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호전적이고,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 대해서는 뒤끝이 없다 이거지. 나는 검을 받고 그대로 위로 힘주어 올렸다. 틈이 생기는 대로 이어서 공격할 생각으로 자세를 낮추고 반대쪽 손으로 손잡이 끝을 잡은 채였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맞댄 검이 많이 가벼웠다.
“어…?”
그러니까, 진심으로. 정말 가볍게 쳐내기만 할 생각이었지, 저걸 저렇게 날려 버릴 생각은 없었다. 날아간 블로젯의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굳어 있던 블로젯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검을 본다. 날아간 자신의 검과, 내 손, 이어서 얼굴까지 재차 확인한 그의 입이 제일 먼저 내뱉은 건 바람 빠지는 듯 힘없는 헛웃음이었다.
손목을 맞아 힘이 빠졌던 거라면 다시 하자는 말에 블로젯은 코를 찼다. 승부는 이미 끝났는데, 그걸 다음까지 이어 갈 이유가 있냐는 말을 하는 주제에 눈은 아까보다 이글거렸다. 저대로면 곧 핏발도 설 것 같다.
“겉보기엔 작고 마르고 예쁘장해서 검이나 제대로 들 줄 알까 싶었는데. 제법이네. 과연 은의 매 기사단의 부단장에게 배우면 남다른가 봐.”
칸딜하스의 이명까지 부르며 비아냥거리는 모습은 아까에 비해 확연히 여유가 없었다. 재수 없긴 했지만 저렇게나마 자존심을 세우는 모양인 것 같아 크게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어린애고, 자신의 무리 앞에서 패배했으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겠지. 그나마 검이 날아갔다고 주먹을 들거나, 다른 녀석들과 합세해 괴롭히려고 들지 않는 것만으로 나쁘지 않은 인내심이었다.
다만 내가 괜찮다고 해서 엘리엇까지 얌전히 입을 다문다는 뜻은 아니었다.
“로베누스가 유행을 선두하는 도시라길래 당연히 소문도 빠른 줄 알았는데. 에드윌가 막내가 에드워드 스펠먼에게 검을 배운다는 소식은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지. 벌써 한참 됐지만, 그럴 수도 있지.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해한다.”
“뭐?”
나름대로 처음의 미소를 찾아가던 블로젯이 굳었다. 가면이 깨지듯 날 선 얼굴이 된 그가 내 쪽을 노려보았다.
“거짓말 마. 에드워드 스펠먼이라면 황실 총 기사단장을 했던 분이잖아.”
“거짓말 같으면 네 삼촌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정식 기사라면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결국 블로젯은 단단히 화가 난 걸음으로 자신의 친구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엘리엇에게 말했다.
“친하게 지내라는 뜻 아니었냐?”
“이쯤 했으면 네가 찾아가지 않아도 저쪽에서 매일 쫓아오겠지.”
그렇게 말하며 웃는 엘리엇의 얼굴이 사악해 보였다.
11. 천사 같은 얼굴
엘리엇의 말대로, 세스 블로젯은 매일같이 얼굴을 비쳤다. 블로젯이 결투를 신청하고, 받아 주고, 내가 이기고, 그가 다음에는 지지 않겠다고 외치고, 그걸 익숙하게 넘기기를 반복하자,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블로젯 그룹과 안면을 텄다.
그새 알게 된 상단에 외국 물건이 들어온다는 말에 아침부터 휑하니 사라진 엘리엇 덕에 혼자 호텔 1층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있자 익숙한 빨간 머리가 다가왔다.
“안녕, 블로젯. 일찍부터 왔네.”
“흥.”
나와 대화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팩 돌린 블로젯은 내가 우물거리는 샌드위치를 보더니 잔소리를 했다.
“그렇게 빈약하게 먹으니 네 키가 바닥에 붙은 거지.”
난 엄연히 평균 키였다. 네가 열넷치고도 많이 큰 거지. 그러나 그에게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기 나이대에 따른 키 차이를 설명할 기력은 없었다. 열심히 말해 봤자 ‘나는 그 나이에도 너보다 훨씬 컸어!’ 따위의 답이나 돌아오겠지.
그나저나 나를 싫어하는 것처럼 굴면서 식사에 대해 걱정하다니. 꽤 귀여웠다.
나는 전형적인 츤데레 캐릭터의 등장에 놀라 에르켈을 찾으며 ‘세스 블로젯도 주요 인물이냐?’ 물었던 과거는 덮어 둔 채 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그에 대한 답이 [그게 ㄴㄱ?]였기 때문이다.
두껍게 썬 연어가 들어 있는 샌드위치를 마저 털어 넣고 블로젯을 따랐다. 블로젯은 대대로 로베누스의 명사였던 집안으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꽤 넓은 연무장과 비싼 선생을 붙여 주었다.
이제 나를 친구처럼 대하는 블로젯 그룹과 눈인사를 나눴다. 그중에는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꿀처럼 짙은 블론드와 살 오른 발그레한 뺨, 섬세한 속눈썹과 그 아래 보이는 파란 눈이 꼭 명화에 나오는 천사 같았다.
“저 애는 누구야?”
세스 블로젯은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면서도 질문에 답했다.
“카일 베리넌.”
카일 베리넌?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기억을 한참 뒤진 후에야 엘리엇의 먼 친척이자, 첫인상이 별로라는 단호한 평을 받았던 그 녀석이라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를 닮았는지, 어머니와는 사뭇 다른 얼굴의 카일 베리넌이 나를 보며 살풋 웃었다. 그 미소는 예쁘장한 얼굴에 썩 잘 어울렸지만, 온통 큼직한 덩치들 사이에 껴 있으니 이질적으로 보였다. 나는 내가 확인한 천사 같은 소년과, 엘리엇의 감 중 무엇을 우위에 두어야 할지 헷갈렸다.
베리넌을 살피고 있자 블로젯이 나를 채근했다. 그는 이미 연무장 중앙에 서서 검을 빼 들고 있었다. 얼른 붙어보고 싶다는 걸 온몸으로 티 내는 걸 보니 제법 귀엽다. 나는 흔쾌히 블로젯의 부름에 따라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관리인까지 따로 두는 연무장은 바닥이 딱 좋게 말라 버석거리지 않았다.
블로젯의 검은 점점 집요해졌다. 나도 또래와 대련을 하는 건 처음이라 이 경험들이 마냥 즐거웠다. 그와의 대련으로 알게 된 것이 몇 가지 있다. 우선 블로젯의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를 매번 이기는 내 실력도 어디 가서 별로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 정도.
나는 매일 패배만 맛본 스승과의 대련이나, 축제 날을 떠올렸다. 전자는 너무 압도적으로 실력 차이가 나고, 후자는 너무 압도적으로 머릿수가 차이 났으니. 내가 또래에 비해 얼마나 잘났는지 체감할 수 없었는데. 레오나 스펠먼, 카힐름의 기사단장 키시아르 테사처럼 워낙 주변에 괴물처럼 강한 인간들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약한 거 같을 뿐, 이 정도면 썩 괜찮은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찬 생각도 들었다. 그래. 내 기준치가 너무 높았던 거다. 그들은 기사가 해변가 모래알처럼 많은 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재들인데. 어차피 검으로 무쌍물 찍을 것도 아니니까, 적당히 웬만큼만 하면 충분하겠지.
그것 좀 움직였다고 땀이 흘렀다. 대충 소매로 이마를 훔치는데 누군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카일 베리넌이었다.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녕. 네가 르웰린이구나. 나는 카일이라고 해. 카일 베리넌.”
“나는 너한테 이름을 허락한 적이 없는데.”
나는 일단 친구인 엘리엇의 감을 믿어 보기로 판단하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검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듯 가느다란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아래를 향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더 연약하고 소심한 반응에 양심이 쿡쿡 찔렸다. 쎄하고 어딘가 불편하다더니, 이건 어린 소동물처럼 안쓰럽지 않나?
“미안해. 내가 무례했어.”
“별로. 사과까지는 됐어.”
가해자가 된 기분에 찔끔했다. 강하게 나가면 맞서서 덤벼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찝찝함에 모른 척 자리를 피했다.
*
엘리엇은 저녁이 돼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을 권하자 거절한 그는 피곤한 얼굴로 다 식은 차를 들이켰다. 나는 이미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온 듯 보이는 엘리엇을 보며 망설이다 운을 뗐다.
“어땠어? 외국에서 들어오는 물건은 좀 다른가?”
“양식이 다른 거야, 제국에서도 도시 몇 개만 넘어가면 그러니까 놀랍지 않은데…….”
검지 손톱 끝으로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던 엘리엇이 상자를 던졌다. 받아서 열어 보자 목걸이와 반지 따위의 장신구들이 나왔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커팅이 좋은 상급이다. 나는 브로치 하나를 들어 불빛에 비춰 봤다. 사파이어처럼 보였던 보석은 빛을 강하게 받자 묘한 색이 감돌았다. 마법 아티팩트였다.
“네게 마법 재능이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마탑에서 인정받는 마법사의 동생이니 나보다는 낫겠지.”
“급이 어떤지는 네가 보는 게 더 낫겠지.”
제일 나이 차이가 적은 만큼 아벨과 친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다. 퇴근한 후에도 보통 개인 연구실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으니까. 그래 봤자 가끔 신기한 걸 구경시켜 주는 정도.
그래도 일단 얕고 넓은 지식으로 확인은 해 봤다. 엄지로 밀어 누르듯 가볍게 힘을 주며 훑자 오돌토돌한 감각이 전해진다. 속도 겉도 잘 마무리되어 지나치게 물컹거리지 않고, 지나치게 단단하지도 않고 적당히 무른 느낌이었다. 전문가가 아니니 모조 여부는 따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지만, 그 부분은 엘리엇이 어련히 알아서 확인했겠지 싶었다.
“보석에 인챈트한 게 아니라 마석이네?”
“덕분에 전부 쓸어 오지는 못했어.”
엘리엇은 단시간에 유통할 수 있는 자금에 한계가 있었다고 혀를 찼다.
“오늘 들어온다는 게 어디 물건이라고 했지? 엘-세벳?”
“응. 대부분.”
워낙 거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은 대륙 대부분을 집어삼킨 상태였다. 자국이 워낙 넓으니, 제국에서는 외국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외국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외국이라고 해 봤자 이종족이 아니면 도시 단위의 작은 왕국들에 불과했다.
로베누스처럼 외국과 교류가 활발한 편이라면 모를까, 수도 귀족들은 특히나 영원한 영광을 누릴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 외국 문화와 역사를 배우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나만 해도 제국 귀족이 밟을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고 나름 자신할 수 있지만, 제국 밖에 대해서는 그 위치와 이름, 현재 왕가 정도만 배웠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특수성 때문인가. 주워들은 말은 꽤 있었는데, 마도 공화국 엘-세벳도 마찬가지다.
“좀 이상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