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17)

#57

“진짜야! 초대 황제께서 황후께 자신의 눈을 닮은 붉은 보석이 박힌 관을 선물하며 청혼한 건 유명한 이야기라고. 오히려 서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니니? 남자애들이 이런 데 관심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네 주변 여자애들은 다 알걸.”

대충 무슨 이유인지 알겠다. 황성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아니글란은 연애 세포가 말라비틀어진 사람이다. 그가 열정을 가지는 건 제국의 역사, 마법 시대의 영광, 고대 문자 따위였다. 초대 황제가 황후에게 어떻게 청혼을 했는지, 그게 얼마나 로맨틱했는지는 그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고, 나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배워야 할 게 많다는 이유로 정말 정석대로만 공부했더니 주변 이야기, 야사 따위를 머리에 넣을 틈은 없었다.

“나는 그때 그 애랑 겨우 두 번째로 얼굴은 본 거였어. 심지어 열 살이었다고. 어린애들 사이에 오간 선물에 진짜 청혼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좋게 봐 줘도 풋풋한 연정이지. 꽃반지나 끼워 줘야 할 나이에 청혼은 너무 간 거 아니냐고. 그러나 룩스틸이 눈썹을 내리며 하는 말에 그녀가 왜 그걸 ‘진심’이라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모님은 여덟 살에 만나서 첫눈에 반해 성인이 되자마자 결혼하셨는걸.”

탄식이 흘러나왔다. 가까운 곳에 저런 예시가 있다면 나였어도 설마 하면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룩스틸이 왜 진심이냐고 그렇게 여러 번 물어봤는지 이제야 이해했다.

“클라인도 알고 있었고.”

“응.”

내 한숨에 룩스틸이 눈치를 봤다. 파란 눈이 전처럼 데구루루 굴렀다.

“그렇게 부르는 거 보니까 엄청 화났구나.”

“내가 준 목걸이가 무슨 의미든, 그 이전부터 클라인이 내게 거짓말을 한 건 맞잖아. 그게 정말 청혼이었다고 해도 문제야. 그 애는 몇 번이나 내게 말할 기회가 있었어. 애초에 그 드레스는 뭐야?”

세드릭 클라인이 촉수 같은 걸 사용하는 변태라고는 생각했어도, 여장이 취미인 변태인 줄은 몰랐다. 에르켈도 주연 중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은 없을 거라고 했는데. 커서 미친놈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남들과는 다른 취미가 있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한다면 정말 변태계의 될성부른 싹이다.

“어….”, “음….”하며 말을 끌며 할 말이 있음을 티 내던 룩스틸은 “할 말 있으면 해.” 하고 생각보다 차갑게 나간 목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변명했다.

“그…. 사실 나 때문이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황성에서 초대장이 날아와서 일단 수도로 올라오긴 했는데. 사실 내가 그런 자리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귀찮고, 드레스는 불편하고, 애들은 시끄럽고, 보는 눈 많아서 편하게 있지도 못하고.”

그래서? 잠자코 듣고 있자 룩스틸이 민망해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씨씨랑 내기를 해서 이겼고, 내 소원대로 그 애가 나인 척하고 궁에 들어갔어. 대충 참석만 하고 오는 줄 알았지.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일이 꼬이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 그 애가…. 너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할 줄도 몰랐고. 원래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관심 주는 애가 아닌데.”

이런 것도 억지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때는 아직 아카데미 입학 여부가 완전히 판가름 나기도 전인데. 시점을 앞질러 세드릭 클라인이 르웰린에게 반하게 되는 억지력이 발동하는 게 가능한 걸까.

나는 세드릭 클라인의 키워드를 짐작해 보았다. 아카데미, 편지, 변태 정도. 촉수 같은 걸 만드는 변태와 여장하는 변태를 같은 선상에 놔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편지는 충족했으니 또 모르겠다. 살롱으로 인한 나비 효과일지도 모른다. 떠오르는 가설은 많지만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명확한 답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아무튼…. 미안해. 나 때문에 일이 커진 것 같아.”

“됐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야.”

“그거랑, 그날 연회에서 미리 씨씨에게 눈치 준 것도.”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했더니 갑자기 큰 목소리를 냈던 걸 말하는 모양이었다. 로베누스에서는 방음이 좋아 저녁에 노래 연습을 한다는 변명부터 말이 안 된다는 걸 일찍 눈치챘어야 했다.

“그것도 됐어. 네가 아니었어도 일어날 일이었을 거야.”

“고마워. 씨씨도 그렇게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네가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클라인을 변호하라는 뜻은 아니었어.”

당사자가 해야 할 변명을 룩스틸이 대신 하는 것도 웃기다. 사과를 하든, 변명을 하든. 그것은 세드릭 클라인의 몫이었다.

“클라인에게는 아무 말 마.”

“아무 말도?”

“여기서 나를 만난 것도, 내가 씨씨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도.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해.”

룩스틸은 의아한 듯 눈을 조금 찌푸렸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느냐는 말에 긍정했다.

“네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할게. 약속해.”

강한 의지를 담은 말이었다. 룩스틸 같은 유형은 자신이 뱉은 말은 지켰다. 벽에 등을 기대려다 반대편 벽이 온통 오물투성이인 것을 보고 허리를 세웠다. 세드릭 클라인에 대한 대책을 미뤄 두고 있었는데, 고민이었다.

“나는 일행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 그런데 너는, 혼자 괜찮은 거야?”

내 말에 자신의 행색을 의식한 룩스틸이 어색하게 웃으며 모자챙을 만지작거렸다. 어디에서 구했는지 끝이 닳아 너덜거리고 있었다. 얘가 왜 여기 있는지 짐작했다. 짧은 갈색 머리, 적당히 낡고 평범한 셔츠와 바지. 끈이 풀린 신발. 이 겁 없는 아가씨가 베리넌도 하지 않는 모험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어색하지도 않은 걸 보니 하루 이틀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응. 이 동네 애처럼 굴면 신경 안 써.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위험한 지역도 있지만, 거기는 딱 봐도 피해 가야 할 것처럼 생겼거든.”

“그런 건 어디서 구한 거야?”

집에서 걱정하지 않느냐 묻지는 않았다. 답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 도시 화려함의 정점에 선 레베카 룩스틸의 조카가 빈민가 남자애처럼 행세하고 돌아다닌다고 하면 누가 믿기나 할지.

“빵이랑 바꿨어. 돈 같은 거 주면 그대로 다 털리기 쉽거든. 물물교환이 최고야. 보석처럼 너무 비싼 것도 안 돼. 먹을 게 제일 좋고, 깨끗한 옷도 괜찮아. 이거 머리는 마법으로 만든 건데, 이것 봐. 이 귀걸이를 빼고 끼는 걸로 조절할 수 있어. 그렇게 비싸지는 않고, 이 동네에서도 제법 흔하더라. 위쪽 사창가에서 잘 쓴대.”

엄청난 팁을 알려 주듯 목소리를 낮춘 룩스틸이 눈을 반짝였다. 전에 룩스틸의 보호자로 왔던 여자가 생각났다. 지금도 이 애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면 매일 가슴을 치고 있을 것 같다.

딱 봐도 귀족인 나와 붙어 다니다 눈에 띄면 좋지 않을 거라며 룩스틸이 먼저 인사했다.

“로베누스에 있을 때 놀러 와. 고모도 좋아하실 거야.”

“다음에 보자.”

저 성격이 괜히 나오지는 않았을 거고. 고모를 닮은 게 아닐까.

룩스틸과 헤어지고 주스를 찾으러 가자 가게 주인이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내며 담아 둔 잔 세 개를 내밀었다. 얼음이 조금 녹아 있었지만 다시 달라고 하기에는 이미 주인의 표정이 불만에 차 있었다. 중심가에서는 상상도 못 할 서비스지만, 네 잔 가격을 합쳐 봤자 거기서 아이스크림 한 스푼도 못 살 돈이었으니 이해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졌다. 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던 건 맞지만 엘리엇이 걱정이었다. 잠깐 얘기할 시간이나 주려던 거였지, 이렇게 오래 걸릴 예정은 아니었는데. 베리넌이 긁는다고 넘어가서 몸싸움이라도 난 건 아닐까. 투덜거리면서 기다리고 있는 정도면 다행인데. 부지런히 걸어 아까 헤어진 가게 앞으로 돌아오자 베리넌은 혼자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반기는 베리넌은, 마차를 타고 가면서 봐도 속이 시커멓게 보였다. 오는 내내 커진 불안함이 덜컥 심장을 잡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욕하고 주먹질을 하고 있는 게 낫지.

“엘리엇은 어디 있어?”

차라리 며칠 동안 그랬던 것처럼 가게에서 돈이 털리게 밀어 넣었다고 답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베리넌은 이제야 내가 온 것을 알았다는 듯 몸을 돌렸다. 과장되게 두 손과 어깨를 같이 으쓱하는 모습이 웃겨야 하는데, 웃음도 튀어나오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안쪽으로 들어갔어.”

“뭐?”

“기다려도 네가 안 오니까 엘리엇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물어보더라고. 나랑 같이 있기 싫다는 티를 내기에 조금 심통이 나서 잘못 가르쳐 줬는데, 정말 그쪽으로 가더라고.”

입을 뻐끔거리다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괜히 떨리지는 않기를 바랐다. 열 받아서 그러는 걸 저 새끼는 겁먹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거짓말하지 마. 근처 가게 안에 넣어 두고 괜히 그런 말 하는 거지?”

블러핑일 게 분명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저 새끼가 또라이여도 그렇지.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알면서 엘리엇을 보냈을 리가 없다. 저 빌어먹을 놈의 인성에 대한 기대는 버린다고 해도, 그 정도로 멍청할 리가 없다. 가문의 후계자가 이런 곳에서 사라졌다면 엘리엇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하다. 그걸 아니까 베리넌도 엘리엇과 나의 협박과 경고를 받아들인 거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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