의도를, 진짜 동료인 재킷이 알아듣지 못할 리 없다. 그는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봉을 꺼내 들었다.
남자가 누군가 오기 전에 끝내는 게 좋을 거라고 친절한 충고를 던지고 뒤로 빠지자마자 여럿이 달려들었다. 반쯤 쳐내고, 반은 팔로 대신 막는 개싸움이었다. 열심히 익힌 자세는 제대로 취하기도 어려웠다. 왼쪽을 막으면 오른쪽에서 몽둥이가 날아오고, 몽둥이를 밀어내면 아래쪽에서 발이 날아왔다.
분투하며 검으로 몇 놈의 다리와 팔을 긁는 데 성공했지만, 치명상이 아닌 이상 화만 돋울 뿐이었다. 어설픈 마음으로는 검을 들지도 말라는 스펠먼의 가르침이 실감 났다. 죽일 각오로 휘두르지 않는 이상, 진검은 검집보다 못했다.
하지만. 허벅지를 찌르고, 검집으로 옆에 있던 녀석의 얼굴을 가격해 시간을 번 나는 입술을 악물며 놈들을 노려보았다. 아직 어린 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얼굴들. 전부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겁에 질려 있었다.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검을 휘둘러 벨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간 평화롭게 살아온 내게 살인 같은 일이 가벼울 리 없다. 분명 버텨낼 수 없을 것이다. 내 실력이 월등해 부상으로 끝낼 수 있다면 모를까. 내 실력이 저들 개개인보다 낫다고 해도 숫자가 월등히 차이 나는 상황에서 그 간격은 매우 좁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얌전히 맞아 줄 수도 없으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며 헬레나와 다니엘이 도착할 때까지 버텨내는 것뿐이다.
“악!”
종아리 아래쪽을 제대로 맞자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다. 넘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린치가 들어왔다. 몇 번인가 손에 든 검집으로 다리를 쳐내도 전부 걷어낼 수는 없었다.
“친애하는 가족들에게, 남길 말이라도 있으신지.”
나는 침을 퉤, 뱉었다. 피와 섞여 붉은 것이 남자의 구두에 묻었다.
“염병하네.”
족제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잠깐 멈췄던 발길질이 다시 이어졌다.
“대장, 요셉. 정말 죽여요?”
꼬맹이가 재킷을 붙잡고 묻는다. 재킷은 족제비의 눈치를 봤다. 족제비는 대답하지 않은 채 샐쭉 웃었다. 죽이고, 증거를 거하게 남길 생각인 거다. 공터에서 얻어맞아 죽은 르웰린 에드윌을 보고, 누군가 충격 받기를 바라면서.
이러다 진짜 뒤지겠다 싶은데 눈앞이 어두워졌다. 동시에 몸을 걷어차던 고통이 사라졌다. 설마 이런 게 사후 세계인가. 하지만 비명 소리가 너무 생생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손을 내젓자 두껍고 부드러운 천이 닿았다.
“가만히.”
목소리는 차갑고 거칠게 날 서 있었다. 짧게 내뱉은 말로도 상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 너머로 들리는 비명 소리에 나는 버둥거림을 멈췄다. 상대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비명 소리가 멎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직 천에 쌓여 밖을 보지 못했지만, 무슨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천을 걷었다. 말없이 옆에 있던 남자는, 이번에는 내가 벗어나려는 걸 말리지 않았다. 두껍고 어두운 천은 크기도 커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꿈틀거려야 했다. 마침내 얼굴을 빼내자 차가운 밤공기가 상처 나서 열이 올라오는 얼굴을 식혔다.
하지만 그런 것에 정신을 팔릴 틈도 없었다. 나는 눈앞의 광경에 아연해졌다. 조금 전까지 내게 폭력을 휘두르던 놈들 중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바닥에 널부러진 시체에서 피가 흘러 바닥을 적셨다. 그 가운데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무리 중에도 유난히 튀어 보일 만큼 키가 컸고, 검은 옷 아래 비치는 몸은 단단했다.
나는 그의 얼굴이 익숙하다는 걸 알아보았다. 제국 황실을 수호하는 네 개 기사단, 그 중 카힐름의 단장인 키시아르 테사였다. 그가 손에 든 검에서 피가 흘러 바닥에 길게 이어졌다.
나는 혼자 열이 넘는 사람을 벤 채 우두커니 서 있는 키시아르 테사도 두려웠지만, 내 옆에 무릎을 대고 몸을 숙인 남자가 더 무서웠다.
세 번째 보는 가면은 여전히 낯설었다. 예전에 아벨과 함께 마탑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푸르데크의 그림자. 혹은 프루펜더스의 가면. 프레이가 조잘거리며 알려 주었던 정보들이 새록새록 떠오르자 조금 전의 일처럼 생생해졌다.
‘존재하되 실체가 없고, 만나되 느끼지 못한다.’
과연 짐작한 대로였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도 가려진 것처럼 상대에 대한 정보값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존재감은 도려낸 것처럼 사라지고, 얼굴은 안개 낀 것처럼 흐려진다. 남자는 가면 아래 드러난 입술을 휘며 웃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미소였지만, 조금 전 단단히 심기가 거슬린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인지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여럿의 피가 검을 타고 흘렀다. 검은 옷을 입은 키시아르 테사가 그 검을 바닥에 끌며 다가왔다. 가면을 쓴 남자가 손짓하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남자가 조용히 가면을 벗었다. 그제야 입술이 휘는 모습이 익숙하다는 걸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후드를 쓰고 있었다는 것도, 그것을 벗으면 드러나는 금발이 신화 속의 것과 같다는 것도.
“…전하.”
“험한 꼴을 보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대는 그리 무심해.”
나는 뒤집어쓴 천이 황태자의 망토이며, 그가 망토를 둘러준 이유가 내 시야를 가리기 위함이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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