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아끼던 막내가 고열을 앓는 걸 보며 백작과 형제들의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라는 건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좀 지나치지 않나? 매일 생각했지만 역시 지나친 것 같다.
나는 멍한 머리로 스프인지 물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것을 받아먹다 음식을 물렸다. 소화하기 쉬운 음식이랍시고 미음 같은 걸 가져오는 것도 지겨웠고, 그나마 고기가 들어 있는 맑은 국물 같은 것도 성에 차지 않는다. 이제 슬슬 두꺼운 고기와 씹을 수 있는 야채가 먹고 싶었다. 무엇보다 매일같이 뛰고, 구르던 몸이 하루 50보도 걷지 않는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뻐근해 죽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스펠먼과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백작과 케일은 이참에 나를 황성에 보내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찬성이었다.
이유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황태자 때문이다. 황성에 가면 그놈을 만날 가능성이 높은데, 목을 그은 걸로 모자라 조른 놈을 보고도 평온한 척 굴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에르켈이 아카데미를 갈 때 황자의 놀이 친구 역할은 끝났다. 아네트의 눈치를 볼 것도 없었다.
방이 비자마자 침대를 뒹굴거렸다. 그나마 철통같이 세운 경계를 넘고 나를 찾아온 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찾아온 헬레나와 엘리엇 정도였는데, 헬레나는 아카데미 수업이 한창 진행되는데도 내가 완전히 회복되는 걸 보겠다고 떼를 쓰다 열차를 탔고, 엘리엇은 이틀 전에 왔다 갔으니 하루 이틀 후에나 올 것이다. 그나마 낙은 씨씨와 주고받는 편지 정도인가. 하지만 이마저도 주기가 짧지 않았으니, 내가 일방적으로 쓴 편지만 한가득이었다. 씨씨는 오랜만에 보내는 편지의 양에 놀랐는지 무슨 일이 있냐고 묻기까지 했다.
심심함에 몸부림치다 책상에 시선이 닿자 무언가 퍼뜩 떠올랐다.
첫 번째 서랍을 열자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에르켈의 인장이 찍혀 봉인된 상자. 에르켈이 에이든을 통해 전해 준 것이다. 나는 모처럼 허리를 세우고 의자에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그것을 열었다.
상자 안에 든 건 평소 에르켈이 보내던 것처럼 간단한 안부를 묻는 편지와 펜, 책이었다. 책은 밋밋하고 부드러운 검은 가죽으로 덮여 있었는데, 제목이 쓰여 있어야 할 부분이 비어 있었다. 펼쳐 훑어보자 내용이 없었다. 책이 아니라 노트였던 모양이다.
[네가 이 일기장을 써 줬으면 좋겠어. 내 것과 세트야.]
일기장?
펜이 메인인 줄 알았는데, 노트가 메인이었나.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펜과 달리 일기장은 검은 가죽으로 된 무지 노트일 뿐이었다. 심지어 내지 테두리 색이 좀 바래서 누런 게, 중고품이거나 가게에서 오래 묵은 것 같다는 인상까지 주었다. 빈티지가 유행인가. 그렇다고 해도 황자가 굳이 선물을 할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선물한 사람은 그냥 황자가 아니라 에르켈이었다. 심지어 그는 이 노트의 용도를 정확히 일기장이라고 지정해 주며 내가 사용하기를 바랐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일단 노트 첫 장을 펼쳐 보았다. 그곳에는 노트에 꼭 맞는 크기의 엽서가 끼워져 있었다.
[에르켈 노윌 아카레온]과 [ ]에게.
한껏 멋 부린 서명이었다. 이거 뭐, 저주 같은 건 아니지? 에르켈이 준 것만 아니어도 아벨에게 확인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찝찝함을 뒤로 하고 빈칸에 내 이름을 썼다. 펜을 떼자 이름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작은 불꽃이 일었다. 손목이 화끈거려 확인하자 엽서와 똑같이 타오르다 천천히 잦아들었다. 이펙트에 불과했는지 그을림이 남지는 않았지만 동전보다 작은 크기로 연한 무늬가 남았다.
대체 이런 걸 왜 보냈는지 모르겠다. 나는 다시 뒷장들을 훑었지만 여전히 종이에는 잉크의 흔적도 없었다. 편지에 자세한 설명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뭔가를 적기엔 아무래도 에이든에게 덜컥 그렇게 큰일을 맡긴다는 게 불안하겠지.
나도 착잡한데 얘는 오죽할까. 아카데미는 황성에 비해 사고에 노출될 확률도 높다. 당장 그의 방에 화재가 나거나, 식사에 독이 섞이거나, 연습 중 사고를 당해도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렵다는 거다. 거기서 마음 놓고 이야기할 친구라도 만났으면 좋겠는데.
괜히 찡해지며 에르켈이 원하는 건 웬만하면 해 줘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새겼다. 그래. 일기 쓰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마침 나는 시간이 넘치다 못해 남아돌아서 꾸역꾸역 잠이나 자고 있는 상황이다.
<날씨 모르겠음. 방 안에 있자니 계절감도 잊어 갈 지경이다. 하녀들은 내가 창문을 열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놀란다. 어릴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즘 하는 걸 보면 조만간 이유식을 가져온다고 해도 놀라지 않겠다. 부디 한 달을 꼬박 채우기 전에 밖에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스펠먼이 아니더라도 다른 선생을 찾으면 좋고.>
또 뭘 써야 하지. 일기를 주기적으로 써본 적 없어서 모르겠다. 내 일기의 마지막은 초등학교 방학 숙제였던 것 같은데. 아니, 대학에 가면서 새 삶을 시작해 보겠다고 잠깐 깔짝여 본 것 같기도 하고.
펜 끝으로 입술을 눌렀다. 엘리엇을 만나면 어떤 얘기를 하는 게 좋을지도 적어 두는 게 좋을까. 아니면 첫 일기니까 앞으로의 다짐을 더하는 것도 좋겠다. 고민을 마치고 일기를 이어 쓰려던 나는 당황했다. 지금까지 쓴 내용이 사라져 있었다.
“어? 뭐야.”
당황해서 종이를 넘겨 봤지만 여전히 노트는 깨끗했다. 잉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더듬고 있는데, 누군가 글자를 쓰는 것처럼 잉크가 이어졌다.
[안녕. 괜찮다면 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니?]
저주? 귀신? 역시 마법이라고 생각하는 게 제일 합리적이지만 이런 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다. 마법으로 사람과 물건을 이동시킬 수는 있어도 메신저, 통화 기능은 없는 괴상망측한 세계가 제국이었다.
망설임 끝에 종이 위에 뜬 문장 아래로 펜을 놀렸다.
<그래.>
[고마워.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말이야. 나는 이곳에 오래 있었거든. 혹시 동물과 닮은 배를 타고 전쟁에 나가 전사한 장군의 이름을 아니? 전사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이순신. 뭐야, 에르켈? 장난하냐?>
부드럽게 이어지던 필기체가 뚝 끊겼다. 역시나 이번에도 글자들은 잠시 텀을 두고 사라졌다.
[ㅠㅠ]
<너 대체 뭐하는 거야? 그 말투는 또 뭐야?>
[르웰린 맞아? 아니 난… 혹시 다른 사람이 폈을까봐 확인 좀 했지.]
글자가 사라지기 무섭게 ‘말투는 컨셉 ㅎㅎ’이 이어졌다. 바짝 긴장했던 게 허탈했다.
*
[이건 그레도르라는 마법사가 만든 건데. 간단히 설명하면 일대일 메신저 같은 거야.]
말문이 트인 에르켈은 오랜만의 대화에 신났는지 빠르게 펜을 움직였다.
‘일기장’의 원래 이름은 그레도르의 편지.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는 제국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메신저 템이었다. 디자인 센스가 좀 부족하긴 해도, 이 세계의 상식을 뒤엎는 엄청난 물건임은 틀림없다.
<이런 걸 왜 하나만 만들었지? 한정판으로 만들어서 팔기라도 하면 될 텐데.>
분명 초대박. 돈방석 위에 앉는 건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부와 명예를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걸 발명해 놓고 대량 생산을 하지 않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거 한 쌍 만들고 얼마 안 돼서 죽었다나 봐. 제자가 유품을 정리하면서 발견하긴 했는데, 사용법을 몰라서 그냥 버렸고.]
표지에나 신경을 좀 쓸 것이지. 그레도르는 이 노트에 방수, 화염 저항을 비롯해 온갖 마법을 걸어 놨다. 낡은 건 원래 그레도르의 취향에 더해, 세월을 이기지 못했을 뿐. 원래라면 칼로 찢어도 찢기지 않고, 진흙을 굴러도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설명을 듣고 있자니 더 안타까워졌다. 세기의 천재가 너무 빨리 갔다. 그레도르의 죽음이 20년만 늦었다면 지금쯤 제국인들은 한 손에 들어오는 마법 버전 핸드폰을 들고 있을지도 모르지.
화상 통화가 가능하긴 하지만 주고받는 쪽이 모두 마법사여야 하고, 조건도 까다로워 아직 상용화가 되지는 못하고 군용으로나 이용되는 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몸은 괜찮아? 안 그래도 헬레나가 난리던데. 소식 듣고 놀랐어.]
나는 잠깐 펜을 굴리다, 늦지 않게 답했다. 아무리 헬레나라고 해도 황자에게 미주알고주알 축제 얘기를 하지는 못했겠지.
<괜찮아.>
<얼마나 포션이랑 축복을 부었는데. 죽어 가는 사람도 살렸을 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ㅇㅋㅇㅋ]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있어.>
나는 당시 일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어디 가서 맞고 왔다는 게 자랑은 아니지만, 상대가 평범한 양아치로 보이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확실히 좀 이상하네.]
[가벼운 이벤트가 아닌 것 같은데….]
[가족들한테는 물어봤어?]
<아니. 일단 아직.>
안 그래도 난리가 나서 집이 온통 뒤집혔다. 지금도 극성인데, 만약 가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납치 후 살해하려고 한 걸 수도 있다는 얘기를 꺼냈다간 성인이 될 때까지 성에서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망설이다 에르켈에게 황태자에 대한 일도 덧붙이기로 했다. 옛날에 그가 내 목을 그어 둔 걸로도 한참 미안해했는데, 실수도 아니고 작정하고 죽이려고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에르켈은 당사자보다 더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할 것 같아 고민했지만, 역시 원작의 주연이 낀 일인 만큼 묻고 넘어갈 사안은 아닌 듯했다.
<사실 황태자도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