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폐하의 건강은 좀 어때. 제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건 황후 폐하가 아닌 그대잖아?”
“제국의 모두가 그렇듯, 저도 간절한 마음으로 폐하의 쾌유를 바라고 있습니다. 곧 차도가 있겠지요.”
“기적이라도 바라?”
“위대한 피의 살아 있는 증거를, 고작 병마 따위가 위협할 수 있을 리가요.”
잠깐 오후의 티 타임에 어울리는 웃음소리가 테라스를 채운다. 아슬아슬한 수준을 넘어 대놓고 칼을 겨루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나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차만 홀짝홀짝 들이켰다.
갈라지기 시작한 권력의 가장 큰 덩어리를 쥔 둘은 사람을 물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할 테면 전하고, 들을 테면 들어 보라는 거다.
“그대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미처 몰랐는데. 구시대의 산물이잖아. 용이니, 위대한 증거니.”
“감히 누가 그런 무도한 생각을 품겠습니까. 위대한 황제가 있었기에 제국이 있고, 용이 수호한 성으로 모두가 안심하고 평온을 누리는 것을요.”
머리카락과 눈 색으로 황태자 자리를 움켜쥔 황자를 앞에 두고 황제의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가장 치열한 곳에서, 보장된 것 없는 자리 위에 서서 싸워 온 사람답게 손끝까지 제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없다. 아네트를 보고 있자면 정말 그녀가 황제를 걱정하고, 황태자를 존중하는 게 분명하다고 믿게 될 정도다.
아네트는 내 쪽으로 그릇을 밀어 주며 웃었다. “아직 어린 르웰린도 그렇게 생각할 거랍니다. 제국에서, 황가의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는 이 중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지요.” 하는 그 은근한 말에 나도 멍청하게 웃었다.
“그래? 나는 그대가 가문의 이력답게 학자에 어울린다 생각했는데, 꼭 신관 같은 말을 하는군.”
아네트의 가문은 대대로 학자를 배출했다. 굳이 계보를 따지고 올라가면 바다를 호령하고 있는 라일라 유스티아와 먼 친척이다.
“성을 나가면 신전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신에게 헌신한 몸은 다시는 속세로 돌아오지 못한다. 처음으로 아네트의 입이 굳는다. 잠깐 지워진 미소를 다시 그려낸 그녀가 아쉽다고 눈썹을 내린다. 가서 위로해줘야 할 것처럼 처연하고 안쓰러운 얼굴이다.
“매해 봄에 들여오는 에델타를 보는 게 즐거움이라. 아름답고, 화려한 것들로 눈을 즐거이 하다 보면 되도록 오래 보고 싶다, 하는. 욕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황후를 제외한 황제의 애인들에게는 황실의 성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제국법에 의하면 황족 외에는 궁에서 머무를 수 없다. 원칙 속에서 예외가 되는 게 황제의 정부다. 황자, 혹은 황녀.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제의 직계를 낳은 정부, 혹은 황제에게 특별히 허락받은 경우에만 궁을 배정받고 그곳에서 머무른다.
황제가 오래 살아 있기를 바란다는 아네트의 말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타고난 주제와 욕심이 멀면 사람은 불행해지지.”
이번에는, 아네트의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소녀처럼 해맑게 웃었다. 더없이 기쁘다는 듯 뺨에 홍조가 지고, 눈이 접힌다.
“욕망이라는 건 죄악처럼 비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지 않겠습니까? 욕심을 가진 인간은 추해지기 쉽지만, 욕심이 없는 사람은 무엇도 되지 못합니다.”
10. 로베누스
짙은 고동색 문을 두드렸다. 문이 달칵거리는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었다. 밀어 봐서 아는데, 열릴 문이 아니었다. 황실의 문관, 특히 재무부 공무원들은 잦은 야근을 버텨내기 위해 기본 체력이 좋은 편이다.
역시나 문을 열고 나온 건 케일의 부관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서렸다.
“쉿.”
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검지를 입 앞에 대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바닥에 러그가 두껍게 깔린 건 케일의 취향이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집중을 잘한다는 게 이유다. 백작의 취향도 똑같아서 성의 서재는 주기마다 바닥을 간다.
아무튼 덕분에 발소리를 내지 않고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 얇은 테 안경을 쓴 케일이 표정은 묘하게 날 서 있다. 내가 한창 앓으며 비실거릴 때 자택 근무를 선언한 케일 덕에, 일할 때 저 정도면 평화로운 얼굴이라는 걸 이제 나도 안다.
다른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될 일이지만 케일은 통보만 했다. 문병을 몇 차례 오며 말을 튼 다니엘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해 줬다. 이미 한창 때에 백작이 나를 위해 은퇴 선언을 해 버린 전적이 있어서인지, 다들 등을 떠밀며 휴가까지 쓰고 오라며 보내 줬다고.
책상을 두드리자 케일의 얼굴이 짧은 순간 다채롭게 변한다. 신경질적이다가, 놀랐다가, 곧 내게 익숙한 상냥한 미소로.
“르웰린.”
칼바람 부는 겨울에서 여름에 접어드는 봄이 된 목소리에 사무관들의 어깨가 들썩인다. 특히 신입인지, 처음 보는 젊은 남자의 표정이 제일 볼만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곧 시간을 확인한 케일이 먼저 퇴근들 해도 좋다고 선언하자 그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직장인을 기쁘게 만드는 건 퇴근이고,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건 조기 퇴근이다.
내게 보조 의자를 가져다준 부관도 상사가 말을 무르기 전에 외투를 챙겨 떠났다.
“금방 마무리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볼에 당연하다는 듯 뽀뽀하려고 다가오는 걸 막았다. 대신 반대쪽 얼굴을 들이댔다. 왼쪽은 이미 아벨에게 열심히 뽀뽀 세례를 받았다. 그쪽은 말단이라 퇴근 선언도 하지 못한다. 붙잡혀 있는 설움을 이걸로라도 풀겠다는 듯, 한 서린 입맞춤이었다.
케일이 얘기를 듣고 한참 웃었다. 모처럼 형제들끼리 함께 하는 아름다운 퇴근길을 만들어 볼까 했더니. 막내의 노력이 다 소용없게 됐다. 레오라도 같이 껴볼까, 했는데 그것도 무리였다.
“레오는 바쁠 거야. 동부에 가게 될 수도 있어서.”
“동부요?”
케일을 찾아온 이유가 갑자기 여기서 나오자 찔려 되물었다. 혹시 케일이 그레도르의 일기장을 알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새벽에 갑자기 손목이 요란하게 번쩍거렸다. 숙면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에르켈이 이 시간에 연락했다는 건 어지간히 중요한 용건이라는 거다.
[생각났어.]
[생각났어! 시발!]
[로베누스다!]
급하게 일기장을 펴자 생각났다고 외쳐대는 문장들이 떠올랐다. 텍스트만 있는데도 목소리가 함께 지원되는 것 같았다.
<로베누스?>
<진정하고 말해 봐.>
[미안. 일어났어?]
[자려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아직 안 잤어.>
<그런데 뭐가 생각났다는 거야.>
[루크가 수도에 오기 전에 로베누스에 있었어. 설정으로 써 두고 잠깐 지나가서 기억이 안 났다.]
<루크? 그 암흑의 왕인가 뭔가 걔?>
[ㅇㅇ]
<로베누스면 동쪽 끝 아니냐? 거기 살던 놈이 수도까지 올라오고 지랄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동네 접수하고 수도도 먹으러 오는 거지 ㅎ]
<ㅎㅎ>
<와그렇구나대단하다>
[그렇게 해야 엮일 구실이 생기자나]
시발.
욕을 적는 대신 정성 들여서 웃는 얼굴을 그려 주었다. 에르켈이 답장으로 뭔가 그렸다. 이게 대체 무슨 모양인가 싶어 고민하다, 무릎 꿇고 비는 모습인 걸 알았다. 이모티콘 도입이 시급하다.
[아 아무튼 갑자기 생각나 가지고.]
[계시받은 줄 알았다.]
일단 주요 캐릭터의 현 위치를 알게 됐다는 건 상당한 소득이다. 심지어 원작자조차 그에 대해 완벽하게 해석하고 있는 게 아닌 경우에는 더.
[왜 수도로 왔는지는 기억 안 나. 애초에 루크는 분량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거든.]
에르켈이 분량은 적은데, 인기는 많았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제 그가 말하는 ‘BL 문법’에 대해 모든 걸 의심하고 보기로 했다. 저 동네는 귀엽고 활기차며 아기자기한 곳이 아니다. 에르켈이 말하는 쓰레기는 조금의 과장도 없는 진짜 쓰레기고, 그가 주장하는 해피 엔딩은 과정이야 어떻든 마지막에 두 남자가 사랑하는 걸로 마무리된다는 뜻이다.
이미 황태자를 보며 ‘공’들에 대한 기대를 내버린 나는 허허 웃었다. 과연 에르켈이 공언하기를, 넷 중 제일 쓰레기 같다는 루크는 어떤 놈일지, 존나, 기대가 됐다. 시발.
<일단 그건 됐어. 로베누스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기억 나?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
[그 동네에 뒷골목이 좀 많아. 화려한 불빛의 이면, 뭐 그런 느낌으로. 그 중에서 제일 위험한 곳이 녹스인데. 나중에는 여기서도 짱 먹는데 지금 시점이 어디쯤인지 몰라서 정확히 말은 못 해 주겠다. 사실 뭐, 이게 미연시도 아니고. 특정 장소에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그러지는 않으니까.]
10대부터 뒷골목 깡패 노릇을 하는 될성부른 싹 루크는 황태자와는 다른 의미로 사람을 잡아끄는 놈이었다. 황태자가 태양처럼 중심에서 빛나며 주변으로 사람들을 모은다면 루크는 블랙홀처럼 남기지 않고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타입이었다.
원작의 억지력과 키워드에 대한 가설을 세운 후. 우리는 원작 이전에 관계를 구축하는 건에 대해 고민 중이었다. 키워드를 나눠서 충족시키며 사건이 흘러가는 걸 지켜보면, 대략적인 규칙을 파악하고 이용해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다.
서브였던 카르윈 디멘시온은 북부에 있어 당장 만나러 가는 것은 무리고, 또라이 같다는 세드릭 클라인은 일단 미뤄 두었다. 보면 피하라고 에르켈이 손수 체크까지 해 준 놈이지만, 제일 어려운 것 먼저 해결하면 다음은 좀 더 수월하지 않겠나. 나는 의지를 다지며 팔을 걷어붙였다. …고백하자면 촉수라는 단어의 임팩트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