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하지만 역시 심란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내내 우울했다. 나는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열심히 달린다고 달렸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제자리로 돌아와 있는 기분이었다. 사랑을 모를 것 같던 황태자조차 원작 앞에 무너져 해롱거리는 꼴을 보였다. 나는, 최소한, 그가 내게 반하는 일이 있어도 그런 식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차라리 조금 더 자연스럽게, 그럴 만한 계기를 가지고 사랑을 자각했다면 이렇게 심란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돼야 하기 때문에’ 르웰린에게 반했다.
눈을 감으면 에르켈과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작 형제들은 밤마다 와서 내 손을 잡고 가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온기보다 상상 속의 죽은 얼굴이 임팩트가 더 컸다.
에르켈이 세운 가설대로라면, 중요하지 않은 건 쳐내고 주요 스토리의 ‘키워드’만 맞추면 사건이 진행된다. 장점은 있다. 키워드 중 일부를 충족하는 타이밍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우선적으로 피해야 하는 ‘에르켈의 죽음’과 ‘레오의 죽음’이, 원작에서 주요 스토리에 드는지, 아닌지다. 곁가지에 불과한 내용이라면 좀 잘라내도 큰일 나지 않겠지만, 만약 큰 맥락 중 하나라면.
황태자가 뜬금없이 사랑에 빠진 것처럼, 결국 그것도 일어나게 될 테니까.
“좆같네….”
그러면 이 발버둥에는 의미가 없어진다.
어차피 큰 흐름에 따라 르웰린의 주변에는 주연들이 모여들 테고, 고난과 역경 후 ‘해피 엔딩’을 맞게 될 테니까.
*
정확히 일주일을 기다려준 황태자가 다시 초대장을 보냈다. 저번에는 정원 핑계더니, 이번에는 다른 핑계였다. 두 번 정도 핑계를 대며 피하다 세 번째 것부터 응했다. 셀리아제 궁에서 황태자와 티 타임을 가지는 게 정기 일정에 추가됐다.
그 얘기를 들은 엘리엇이 ‘혹시 내가 미래의 황태자비와 작당 모의를 하는 건 아니지?’ 했다. 본인은 농담으로 던졌는데, 원작 스토리를 알고 있는 내게는 너무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런 소리를 다시 한 번 입에 담으면, 네가 친구여도 걷어차 버릴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게 삶인가 싶었는데, 이제 허허 웃으며 쿠키를 씹어먹을 수 있게 됐다. 황태자는 나를 가만히 지켜볼 뿐. 차를 직접 따르거나, 간식을 입에 대 준다거나 하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자 곤두선 신경도 무뎌졌다.
“그때 그 고양이를 기억해?”
“고양이요?”
그가 내 목을 그은 날, 2황자가 괴롭히던 그 고양이를 말한다는 걸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놀랍게도 그 고양이는 황태자 궁에서 살고 있었지. 이름까지 지어 줬다는 말에 놀랐던 게 생각났다. 모모였나. 황태자가 지었다기에는 너무 깜찍한 이름이었다.
“보러 온다더니, 결국 오지 않았지.”
선뜻 가겠다는 답은 못 했다. 이번에 그렇게 말했다간 당장 황태자궁으로 장소를 옮기게 될지도 모른다.
“성격이 제법이라 제법 고생을 했어. 리키온이 당황스러워했지.”
고양이가 있는 줄 모르고 왔다가 복도에서 덮쳐져 소란이 있었다는 얘기다. 아하하, 웃다가 그와 농담 따먹기를 하는 현실이 지나치게 현실성 없어 입꼬리가 또 굳는다.
당황. 그러고 보면 황태자도 작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웠을까.
인간적인 감정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갑자기 에로스의 화살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사랑에 빠졌으니. 심지어 상대가 아직 뺨에 어린 살이 다 빠지지도 않은 어린애라면. 아니, 그 점은 괜찮으려나. 르웰린이 된 내 입장에서 볼 때 황태자는 빌어먹을 페도 새끼지만, 제국에서 네 살 차이는 뭐 대단한 게 아니기도 했다. 실제로 황태자의 약혼 시기가 다가오면서 그 후보로는 내 또래부터 성인을 넘긴 상대까지 거론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르웰린이 황태자를 선택하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했다. 사랑보다 권력을 선택한 그가 후계 자리는 어떻게 했을까. 해피 엔딩을 표방하는 소설이니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났겠지만, 현실에서 행복은 지속적 감정이 아니다. 연애, 혹은 결혼 생활 내내 행복하기만 한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다.
한 번 르웰린을 잃을 뻔했으니 정신 나가서 사랑을 선택하나? 다른 형제에게 후계를 넘긴다거나. 에르켈은 죽었고, 5황자 루카스도 아닐 테니 3황자? 황녀? 일단 2황자는 아닐 게 분명한데. 본편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니 에르켈조차 답을 모르는 질문이겠지. 소설은 ‘두 사람이 사랑을 확인했다.’로 끝난다.
바람에 날리는 붉은 금발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을 잡아끌다 못해 넋을 놓을 만큼 화려한 보석 같았다. 만약 내가 이 세계에 대해 잘 몰랐다면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홀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하다못해 이곳이 정말 꿈과 희망이 넘치는 세계라서, 아무도 죽지 않고 모두가 행복한 스토리였다면 이렇게 착잡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내 얼굴에, 뭐가 묻었을까?”
심각하게 얼굴을 쓸며 갸웃하는 그가 정말 열여섯으로 보였다. 처음 만난 열넷부터 성인 같아서 빈말이라도 애라고 표현하기 무리가 있던 놈이. 그러고 보면 저런 게 다 연기라고 했는데. 남들 앞에서는 여전히 냉랭한 황태자일 그가 내 앞에서 일부러 어리숙한 척을 하는 게 웃겼다. 사실 정말 웃음이 나오지는 않고, 그냥 웃긴다고 표현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잘생김 묻었네요.”
한탄스러워서 대충 대답해 주자 황태자가 그림처럼 웃었다.
사륵 휘어지는 눈이 정말, 순간이지만 상황을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름답기는 했지만 얼어붙어 사람 같지 않던 눈이 감정을 담자 정말 사람 홀리게 생겼다. 그러나 그의 눈이 녹은 대신 내 마음이 얼어붙은 모양이다. 저걸 보면서도 감탄 대신 지금 웃음이 나와? 싶었다. 지금, 시발, 웃음이 나와? 나는 이렇게 심란한데?
“내가 잘생겼나?”
“취향이 아주 독특하지 않은 이상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고.”
“제 취향이 아주 보편적입니다, 전하.”
황태자가 유쾌하게 웃었다. 이전의 것들과는 결이 다른, 열여섯에 걸맞은 웃음이었다.
“전하.”
문을 열고 들어온 얼굴에 놀라서 어색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멈췄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레오가 다가와 황태자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평소라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개의치 않고 내 머리를 끌어안는다거나, 어린 동물을 보듯 말없이 웃으며 녹기 직전의 설탕처럼 단내를 풍겼을 텐데. 그는 내게 주는 시선조차 자제하고 있었다. 각 잡힌 제복을 입고 입매를 굳게 닫은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당황할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황태자는 흠, 고민하는 척하더니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누가 오시나요?”
“나보다는 그대와 더 친밀할 사람.”
황성에 저런 말이 나올 정도로 친한 사람은 에르켈밖에 없다. 황성에 없는 에르켈을 빼놓고 굳이 친분을 얘기하려면 3황자 리키온 아카레온 정도. 그러나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은 나쁜 의미로 기대를 깬 상대였다.
“제국의 태양 되실 분을 뵈오니, 이보다 더한 영광이 있겠습니까.”
황제의 가장 사랑받는 정부. 황후를 제치고 황태자의 가장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른 사람. 아네트였다.
*
흰색에 가까울 정도로 옅은 하늘색은 아래로 떨어지면서 점점 색이 진해졌다. 밑자락이 풍성한 것에 비해 위쪽 장식은 최대한 배제한 드레스는 아네트를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잘 어울렸다.
오늘도 아네트는 아름답다. 나는 양쪽에서 반짝거리는 얼굴을 자랑하는 두 사람을 구경했다. 아네트가 들어올 때만 해도 안절부절못하며 엉덩이를 달싹였는데, 차라리 이렇게 되자 아예 비현실적이라 티비를 보는 것 같다.
제국 최고 미인을 뽑는 대회의 결승전만큼이나 쟁쟁하다. 굳이 따지자면 아직은 아네트의 승리다. 한, 2년 정도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귀한 선물이 들어왔는데, 전하께 잘 어울릴 것 같아 가져왔답니다.”
아네트가 입을 가리며 웃자 황태자도 상냥하게 답했다.
“귀한 것을 받았으면 그대를 위해 써도 됐을 텐데. 내 동생의 궁 사정이 풍요로운 듯하니 기쁘군.”
비싼 게 들어왔다면 네 살림에나 보태라는 말에 테라스에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일부러 간식을 입에 넣으며 둘의 대화에 관심이 조금도 없다는 듯 굴었다.
그 뒤로 한참 궁의 소문이며, 화원을 꾸민 꽃 따위를 떠들어대던 아네트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마주 웃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네트가 사랑받는 법밖에 몰라서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열두 살을 경기장으로 끌고 왔다.
“전하와 르웰린이 친분을 나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구름처럼 지나가곤 하는 뜬소문인가 했는데, 정말이었을 줄은.”
할 말은 다 해 놓고 입을 가리는 게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두 선수 사이에 낀 공이기 때문에 입을 다문다. 아네트가 먼저 라켓을 휘두르자 황태자가 여유롭게 받아친다.
“에르켈의 놀이 친구로 들어올 때 소개장을 쓴 인연에 비할까.”
“백작께서 제 친형제 같은 분인걸요. 가까운 곳에서 사랑스러운 조카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러고 보니 5황자가 이제 아홉 살이었나. 이제 어머니의 치맛자락에서 슬슬 벗어날 나이다. 아네트가 이곳까지 귀한 발걸음을 한 걸 보면, 슬슬 승부수를 던질 때가 됐다고 판단한 듯했다. 작년이었다면 따로 나를 불러내 은근슬쩍 떠봤지, 이렇게 대놓고 찾아와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네트는 겉으로나마 다른 사람을 앞세우고, 자신은 직접 나타나지 않는 것에 능숙했다.
사뭇 달라진 태도를 확인한 황태자의 미소가 짙어진다. ‘원작’의 황태자가 아니라, 내가 알던, 익숙한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