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우리가 끝내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듯 굴자, 부인은 감동에 차서 나와 엘리엇의 뺨에 키스해 주었다. 멀어지는 드레스 자락을 보며 소파에 늘어졌다.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후회된다고 하면 가만히 안 둘 거야.”
냉정한 말에 엘리엇을 흘금 보았다. 먹구름이 낀 듯 우중충한 얼굴이었다. 2황자를 볼 때도 저렇게 질색하지는 않았는데, 정말 어지간히 카일 베리넌이 싫은 모양이다.
그런데도 나와 함께 움직여 주겠다는 우정이 기꺼워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나중에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줄게.”
“에드윌의 동부 열차 투자 지분.”
“야.”
엘리엇이 실실 웃으며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잘 기억해 둬. 나는 진 빚은 잊어도 받아야 할 빚은 안 잊으니까.”
그의 뒤끝이 얼마나 긴지 떠올리면 마냥 웃을 일이 아니긴 했다.
*
“좋은 아침이야.”
제 어머니와 함께 올 때만 해도 수줍고 소심한 어린애 연기를 하던 카일 베리넌은, 자작 부인을 배웅하자마자 다리를 꼬고 느슨하게 앉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제국에 카메라가 있어야 했는데. 그러면 저 재수 없는 미소를 찍어서 증거를 남길 수 있을 텐데.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마.”
엘리엇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쥐 사건 때는 많이 당황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지만, 원래 엘리엇 딜런은 만만한 인간이 아니다. 어린애라는 걸 이용해 중요한 자리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끼어들 만큼 영악했고, 더 큰 이익을 위해 자존심과 이름을 버려야 하는 순간을 파악할 만큼 똑똑했다. 열한 살에 아무렇지 않게 다음 황위를 두고 황태자와 아네트 사이에서 딜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녀석을, 어머니 품에 안긴 채 가식을 떨며 살아온 저 발칙한 꼬맹이가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튼수작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나 서운해, 엘리엇.”
“부인께서 부탁하기에 너와 함께 다녀 주긴 하겠지만, 네가 선을 넘으면 나도 가만히 당하지는 않을 거야. 네 목 위에 달린 그 가벼운 게 머리라면 잘 굴리는 게 좋아. 베리넌은 딜런에게 덤빌 수 없어. 당장 내가 너에게 상해를 입혀도 나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아.”
“지금 협박하는 거야?”
“경고하는 거야.”
베리넌은 생각보다 무난하게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였다. 딜런과 에드윌은 수도에서도 이름난 귀족이다. 괜히 황자의 놀이 친구로 입궁했던 게 아니다. 게다가 엘리엇은 다음 가주가 될 몸이었다. 막말로 그가 정말 베리넌을 다치게 만들어도 장난을 치다 그랬다는 어설픈 변명 하나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좋아. 그때는 장난이 지나쳤지. 선은 넘지 않을게.”
고분고분한 태도였지만 분위기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웃는 얼굴은 생기 넘치고 사랑스러웠지만, 그가 저런 얼굴로 홱 돌아 버릴 수 있다는 걸 아는 우리에게는 영 불안한 것일 뿐이다. 어쩌다 저런 얼굴에 저게 들어갔을까. 진심으로 얼굴이 아까웠다.
“저번에 보니 르웰린이 로베누스를 제대로 둘러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내가 안내할게. 세스보다는 지리를 잘 알아.”
“필요 없어.”
“관광객이 둘러본다고 해 봤자 큰 거리 몇 개나 훑어볼 거잖아. 로베누스는 넓어. 일생 중 이곳에 몇 번이나 와 보겠어? 여유가 될 때 많은 걸 보고 가는 게 낫지 않겠어?”
미친놈치고 지나치게 논리적이었다. 사실 자작 부인이 돌아가자마자 그가 본색을 드러내 이상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해 바짝 긴장했던 터라, 저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베리넌이 허튼짓을 하면 후두부를 가격해 기절부터 시킬 생각으로 준비한 가검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엘리엇과 조용히 시선을 마주치며 남은 일정을 떠올렸다. 엘리엇이 수도로 돌아가기까지 보름. 가주 수업을 받는 그가 이만큼 오래 휴가를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꼼짝없이 가문에 묶여 있어야 할 것이다.
나도 호텔을 떠나 레오와 함께 지내게 된다면 그만큼 제약이 생길 게 뻔하다.
역시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움직이는 게 맞다.
“좋아.”
“뭐.”
엘리엇이 신경질적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엄청난 연기력이었다. 미리 말을 맞춘 건데도 기가 찬다는 듯한 얼굴을 보고 있자면 내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안타깝다. 엘리엇 딜런은 제국에서 서류를 보며 썩을 인재가 아니었는데.
그동안 알아본 바에 의하면 로베누스의 중심가를 벗어나 골목을 잘못 들면 빠져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길이 복잡하다고 했다. 지도가 있긴 하지만 관광지를 중심으로 나타낸 거라 세세한 골목까지 나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안내를 자처하는 베리넌이라면 귀족 도련님이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는 다 가 보았을 것이다.
들어갈 수 있는 마지노선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저거 믿지 마. 하나를 양보하면 열을 빼 가는 놈이라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엘리엇이 짜증 내는 모습이 웃긴지 베리넌이 크게 웃었다. 나는 가만히 그가 웃음을 멈추길 기다렸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건 기선 제압이다. 어차피 앞에서 엘리엇이 경고를 했으니 베리넌도 천방지축으로 굴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일부러 성질을 돋우려 웃었던 것인지, 곧 조용해진 베리넌이 계속 말하라는 듯 손짓했다.
“대신 계약서를 써. 자작 부인께서 자리를 비우는 6일 동안 네가 이끄는 곳을 중심으로 돌아보는 게 기본 룰이지만, 우리가 정한 선을 넘기면 남은 시간에 상관없이 즉시 그만둘 거야. 네가 행동에 조심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우리가 그만두게 되는 경우 나는 ‘진실을 말하는 계약’을 해서라도 네가 고의적으로 나와 엘리엇에게 피해를 준 것을 입증할 거야.”
에르켈이 미국 법정의 증인 선서에서 따 온 게 분명한 ‘진실을 말하는 계약’은 말 그대로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하는 계약이었다. 마법으로 영혼을 묶어 노골적인 거짓말, 생략에 있는 거짓말, 그리고 영향력 있는 거짓말 중 어떤 것이라도 내뱉는 순간 죽음에 이른다는 점 때문에 실제로 행해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억울하게 중범죄의 피의자로 몰린 경우에나 등장하는 단어인 데다, 보통은 ‘진실을 말하는 계약’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여론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엘리엇이 한 게 경고라면 내가 하는 건 협박이야.”
습관적으로 생글거리던 것도 잊고 가만히 듣고 있던 베리넌이 입을 틀어막고 테이블 위에 고개를 박았다. 한참 어깨까지 떨어 가며 웃던 그는 호흡이 딸려 빨개진 얼굴로 “아, 최고인데.” 했다. 내가 스펠먼에게 검을 배운다고 했을 때처럼 몽롱한 표정이다. 아무래도 또라이, 미친놈, 악마에 변태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나 정말 네가 마음에 들어, 르웰린.”
“유감이야. 나는 네가 아주 마음에 안 들거든.”
*
베리넌은 생각보다 머리가 잘 굴러갔다.
계약 조건을 어겨 봤자 본인에게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나와 엘리엇이 정해 둔 금지 사항을 잘 지켰다. 선 안에서 성질을 있는 대로 긁어대곤 했지만, 못 버티겠다 싶은 순간 귀신같이 잦아들었다.
이전처럼 얌전하게 구는 건 아니지만 차라리 저게 낫기도 하고. 엘리엇이 듣는다면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아 드디어 돌은 거야?’ 하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어른스럽게 구는 게 훨씬 거북했다.
게다가 어떤 방식으로든 약속은 성실히 이행하는 편이기도 했다. 자신했던 대로 베리넌은 로베누스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낡은 상점이 늘어선 골목에 들어온 엘리엇이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내 심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또 시작이군.
12. 녹스
“돌겠네.”
아까부터 돌겠다는 듯 짜증을 부리던 엘리엇이 결국 솔직한 심정을 입 밖에 냈다. 엘리엇을 돌게 만든 범인이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그 말을 듣지 못해 다행이었다. 카일 베리넌은 꼬투리를 잡는 분야의 천재였다. 원래라면 조심성 없이 말한 것에 눈치를 줬어야 하지만, 엘리엇이 하지 않았다면 나라도 ‘돌겠다.’고 내뱉었을 것이다.
작정하고 눈치를 일부러 팔아먹은 망할 꼬맹이는, 사람을 정말 돌아 버리게 만들었으니까.
“이건 라즈덴에서 온 물건이죠. 원래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것인데, 제 일생에 다시는 없을 기회라고 생각해서 간신히 얻었습니다.”
제 일생에 다시는 없을 호구를 앞에 둔 상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남들이 듣기라도 할까 눈치를 보는 연기가 수준급이다. 저 정도면 상인을 때려치우고 배우를 해도 대성하겠다.
그리고 그 상술에 넘어간 호구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것이 무엇이기에?”
“크흠, 그… 어린 도련님께서 아실지 모르겠지만. 라즈덴에 리히트라는 유명한 가문이 있었지요.”
“리히트라면, 저주받은 리히트?”
“예. 그리고 바로 이 목걸이의 전 주인이 리히트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아니샤 리히트죠.”
최고의 부를 누리다 저주를 받아 두 세대 내내 정신병으로 고통 받고, 결국 핏줄 하나 남기지 않고 멸망했다는 리히트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내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만약 이곳이 로베누스 번화가의 뒷골목이 아니고, 저 목걸이의 상태가 그럴듯했다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변 보석의 간격도 제대로 맞지 않는 조악한 모조품을 명문가의 보물이라고 속이다니. 내가 아니샤 리히트였다면 관을 열고 뛰쳐나와 저 상인의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상술에 족족 넘어가다 못해 자기가 알아서 호구 짓 하러 들어가는 멍청이, 카일 베리넌이 단단히 홀린 얼굴로 말한다.
“그럼 이걸로 주게. 내가 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