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너무 크게 바꾸면 반동이 생길 수 있어. 적당히 조절해야 해.]
<알고 있어.>
에르켈은 아무래도 불안하다며 낑낑거렸다. 성인이 된 후 만나는 것보다는 어릴 때 만나는 게 틈이 있을 확률이 높은 건 맞지만, 그럼에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거였다.
귀족들처럼 혀에 칼을 담는 우아함을 표방한 싸움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칼부림이 나는 동네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놈이었다. 로베누스 뒷골목의 상태를 정확히 짐작할 수는 없지만, 생과 사가 오가는 치열한 세계에서 결국 승리자가 된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서부까지 입에 털어 넣기 위해 움직인 놈이 만만하다면 말이 안 된다.
[괜히 흥미 돋운다고 눈에 들 짓 하지 말고.]
<알겠으니까. 그렇게 불안해하면 나까지 불안해지잖아.>
[ㅠㅠ]
황태자, 아네트와는 또 다른 계열의 야심가를 만나러 가는데. 나라고 속이 편하지는 않았다. 잘못하면 범 아가리에 머리를 넣어 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했다.
[혹시 못 만나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 아카데미가 로베누스에서 가까운 편이니까 휴가 때 나도 가 볼게.]
<까칠한 편이야?>
[아니. 대화하기는 제일 편할지도. 상대에게 맞춰 주는 거 잘하거든. 니즈 파악하는 게 빨라.]
눈치가 빠르다는 게 꼭 좋은 일은 아니었다. 내가 상대해야 할 상대라면 더 그렇다.
<신뢰할 만한 동료 느낌 주는 게 가능할까?>
에르켈은 잠시 답이 없었다. 시간이 제법 지난 후에야 ‘미안, 좀 웃었어. 무슨 계획을 세운 거야….’ 한 그가 크게 X를 그렸다.
[걔는 사람 같은 거 믿지 않아.]
나는 조용히 ‘머리와 눈 색을 바꾼 후 뒷골목에 고아로 잠입해 그의 눈에 띈 후 위험한 상황에서 도와주며 은인 행세하기’ 계획을 폐기했다.
“제국은 넓으니까. 주기적으로 서로 파견을 나가 훈련을 받고, 실력을 겨루면서 고무시키려는 의도지. 레오를 대신해 로베누스에서도 기사단을 보낸다고 하더구나.”
어떻게 머나먼 동부로 여행 가는 걸 허락받을 수 있을까 하던 차였는데. 기가 막히는 타이밍이었다. 누가 짜 두기라도 한 것처럼.
오히려 상황이 착착 맞아떨어지자 기쁨보다 불안이 먼저였다. 그래도 일단 목적을 위해 움직이기는 해야겠지.
팔을 벌리자 케일이 나를 안아서 무릎 위로 끌어왔다. 이제 제법 무게가 나갈 텐데. 운동할 시간도 없어 보이는 문관이면서, 힘든 내색도 없었다. 아직 젊은 덕인가?
나는 그의 품에서 일부러 발을 동동 구르며 레오가 갈 때 나도 가고 싶다고 떼썼다.
*
“갑자기 웬 여행이야? 가을이 온다고 상념에 젖기라도 했어?”
엘리엇이 주스를 쭉 빨며 투덜거렸다. 이미 주스보다는 얼음이 더 많이 남은 덕에 입에 들어온 게 별로 없었던지, 잔을 들어 본 엘리엇이 “얼음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했다. 별로 마시지 않은 내 주스를 내밀었더니 냉큼 채 갔다.
“나는 왜 끌고 온 거야? 이틀 뒤에는 이사벨과 약속이 있었다고.”
“내가 가자고 안 했어도 재미있어 보인다고 따라왔을 거면서.”
내 말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던 엘리엇이 빨대만 저었다. 기대감에 젖어서 여행 짐을 한껏 싼 주제에 투덜거리긴 뭘 투덜거려.
“그리고 로즈벨 영애를 만나 봤자 네 형 욕만 하다 왔을 거잖아.”
“그렇게 나랑 마음 맞아서 같이 욕해 주는 사람이 흔한 줄 알아? 영애들은 형과 앨런의 이야기가 로맨틱한 러브 스토리쯤 된다고 생각해. 심지어 이름만 바꾼 채 소설로 만들었다더라. 동부에서는 제법 유행인데, 수도에도 들어왔대. 어머니가 알면 다 태워 버릴지도 몰라.”
“로즈벨 영애가 알면 그걸 쓴 사람을 죽이려고 들 것 같은데.”
“이지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엘리엇이 모처럼 크게 웃었다. 최근 본 것 중 제일 신이 난 모습이었다. 후계자 수업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성질이 날카로워진 그에게 ‘오리온 딜런 욕하기’는 훌륭한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자리 잡았다. 특등석 객실의 방음이 잘 돼서 다행이다. 형의 전 약혼녀와 형 욕을 하면서 친해지다니. 상상하기 힘든 친분이었다.
이사벨 로즈벨은 오리온 딜런의 일방적 파혼 선언 이후 예상대로 잔뜩 열 받아 딜런을 뒤집어 놓았다. 다른 사람, 심지어 남자, 그것도 평민과 결혼하기 위해서? 감히 로즈벨의 자존심을 건드린 대가는 꽤 혹독했다. 딜런과 로즈벨 사이의 계약은 물론이고 수에닐과 관련된 것들도 위험했다. 세 개 공작가 중 수도에서 제일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진 수에닐이다. 공작이 딜런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다른 가문들도 눈치를 볼 게 뻔했다.
오리온 딜런에 대한 인식이 ‘철없는 도련님’에서 ‘미친 새끼’로 바뀌는 것도 당연했다. 미친 새끼. 그렇다고 그냥 파혼 선언을 날려? 책임은 지고 결혼을 하든, 그 이후에 이혼을 하든 해야 할 거 아니야.
심각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타개한 것은 엘리엇이었다.
앨런 케일러스에게 인계받은 오리온 딜런을 로즈벨 앞에 대령한 엘리엇은 기꺼이 형을 바쳤다. 손과 발이 구속되고, 입까지 막힌 채 끌려온 전 약혼자와 저걸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라는 전 예비 도련님의 모습을 본 로즈벨은 품위도 잊을 만큼 크게 웃었다고 한다.
로즈벨은 엘리엇의 선물을 기꺼이 받은 후 그를 내보냈다. 그 후 오리온 딜런과 이사벨 로즈벨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덕분에 딜런과 로즈벨은 순조롭게 합의점을 찾았다.
엘리엇은 의외로 앨런 케일러스와 이사벨 로즈벨의 사이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알려 주었다.
“대단한 사람이네.”
“뭘 해도 될 사람이지. 형과 결혼하기엔 아까웠어.”
결국 두 번째 잔까지 비운 엘리엇이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열차는 서비스가 좋았다. 열 명쯤 들어갈 특등석 객실 하나를 통째로 빌린 어린 도련님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우유가 잔뜩 들어간 것부터 셔벗 종류까지 내온 직원의 태도는 깍듯했고,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 달라는 목소리가 상냥했다.
“뭐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 있어.”
딸기 셔벗을 뒤적이던 엘리엇이 미뤄 둔 본론을 꺼냈다. 나는 초콜릿 시럽이 잔뜩 뿌려진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내가 화난 것 같아?”
“엄청.”
“평소랑 비슷한 것 같은데.”
“거울 필요해?”
단 걸 먹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다니. 문제가 심각한데. 바닥에 검을 꽂듯 아이스크림 위에 스푼을 수직으로 꽂은 나는 얼굴을 쓸었다. 두 번 들이켜고, 길게 내쉬고. 두 번 들이켜고, 길게 내쉬고. 의식하며 숨을 고르자 조금 진정은 됐지만, 짜증이 나는 건 여전했다.
누구를 콕 집어 탓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 탓이다. 가령 최근 들어 입궁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찾아와 시비를 털어대는 2황자 새끼라든가, 선물을 보내는 황태자라든가, 편지를 주고받는 씨씨라든가.
루크를 만나기 위해 필요한 키워드들을 정리하던 중 불현듯 그레도르의 일기장이 르웰린과 세드릭 사이를 이어 주던 물건이라는 게 떠올랐다. 얼굴을 보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호감을 쌓는 두 사람. 몇 년째 주기적으로 펜팔을 이어 가는 누군가가 떠오른 것은 당연하다.
이미 한 번 씨씨를 의심했다가 덮어 둔 적이 있다. 이번에는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기로 했지만, 다시 불붙은 의심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씨씨는 열 살, 살롱 연회에서 만난 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원작의 비중이 적은 캐릭터였음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더 이상 원피스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커 버린 탓도 있는 게 아닐까.
축제에 올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이후 몇 번의 권유. 씨씨는 매번 슬쩍 넘어가거나, 늦게 봤다는 핑계를 대거나, 거절했다. 나중에는 나도 그러려니 하며 편지로만 인연을 이어 가는 데 익숙해졌다. 사실 내 상황이 너무 바빠 그 애를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게 맞다. 하지만 여자애인 척 나를 속였으니, 쉽게 나타날 수 없다고 하면 모든 게 이해된다.
에르켈에게 말하자 그는 팔짝 뛰었다. ‘세드릭이 네가 찾던 씨씨라고? 우리 애가 여장을 해?’ 하지만 당장 아카데미에 있는 그가 어디선가 쓸 만한 정보를 얻기는 요원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네트나 황후, 황태자의 귀에 들어간다면 에르켈이 뭔가 꾸미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동안 에르켈은 괜찮은 성적과 원만한 교우관계를 유지하며 황족의 명예를 지켜야 했지만, 지나치게 주목받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세드릭 클라인에게 찾아가 ‘혹시 네가 씨씨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의심은 확신에 가까워진지 오래다. 물 속에 있다가 끌려나온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모든 정황을 두고도 씨씨가 세드릭 클라인이 아닐 거라고 부정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화가 났다. 내게 내내 거짓말을 한 세드릭 클라인에게도.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제 눈을 스스로 가린 나 자신에게도. 어쩌면 씨씨의 신상을 조금 더 캐묻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 이런 상황에 대해 예상했지만,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멍청했다. 주변을 경계한다고 실컷 날을 세워 놓고.
그 와중에 정확히 확인하지 못하고 아직도 최후의 선택을 미뤄 두고 있는 게 제일 짜증 났다. 확신하고 있으면서, 그 증거를 까발리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