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새벽 내내 열 받아서 시근덕거리는 엘리엇을 달래며 내 침대에서 재웠다. 침대는 넓었고, 어린애 둘 정도는 무리 없이 누울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날이 밝자마자 짐을 쌌다. 이런 일이 잦았는지 하녀들의 손놀림에 절도가 넘쳤다. 밤중에 소리를 질러도 올라와 보지 않았던 그들이지만, 카일 베리넌을 꺼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고용인의 입장에서 고용주의 성격 더러운 가족이란 똥보다 더럽고 총보다 무서운 것이다.
“저 미친놈!” 하며 엘리엇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발을 굴렀다. 사실 미친놈이라고 하는 것조차 카일 베리넌에게 과분한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저러는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종의 방어 기제 따위인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상식적인 범위가 아니었다. 그는 작정하고 미친놈처럼 굴고 있었다.
우리가 저택을 나서는 동안 뒤에 서 있던 베리넌이 꼭 저주받은 인형처럼 느껴졌지만, 그는 생각 외로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며 방긋방긋 웃고만 있었다.
“어머니는 오후가 되면 오실 텐데. 인사는 하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좆 까, 등신아.”
“수도에서는 그런 천박한 말이 유행이니, 엘리엇?”
욕설을 쏟아내려는 엘리엇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친놈과는 대화하는 게 아니라고 알려줘도 엘리엇은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평소에 비해 발화점이 낮은 게, 아무래도 밤중에 비명을 지른 것도 그렇고, 자신이 보고 놀란 게 진짜 쥐의 시체가 아니라 잘 만든 모조품이라는 것에도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런 유형의 또라이들은 큰 반응을 보이면 보일수록 재미있어했다. 한 번 크게 반응해 주면 다음에도 그걸 보기 위해 점점 ‘장난’의 수위를 높일 게 분명하다.
“적당히 해 둬, 베리넌. 다음에는 나도 화낼 거야.”
“그거 기대되는데.”
“정말? 너, 내가 블로젯과 대련하는 걸 보고도 그러니?”
내가 주먹을 꽉 쥐고 흔들자 베리넌이 눈을 깜빡거렸다.
역시 미친놈에게는 말보다 주먹이지. 나는 미약하게 고개를 들려는 동정심 비슷한 것을 누르고 단호하게 마음먹었다. 그의 사정이 어떻든 저런 행동을 얌전히 넘기며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베리넌은 도를 지나쳤고, 악의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저런 식으로 질 나쁜 녀석들을 몇 번 봤다. 자신이 하는 장난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 건 즐거워하는 주제에, 자신이 겪는 고통에는 약한 게 대부분이다.
“아. 수도에서 온 칸딜하스의 부단장이 네 형님이라는 건 알아. 검술은 에드워드 스펠먼 경께 배웠다며.”
“아니. 너는 아직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 같은데. 원하면 알게 해 줄 수는 있어.”
단호한 내 말에 베리넌이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역시. 나는 안심하며 겉으로 여유를 흉내 냈다. 엘리엇이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내 손을 떼어냈다. 오늘 점심은 그가 산다고 할 게 분명하다.
“그러면 르웰린은 되게 튼튼하겠네.”
“뭐?”
“쉽게 망가지지 않겠다. 그렇지?”
“미친….”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일 베리넌은 내 상상을 뛰어넘는 또라이였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뺨을 발그레 물들이기까지 했다. 황홀해하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예측하고 싶지도 않다. 이쯤 되면 이건… 정말 실례되는 말이지만 가정 교육의 문제도 있는 거 아닐까?
“그럼 나중에 봐. 엘리엇, 르웰린.”
얼굴만 천사 같은 소악마 카일 베리넌이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배웅했다. “뭘 나중에 보자는 거야. 미친.” 하고 엘리엇이 질렸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말이.
*
“저 새끼가 갑자기 저러는 이유가 뭐야.”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재킷을 벗어 던진 엘리엇이 이를 갈았다.
나는 양심을 저울질하다 한숨을 쉬었다. 화가 나는 건 나는 거고, 아무리 그래도 남의 치부를 멋대로 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
“미친놈을 이해하려고 들지 마.”
“말 피하지 말고.”
“나도 놀랐다니까. 얌전하더니….”
“저거랑 따로 만났을 리는 없고. 블로젯에게 물으면 말해 줄 텐데.”
블로젯은 이미 베리넌에 대한 반감이 상당한 듯 보였으니, 엘리엇이 묻는다면 자세하게 털어놓을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됐을 때 엘리엇이 순순히 넘어갈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내가 엘리엇과 친한 거랑은 별개로, 수도에서도 손에 꼽는 가문의 후계자인 그가 대단히 귀족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베리넌 부인의 체면을 생각해서 얌전히 돌아온 거지, 만약 카일 베리넌의 신분에 흠집이 있다는 걸 안다면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가만히 두지 않을 게 뻔했다.
“너, 여기저기 관심을 잘 주는 척하지만 사실 그렇게 남을 신경 쓰지 않잖아.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가 카일의 말을 무시 못 하고 설설 기어 다니는지, 그 새끼는 왜 갑자기 꼬리 밟힌 개처럼 날뛰는지 설명해 봐.”
엘리엇이 박차고 일어나서 알아보려고 한다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애들이 알고 있다면 어른들 사이에서는 이미 비밀도 아닐 테니까.
“그냥, 애들이랑 사이가 안 좋아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려서 챙겨 주려고 했던 거야. 네 친척이기도 하고. 자작 부인의 호의를 무시하기도 그렇잖아.”
엘리엇의 눈썹이 올라갔다. 꽤 그럴싸한 핑계니 계속해 보라 이거다.
“게다가 블로젯이 생각보다 너무 착실해서. 이대로면 건강해지기는 하겠는데 그거 외에 얻을 수 있는 게 없었어.”
“그 녀석은 네가 원하는 걸 해 줄 수 있고?”
“그래 보이더라.”
내게 안쪽으로 가 보겠냐고 권했다는 말을 덧붙이자 엘리엇이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렸다. 조금 전보다 확연히 진정된 기세였다.
“카일에게 친구가 없다고 했지?”
“내가 만나 본 또래가 블로젯들밖에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엘리엇이 코웃음을 쳤다.
“성격이 그따위니 놀랍지도 않다.”
성격이 모난 게 먼저인지, 신분 때문에 따돌려진 게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지난밤처럼 구는 녀석을 가까이 두고 싶지는 않았다.
“부인께서 찾아오겠네. 그 녀석이 친구랍시고 데려오는 게 너와 나뿐이었을 텐데, 그게 틀어지는 걸 보고 있지 않겠지.”
“그러겠지.”
“그래도 제 어머니 말은 들으려고 하는 놈이니까, 따라올 테고.”
영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엘리엇을 보며 웃어 주었다.
“목줄은 잘 잡아 볼게.”
놀라긴 했지만, 차라리 베리넌이 그런 식으로 나온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확실히 아직 어리긴 했다. 어설프게 드러난 본성을 어떻게 잘 묶어서 데리고 다닐지 고민이었다.
*
“엘리엇.”
예상대로 날이 지나기도 전에 베리넌 부인이 찾아왔다. 집에 들어와서 우리가 호텔로 갔다는 얘기를 들은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예상 가능했다.
엘리엇은 미리 말을 맞춘 대로 “역시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했다. 자작 부인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다시 확인했다.
“혹시라도 뭔가 있었다면, 부디 용서해 주렴. 일부러는 아니었을 거야. 카일도 많이 서운해했단다. 내가 바빠서 집에 잘 머무르지 못한 탓인지 애가 너무 소극적이어서 친구가 별로 없거든. 또래를 대하는 게 어색한 건지…. 그러다 오랜만에 또래의 친척을 만나니까 많이 반가웠던 모양이야.”
소심해서 친구가 없는 게 아니라 성격이 좆같아서 없는 걸 텐데. 입꼬리를 주체 못 하는 엘리엇의 옆구리를 찔렀다. 표정 관리하자. 그러나 이어지는 부인의 말에는 나도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다.
“애가 너무 마음이 여려서… 자기 의견을 내는 데 서투른 것 같아 걱정이 많구나.”
“예?”
마음이 여리…. 나는 튼튼해서 쉽게 망가지지 않겠다는 말을 하며 웃어대던 베리넌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애써 올렸다.
부인은 한참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소심하고 유약한지. 하지만 또 얼마나 마음이 약하며 천사 같은지에 대해 떠들었다.
듣는 내내 고역이었지만, 차마 자기 아들의 실체를 모르는 불쌍한 자작 부인께 ‘아드님께서 장난이랍시고 침대에 쥐 시체를 넣어 놨어요. 진짜는 아니고 모조품이긴 했지만요.’ 할 수는 없었다.
엘리엇은 마지막까지 그 말도 안 되는 상상을 깨 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심약해 보이는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실 엘리엇도 그걸 잘 가려 주고, 약점으로 만들어 잡아 버리는 게 이득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심통을 부리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제대로 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러면, 혹시 괜찮다면 카일과 며칠 함께 지내 달라는 부탁을 해도 되겠니?”
“함께요?”
“급하게 데르타에 가는 일정이 생겨서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거든. 아무래도 집에 사람들이 있다곤 해도 애 혼자 두고 가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아서….”
나와 엘리엇은 상의한 대로 바로 답하지 않고 망설이는 척했다. 사실 카일과 잘 지내 달라는 정도에 그칠 거라고 생각했지, 며칠 함께 지내 달라는 수준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탓도 있다.
생각보다 굉장히…. 나는 베리넌 부인의 글썽이는 눈을 보며 속으로 허허 웃었다. 천진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얼굴에 속았다간 낭패를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