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잘못했다. 아이스크림이나 먹자. 너 표정 장난 아니야.”
질색한 엘리엇이 내가 꽂아 둔 스푼을 뽑아 내 입에 들이밀었다. 얌전히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열차는 처음 타 보는데 나쁘지 않네. 소문으로는 엄청 별로라더니. 마차에 가문 문장 박힌 게 자존심인 사람들이 퍼뜨린 헛소문이었나. 동부에만 있는 게 아쉬운데. 수도에도 열차가 다니면 마법석 비용이 좀 줄어들 거 아냐.”
“그러게. 크게 성공했으니 노선이 많아지지 않을까.”
“그나저나 너희 집에서 용케 네가 열차 타고 가는 걸 허락했네.”
“떼썼거든.”
엘리엇은 “흐음.” 하고 코웃음 쳤다. 내가 들어도 웃기는 소리다.
물론 좀 난관이었지만 역시 믿을 건 케일뿐이었다. 이왕이면 레오와 함께 가는 게 최선이지만, 사적으로 가는 게 아니라 행렬을 꾸려 가는데 내가 끼기에는 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얼굴이 그 정도로 두껍지는 않았다.
결국 그가 오기 전 미리 구경하고 있겠다는 핑계로 엘리엇을 데리고 왔다. 어차피 루크가 있는 곳에 가려면 레오가 없는 게 수월할 것이다.
“스펠먼 경은? 그 영감님 엄청 빡빡하던데.”
스펠먼에게 휴가 선언을 하는 건 이제 어렵지도 않았다. 은퇴했다고 해도 황실 기사단 최고 사령관이었던 사람이다. 궁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느 정도는 듣고 산다. 어린 제자가 권력의 틈에 껴서 허우적거리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이었을 거다.
누군가의 원치 않는 도움도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명령한 게 있어 자리를 비우신대.”
“마침 네가 여행을 가는 타이밍에 맞춰서 말이지.”
“글쎄. 전하께서 나를 아끼시는 모양이지.”
엘리엇이 웃다가 표정을 지웠다. ‘진심은 아니지?’ 묻는 얼굴이 진지했다. 대충 손을 내저었다.
“동부에 가면 어딜 먼저 갈 생각이야? 나도 어머니 따라서 많이 돌아다니긴 했는데, 이쪽은 처음이야. 아버지가 요즘 서부 항구에 집중하고 있어서.”
이번 동부행은 그의 바람대로 여유로운 휴가를 보내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래도 일찍 기대를 깨뜨릴 필요는 없지. 나는 엘리엇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동부면, 역시 로베누스지.”
“역시 그렇지?”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고 즐거워하는 엘리엇이 오랜만에 제 나이로 보였다. 아니. 해외여행은 처음인 아저씨 같기도 하고. 하여간 쟤는 현대였으면 비행기 안에서부터 선글라스를 끼고, 하와이안 셔츠를 입었을 게 분명하다.
*
제국은 넓었다. 대륙 하나를 거의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만큼,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을 업으로 하는 상인이라고 해도 평생 못 가본 곳 이 더 많다고 할 만큼 넓었다.
그런 제국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대부분은 수직으로 선을 그어 동과 서로 나눌 것이다.
서쪽,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수도 신성(神聖) 루베테. 과연 황가의 시작에 용이 있다는 전설답게 긴 역사 중 한 번도 적의 침입에 위협을 받은 적 없는 제국의 중심이었다. 황성을 비롯한 주요 기관이 서쪽으로 몰려 있었고, 귀족들이 수도를 중심으로 몰려 있는 만큼 대부분 도로가 넓고 쾌적했다.
반면 동쪽을 대표하는 건 장미의 도시 로베누스.
제국 모든 예술은 로베누스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도시는 화려하고, 부유했으며, 밤조차 낮처럼 밝게 등을 올려 파티가 멈추는 순간이 없을 정도로 향락에 젖어 있었다. 음악, 미술, 연극과 패션의 성지라는 이명에 걸맞게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꿈에 부풀어 모여들었고, 재능 있는 이를 지원하는 것을 액세서리처럼 여기는 귀족과 부르주아 또한 넘쳤다.
나와 엘리엇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짐을 호텔로 옮기고 관광을 시작하기로 했다. 부유한 귀족 도련님들이 즐길 수 있는 것들은 많았다.
나와 엘리엇이 먼저 도착해 동부 최대 도시를 구경하고 있으면, 정식으로 파견 절차를 밟은 레오가 합류해 관광을 즐긴 후 엘리엇은 돌아가고, 나는 로베누스에 마련된 저택에서 몇 달간 레오와 함께 지낸다는 계획이다. 레오가 워낙 바쁠 예정이라 백작은 고민했지만, 역시 수도 근처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아예 멀리 떨어뜨려 두는 게 안심이라고 판단했는지 허락했다.
사실 로베누스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씨씨, 아니 세드릭 클라인에 대한 화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어차피 당장 아카데미로 쳐들어가 그와 대거리를 할 것도 아닌데, 이곳까지 와서 내내 클라인에 대해 생각하는 건 내 손해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도시에 들어서자 그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남지 않았다. 수도의 가장 번화한 상점가도 이곳에 비하면 정숙한 신전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와 엘리엇은 10대 남자애들이 그렇듯, 간만에 보호자의 눈이 없는 곳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니고, 비행을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신나고 들떴다.
그러다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흘러 레오가 도착할 즈음이 돼서야 마음이 급해졌다. 원래 목표는 레오가 오기 전까지 루크가 있다는 로베누스의 뒷골목을 뚫는 거였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가 자유롭게 다닌다고 해도, 가문에서 정말 사람을 붙여 두지 않았을 리 없다. 넓은 도로를 벗어난다면 분명 제재가 있을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무작정 들어가기에 부담이 컸다. 예상보다 뒷골목이라고 통칭하는 곳의 분위기가 험악했다. 주워듣기로는 길이 복잡하고 험해서 초행인 사람들은 길을 잃기 일쑤인 데다, 귀족에 대한 감정도 썩 좋지 않다고. 그런데 거기서 척 봐도 귀족으로 보이는 어린애가 혼자 다닌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을 거다.
경험이 없다고 해도 걱정될 판에, 상대적으로 보안이 훌륭한 수도에서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다. 함부로 뛰어들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족제비처럼 생겼던 남자는 죽지 않고 도망쳤던 것 같았는데, 이후로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황실 기사단장이 ‘잡을 수 있다.’ 하고 확신했으니 잡혔을까. 잡혔으면 죽었으려나. 결말을 모르니 영 찝찝했다. 분명 내게, 정확히는 에드윌에 뭔가 원한이 있어 보였는데. 형제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황태자에게 묻기도 그랬다. 그는 축제 당시의 일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자기는 그곳에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 뻔뻔한 태도였다.
나는 찝찝함을 삼키며 마저 칼질했다. 음식을 입에 넣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이국적인 향신료를 사용한 닭 요리는 성공적이었고, 엘리엇이 시킨 주스는 별로였다. 괜한 도전 정신을 발휘한 엘리엇이 헛구역질을 했다.
식사 후에는 정해진 패턴처럼 도시를 구경했다. 낯선 도시의 화려함에 빠지자 황태자와 족제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런 건 빠르게 잊는 게 정신 건강을 위해 좋다.
엄밀히 따져 로베누스는 수도와는 다르게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매력적인 도시였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 온갖 문화가 뒤섞여 있었고, 유행의 전환도 훨씬 빨랐다. 드레스는 물론이고 남성복도 확연히 달랐다.
레이스, 보석, 자수로 최대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유행하는 수도와 달리, 로베누스에서는 오히려 장식을 최대한 제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고 했다. 치마가 짧아 발목이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어깨를 드러내는 스타일도 많았다. 그마저도 계절이 가을에 접어들며 많이 점잖아진 것이라고 했다. ‘화려함의 절정은 역시 봄이죠.’ 그때는 정말 온갖 스타일과 원단이 튀어나온다고 떠드는 디자이너의 말 중 절반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엘리엇은 열심히 경청했다. 확실히 사업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괜찮은 아이템을 훑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케일도 왔으면 좋아했을 텐데. 쉽게 어울리기 힘든 청록색 재킷과 회색 베스트를 매치한 마네킹을 보자 장남 생각이 났다. 형제 중 제일 센스도 좋고 관심도 많으니 함께 왔다면 즐거워했을 것이다. 어쩌면 여기서 또 내 옷을 맞추겠다고 호들갑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진지한 얼굴로 ‘여기부터 저기까지 전부.’ 하고 외칠 그의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역시 다음 여행은 가족끼리 함께 오는 게 좋겠다. 몇 년 뒤에는 편하게 여행을 다니기는 힘들어질 테니까.
“난 이곳이 마음에 들어.”
잔뜩 산 물건을 숙소로 배달시킨 엘리엇이 아예 옷까지 갈아입었다. 장식 없이 깔끔한 셔츠가 잘 어울렸다. 확실히 엘리엇은 프릴보다는 각 잡힌 정장이 어울리는 얼굴이긴 하지.
호텔과 연결된 카지노가 있다는 말에 엘리엇이 큰 관심을 나타냈지만 미성년자는 출입할 수 없다는 말에 상심해 로비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열여덟 생일이 되자마자 들어가 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그를 말리느라 힘들었다. 도박에 잘못 손대면 패가망신하는 건 순식간이다.
물론 얘가 그 정도로 이성을 잃을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게 아닌가. 괜히 강원도 전당포에 값비싼 물건이 즐비하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도 한탕을 노리는 짜릿함을 즐기며 중독에 빠진다.
“어머, 엘리엇?”
엘리엇은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가, 곧 생각났는지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기며 내게 베리넌 자작 부인이라고 소개했다.
로베누스풍의 깔끔하고 날렵한 드레스를 입은 자작 부인이 나를 보며 웃어 주었다. 외가 쪽 친척으로, 어릴 때는 자주 만났지만 남편과 함께 동부로 떠나면서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는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제 어린 친척을 반가워했다. 그렇게 살가운 편은 아니지만 상대가 호들갑을 떠는 만큼은 부응해 주는 엘리엇도 모처럼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