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17)

#41

[우리 펠은 또 왜.]

[ㅠㅠ]

[비록 인성은 쓰레기라 빨아 줄 게 얼굴밖에 없는 놈이지만 한 번만 봐주자.]

<내가 그 새끼 얼굴 빨아서 어디에 써?>

<그 염병할 새끼….>

[왜? 막 잔소리해? 은근슬쩍 꼽 줘?]

그랬으면 이렇게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나는 종이가 잉크를 머금도록 펜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느리게 펜을 움직였다.

<사실 그날 황태자도 만났는데.>

에르켈은 얌전히 듣고 있다가 황태자가 내 목을 졸랐다는 말에는 한탄했다.

[ㅎㅎ]

[쓰레기네….]

[내가 너를 그렇게 키웠니?]

에르켈이 황태자를 키운 적은 없지만, 김민지가 그를 만들고, 성장시킨 건 사실이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에르켈은 또 한참 괜찮은 거냐는 질문을 쏟았다. 나는 괜찮다는 답을 해 주며 넘어갔다.

[흠….]

[짐작 가는 건 딱히 없는데… 펠이 메인이었다고 해 봤자 초반에 분량이 터지진 않아서. 그냥 가끔 나와서 자기 지위 이용해서 르웰린한테 도움 주고 사라지는 정도? 쿨하고 냉정한데 다정한 그거?]

[아직은 크게 사건 일어날 만한 게 없거든.]

<전에도 봤던 게 걸리는데.>

<그 가면이 원작에는 안 나오는 거야?>

[그게 사실….]

[내가… 비슷한 소재 돌려막기 한 거 있어서.]

[다른 소설에도 이런 아이템이 나왔었거든. 그렇다고 아이템 이름을 다 외운 건 아니라.]

[그건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거 같아 ㅎ]

시발. 큰 소득이 없었다. 에르켈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맥이 탁 풀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늘어졌다.

<그런데 일기장 이런 건 어떻게 안 거야? 원작에 나오나?>

대신 말을 돌리자 에르켈이 긍정했다.

[응. 나 원래 아카데미물 안 써서 이건 기억했지!]

[원래는 세드릭이랑 르웰린이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한 권씩 찾거든. 르웰린은 과제하려고 챙긴 책 사이에 우연히 끼어 있었고, 세드릭은 뭔가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걸 감지했고. 둘이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면서 연락하는데. 세드릭 걔가 편지로만 보면 존나 정상적인 것 같아서 르웰린이 거기 넘어간 거지.]

<인생 진짜 왜 저따위냐.>

한탄스러운 르웰린 에드윌의 삶을 안타까워했지만 에르켈은 내 말을 무시했다.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이게 도서관에 있다는 건 아는데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서 뒤지느라 오래 걸렸어. 네가 안 왔으니까 원작보다 빠르게 세드릭 손에 들어갈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찾을 수도 있잖아. 아무튼 한 달이면 될 줄 알았는데 도서관 진짜 존나 넓더라. 미친 줄. 평생 거기서 책만 읽어도 다 못 읽겠던데. 게다가 애들은 또 왜 그렇게 나를 찾아. 도서관 간다고 하면 대여섯은 따라와서 시바.]

<알았으니까…. 진정 좀 해.>

[ㅠㅠㅠㅠㅠㅠㅠ]

열 달이 10년 같았다며 아카데미 생활의 고초를 토로하던 에르켈은 한참 더 투덜거린 후에야 진정했다. 편지에서는 잘 지내고 있다더니. 역시 그냥 남들에게 보여도 괜찮을 법한 내용만 담았나 보다.

<그럼 네가 찾아야 한다고 했던 게 이 일기장이야?>

[아니. 이건 덤ㅎㅎ]

[그건 찾으면 말해 줄게.]

<뭐… 그래라.>

그렇다고 하면 더 캐물을 생각은 없다. 대신 아까부터 궁금하던 게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일기장이야? 서명? 그건 뭐고?>

[엥… 너 설마 이거 몰라?]

에르켈은 내 반응에 기겁하며 단어를 던졌다. 대부분 무슨 뜻인지 유추조차 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책이면 몰라도 영화는 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름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ㅠㅠ]

가물가물해서 이제 잘 떠오르지도 않지만, 어린애가 마법사가 되어 싸우러 가는 영화가 유행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에르켈의 말을 듣다 보니 떠오른 건지, 착각인지 몰라도 글자를 쓰면 그게 사라지고, 답이 돌아오는 귀신들린 노트가 있었던 것 같다.

<이거 표절 아니냐….>

[안에 영혼은 안 들었잖아.]

[ㅎㅎ] 를 덧붙인 탓에 얘가 어색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상상됐다. 그러면 영화에 나오는 일기장에는 영혼이 들어 있었단 말이야? 그런 걸 어린애한테 퇴치하라고 시키다니. 그쪽도 참 어메이징한 동네다.

[네가 사인한 건 보호 마법 계약서야. 원래는 반지 같은 거에 쓰는 건데 마침 편지가 두 개로 한 쌍이니까. 양쪽에서 친필로 서명하면 마법 발동해서 다른 사람이 손 못 대게 하는 거야. 내가 보낸 건 좀 변형해서 남들이 펴 보면 일반 일기장처럼 보이게 해 놨어. 자세한 내용은 계약서 뒷장 참조.]

<그러다 만약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서명했으면 어쩌려고.>

[그래서 네가 보낸 편지로 필체 대조 마법 걸어놨어. 다른 사람이 쓰면 계약 파기되고 터지게.]

어이가 터진다. 만약에라도 다른 사람이 이걸 손에 넣었는데, 서명했다가 터지는 장면을 생각했다. 그러게 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나 싶긴 한데,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데 그런 마법도 있어? 처음 듣는데.>

[교수한테 부탁했지. 제국에서 뭐 홍채 인식을 할 거야, 지문 인식을 할 거야? 할 수 있는 게 그나마 필체밖에 없어서. 획기적이라고 좋아하시더라. 나한테 허락받고 이걸로 연구한다고 틀어박혀서 지금 5, 6학년은 다른 교수가 대신 강의 들어간대. 교수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인가 봐.]

확실히. 이게 상용화된다면 획기적인 일이다. 터지는 것 말고 더 안전한 방법을 연구해야겠지만.

<완벽한 게 맞아? 그 교수보다 상급의 마법사면?>

[물론 완벽하진 않지. 대단한 보안도 결국 뚫리기 마련인걸. 마탑 소속 마법사인 데다가, 아카데미에서 교수까지 할 정도면 웬만한 마법사보다는 낫겠지만. 내 쪽에는 다른 교수들도 있고, 무엇보다 세드릭도 있으니까. 너도 안심할 수는 없고.]

<염병.>

[그나마 내용 자체는 시간이 지나면 영구적으로 사라져서 다행이지. 그건 원작 세드릭도 못 했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사용법을 알게 되면 위험한데.>

누가 굳이 이런 낡은 노트를 가져다 글을 써 보겠냐마는. 원래 만약, 혹시, 설마가 제일 위험하다. 눈 맞고 배 맞는 스토리가 원활하게 굴러가기 위해서는 이 정도 억지력은 있어야 하니까.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고민했어. 생각해 봤는데, 역시 암호가 있는 게 좋겠어.]

아카데미에서 혼자 훌쩍이는 동안 이걸 고민했다며 에르켈이 몇 가지를 늘어놓았다. 우리는 조율 끝에 ‘일기장 사용 규칙’을 만들었다.

*

숨이 막혔다. 모자란 숨을 들이켜기 위해 입을 벌려도 폐부에 들어오는 게 없다. 무언가 목을 잡고 누른다. 목을 누르는 것을 잡아 뜯으며 발끝에 힘이 들어간다. 바닥을 밀어내며 몸을 뒤틀어도 벗어날 수 없다. 죽는다. 헐떡이며 곧 다가올 죽음을 예감했다.

홉뜬 눈에 비치는 건 사람을 흉내 내듯 서늘한 눈과, 그 뒤로 비치는….

“르웰린!”

누군가 손을 붙잡았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물통에 물감을 뿌린 것처럼 기하학적인 효과를 만들며 시야가 이지러진다.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시간이 좀 걸렸다. 붉은색이 아니다. 르웰린과 닮은 자안을 확인하자 몸에 힘이 풀렸다. 장남이다.

케일이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머리 위로 입술을 내리는 것을 느끼며 목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 시발.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훔친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습하게 달라붙는 옷이 불편해 씻고 싶었지만, 손가락을 까딱할 힘도 없었다.

에르켈에게 괜찮다고 답한 건 대부분 진실이었지만, 전부 진실은 아니었다. 몸은 충분히 회복되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애를 먹었다.

상처는 금방 나았다. 얻어맞았다고 해도 뼈가 부러진 건 아니었고, 멍 정도는 솜씨 좋은 치료사가 금세 뺀다. 문제는 몸이 말끔해졌다고 기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악몽을 꾸고 있었다. 처음에는 포션에 취해 정신도 없이 잤는데, 그 뒤로 간헐적으로 잠에서 깼다. 무언가 목을 조르는 환상에 숨을 헐떡이다 일어나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했다. 이게 이렇게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였나? 물론 죽을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정말 저세상 갈 뻔하긴 했지만. 당시 겁에 질린 것도 맞기는 하지만 뒤질 뻔했는데 그 정도 반응은 당연한 거 아닌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횟수가 한 손에 꼽는 것을 넘어가며 익숙해졌다. 이제 막상 일어난 후에는 별거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환상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 목 위에 아무것도 올라가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후에는 조금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고 누워 다시 멀쩡하게 잠들 수도 있다.

다만 이번에는 타이밍이 안 좋았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사각 함과 나를 끌어안은 채 굳은 케일을 확인하고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저걸 주러 왔던 모양이지.

“형님.”

괜찮다고 하려다 말았다. 나야 괜찮은 걸 알지만, 그는 많이 놀랐을 텐데. 여기서 내가 괜찮다고 해 봤자 어린 동생이 일찍 철든 걸 보고 속상해하는 신파 분위기가 될 것 같았다.

“저 괜, 음.”

그런데도 괜찮다는 말 외에 떠오르는 게 없어서 어물거렸다. 다행히 케일은 그런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 가만히 어깨를 다독였다. 자장가라도 부를 생각인지 몇 번 허밍을 중얼거리긴 했는데, 이어지진 않았다. 케일은 음치다.

자세히 묻지 않아 다행이다. 나는 다시 얌전히 머리를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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