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하지만’으로 시작되는 가설들이 자꾸 튀어나오며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하지만, 저 새끼가 그런 건 상관하지 않는 미친놈이 맞으면? 하지만 베리넌이 엘리엇을 일부러 안쪽으로 보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하면? 나 혼자만의 증언으로 그걸 입증할 수 있을까?
“거짓말 같으면 주변을 뒤져 보든가.”
“그래도 눈치가 있으면 돌아오겠지 싶었는데. 여전히 엘리엇은 길 찾는 데 재능이 없나 봐.”하고 말하며 천진하게 웃어대는 베리넌을 보자 눈이 뒤집혔다.
“이, 쓰레기 새끼가!”
참지 못하고 베리넌에게 달려들었다. 들고 있던 주스가 쏟아지며 바지가 엉망이 됐다. 뻑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간 그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폭력이 낯선 동네는 아닐 텐데. 귀족 도련님들의 몸싸움이라는 점이 흥미를 자극했는지 몇몇이 기웃거렸다.
예상대로 몸을 쓰는 일에는 재능이 없는 베리넌은 별 반항도 하지 못했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놈의 멱살을 잡고 상체를 끌어올렸다. 그는 이가 부러졌는지 입을 제대로 닫지도 못하고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있었다. 고통에 떨리는 속눈썹과 빨갛게 달아오른 뺨이 평소라면 안쓰러웠겠지만 이 자식에게 동정심은 사치였다. 나는 저 얼굴을 한 대 더 쳐 버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엘리엇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간 네 손발을 묶어서 개천 너머로 던져 버릴 줄 알아. 너야말로 녹스에 처넣어서 멀쩡한 꼴로 기어 나오지 못하게 할 줄 알라고.”
베리넌이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저 입에서 나오는 게 뭐든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를 내팽개친 후 골목을 향해 달렸다. 젠장, 엘리엇! 이 멍청이가 어딜 들어간 거야!
*
이름을 외치는 게 나을까. 그러다 자칫 시선이 쏠리면 더 위험한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낯선 장소에서 애를 잃어버린 부모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리 애늙은이처럼 굴어도 엘리엇은 겨우 열셋이다. 한국이었으면 아직 고등학교도 못 올라간 풋내 나는 애송이인데 머리가 좀 잘 굴러가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엘리엇이 이렇게까지 미아 찾듯 걱정할 나이는 아니지만 장소가 문제다. 오래전 봤던 기사들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떠올랐다. 납치된 후 토막 났거나, 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거나, 장기가 팔려나갔거나. 역겨운 일이지만 크게 놀라운 사건들도 아니다. 한국에서도 그랬는데 사람 목숨이 더 가벼운 제국에서는 어떨지. 심지어 이 동네는 폭력과 가난이 만연한 곳이다.
내가 안일했다. 첫날 엘리엇의 침대에 가짜 쥐 사체까지 넣어 놓고 놀란 엘리엇을 비웃던 모습이 그동안 조금 조용했다고 희석되기라도 한 모양이다. 악마 같은 새끼. 아까 베리넌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그 자식 때문에 엘리엇이 정말 안 좋은 일을 당한다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곱게 죽는 꼴도 볼 수 없다. 감히 주제를 모르고 이딴 일을 저질렀는데. 살려 달라고 비는 게 아니라 죽여 달라고 빌게 만들어야지.
“시발.”
눈앞이 시뻘게진 채 달리던 중 평소라면 무난히 지나갔을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렸다. 무릎을 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체력이 달리지는 않는데 정신력 소모가 심했다.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것은 알고 있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상황이 급하다. 나까지 이성을 잃고 날뛰어 봤자 해결되는 건 없다.
이마와 뺨을 몇 번 내려치고 난 후에야 호흡을 고른 나는 젖은 바지를 보았다. 옷.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옷이 필요했다. 이 상태로 뛰어다니다간 좋은 사냥감이 될 뿐이다. 다시 ‘밖’을 향해 튀어나오자 지난 며칠간 돈을 털린 곳들과 비슷한 가게들이 널려 있었다. 쓸모없는 몇 개를 지나치자 온갖 잡화를 모아 둔 곳이 나왔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집. 걸어 둔 간판이 낡은 못 하나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가게 안은 밖과 분리된 공간인 것처럼 어두웠다. 구조 자체는 로베누스에 온 후 흔하게 본 2층 건물이었지만 기둥처럼 높게 쌓인 물건들로 내부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책, 냄비, 손잡이가 부러진 티포트.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간신히 중심을 유지하며 창문까지 가리고 있었다.
“약은 안 팝니다. 무기도 취급 안 하니까 녹슬었다고 욕할 거면 나가고. 로건 씨는 이틀 뒤에 돌아오니까 주인 찾아온 거면 다음에 와요.”
귀찮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나타난 남자가 머리를 긁으며 하품했다. 열다섯, 기껏해야 열여섯이나 됐을까. 지루하고 따분한 표정과 말랐지만 큰 키 때문에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뜯어보면 어린 티가 났다. 반쯤 감긴 눈이 나를 발견하고 놀라 조금 커졌다.
“여기는 도련님들이 올 만한 곳이 아닌데요.”
“머리 색을 바꿔 주는 물건이 있다고 들었어. 이곳에도 있나?”
“아하.”
알겠다는 듯 웃은 그가 신발을 끌며 물건 사이로 사라졌다. 철없는 귀족 자제들의 일탈이라고 생각한 듯했지만 지적하지는 않았다. 룩스틸이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었던 모양이지.
“잘나가는 건 갈색과 금색. 금색은 로젠에서 온 사람들이 사 가는 거니까 역시 갈색을 추천할게요. 너무 특이한 건 인기가 없어요. 붉은 머리는 고정적으로 찾는 사람들이 있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다. 내 목표는 눈에 튀지 않는 것이다. 갈색을 선택하자 얇은 실반지가 손 위에 올라왔다.
“귀걸이가 더 잘나가서. 남은 게 이것뿐이네.”
어차피 귀를 뚫지 않아 반지가 나았다. 귀걸이만 남았다면 어쩔 수 없이 즉석에서 살을 찢었겠지만, 이런 곳에서 파는 물건의 위생 상태가 좋을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로젠이 무엇인지 굳이 묻지 않았는데. 소년은 지금까지 골목의 상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를 호구 취급하기로 했는지 쉬지 않고 떠들었다.
“로젠은 저 위쪽 사창가예요. 이 도시랑 비슷하죠. 가장 안쪽은 화려하고, 밖은 비참하고. 안쪽에 있는 창부들이 제일 예쁘고, 젊으니까. 그러다 나이를 먹거나 인기가 떨어지면 점점 밖으로 밀리는 거죠. 애를 낳거나 도망치다 잡히면 아예 끝으로 쫓겨나고. 그래도 ‘안’에서나 ‘밖’에서나 통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금발이 잘 먹힌다는 거죠. 아무래도 귀족 같은 색이잖아요.”
내가 답하지 않자 그는 굳이 한 번 더 물었다.
“안 그래요?”
히죽거리는 얼굴은 일부러 약 올리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가 이러는 이유는 알겠다. 자신보다 어린애가 핏줄 하나 잘 타고나서 호의호식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그 특권을 버겁다고 내팽개치고 골목에 들어와 빈민인 척한다면 배알이 꼴릴 만했다.
“혀가 굉장히 기네.”
평소였으면 적당히 받아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태가 아니었다. 이미 열이 받을 만큼 받은 머리는 작은 자극에도 쉽게 날카로워졌다.
경고를 받아들인 입이 얌전해졌다. 굳이 그를 더 들쑤실 필요는 없었기에 얌전히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 머리카락에 감각이 있지도 않은데 뭔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은화 두 개예요.”
“입을 수 있는 옷 가져와. 잔돈은 필요 없어.”
재킷을 벗어 넘기자 떨떠름하게 받던 소년은 주머니에서 돈을 발견하고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신발도 준비할까요?”
*
소년이 보여 준 거울에 비친 갈색 머리는 낯설었다. 얼굴은 그대로인데 인상이 확 달라져 다른 사람 같았다. 나름 4년간 내 얼굴이었는데. 이대로 나가면 에르켈도 못 알아보겠다. 그 사이 셔츠, 재킷, 베스트, 신발까지 다 챙긴 소년이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정말 다 두고 가는 거죠? 나중에 와서 달라고 해 봤자 없어요.”
“그래. 가지라니까.”
어차피 돌아가는 길에는 반지를 빼면 된다. 금발의 르웰린은 옷 상태가 눈에 들어올 만한 얼굴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아니어도 내 신분을 증명할 방법은 많았고.
주스 묻은 바지가 찝찝했지만 그가 가져온 바지의 상태가 영 아니었기에 갈아입을 수 없었다. 어차피 단순한 디자인이라 크게 튀진 않았다.
“내 또래 애들이 이 근처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인데.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래….”
“귀족만 아니면 별로 신경 안 써요. 그래도 더 안으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여기까지는 괜찮고요.”
귀족이라 문제지. 간신히 안정을 찾으려던 심장이 다시 날뛰었다.
“귀족이면, 어떻게 되는데?”
간신히 쥐어짜 내뱉자 소년이 별거 아니라는 투로 “납치되지 않을까요.” 했다.
“납, 치… 되면?”
“몸값 요구하는 경우도 있는데. 파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찔한 소리였다. 차라리 몸값을 요구하면 어떻게든 데려올 수 있지만 팔아넘기는 건 정말 인생 좆 돼 보라는 뜻 아닌가. 다시 한 번 베리넌에 대한 살의가 솟구쳤다. 그 새끼를 한 대만 때리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만약 판 거면 여자애인지, 남자애인지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여자애면 북쪽으로 갈 거고. 남자애면 상태에 따라서?”
“남자애라면?”
“얼굴 반반하고 어리면 그것도 북쪽이요. 아니면 안에 파는 경우도 있다고 듣긴 했어요.”
“안이 어딘데?”
“녹스요. 아, 이렇게 말하면 모르나…. 저 안쪽에 위험한 동네 있어요. 거기는 우리도 안 들어가는데. 괜히 기웃거리다 머리 날아가요.”
소년은 어깨를 움츠리고 과장되게 떨었다. 그러더니 입을 벌려 안쪽을 보여 주었다.
“여기 이 깨진 거 보이죠. 녹스 주변 기웃거리다 얻어맞아서 이렇게 됐다니까요.”
왼쪽 어금니가 으스러져 반도 안 남아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어느 쪽이든 최악이다. 그 성격에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도 없고. 고분고분하게 만들겠다고 애를 팼으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