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엉망으로 떨리는 손으로 눈을 덮으며 생각했다. 시간이 없는데. 엘리엇이 어디로 갔을까. 저 애가 말한 대로 반반한 얼굴에 속하기는 하는데. 그러면 정말 북쪽인가? 아니면 다른 곳? 차라리 지금이라도 나가서 경비를 불러오는 건.
하지만 그러다 시간이 지체되면 어떡하지. 경비가 있는 곳을 찾으려면 한참 나가 중앙까지 가야 했고, 엘리엇을 찾을 만한 인원이 배치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단번에 출동해 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우선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엘리엇은 멍청하지 않다. 길을 잃었다고 해도 귀족들이 이 거리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알 만큼 눈치가 있으니 어떻게든 행동하고 있을 확률도 있다. 그러다 나가는 길을 발견했을지도 모르지. 얄팍한 희망이었지만 일단 그것에 기대기로 했다. 계속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거리를 제법 오래 헤집고 다녀도 엘리엇의 머리카락 한 가닥도 찾을 수 없었다. 길은 점점 복잡해졌고 개천이 가까워졌다. 조금 전까지는 누가 지나가든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 하나, 둘씩 시선이 꽂혔다. 소년에게 받은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더 가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꾸 개천 너머로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곳에 엘리엇이 없길 간절히 바라지만, 동시에 저곳에 있는 엘리엇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엉망으로 얻어맞고 고분고분해진 후 밑바닥에서 싸구려 약이나 운반하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는 모습이. 미칠 것 같았다.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엘리엇이 녹스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제일 높은가 따져 본다면 그건 아니다.
개천 쪽으로 주춤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만약, 낮은 가능성이 실현되어 그가 저기에 있으면. 내가 들어간다고 엘리엇을 찾을 수 있긴 한 건지, 찾는다고 빼 올 수 있기는 한 건지. 나는 레오폴드처럼 엄청난 무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아벨처럼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도 아닌, 어린애일 뿐인데. 숨이 짧고 거칠어졌다. 이 몸이 아직도 열둘밖에 안 됐다는 게 이렇게 억울한 적이 없었다.
떨리는 어깨 위에 누군가 손을 올렸다. 기겁하며 몸을 떼려고 했지만 상대는 느긋한 목소리로 팔을 두를 뿐이었다. 상체를 숙인 덕에 가까운 얼굴이 보였다. 노란 눈동자가 짐승의 것처럼 빛났다.
“너 같은 애가 더 들어가면 순식간에 뼈도 남지 않을걸.”
*
장난스러운 척했지만 ‘척’에 불과했다. 내용은 단호했고 목소리는 낮았다. 아직도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눈은 짐짓 흥미를 담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소개 한 마디 없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다. 내가 로베누스에 온 목적이 여기에 있었다.
단지 김민지의 취향을 한껏 부은 것 같은 얼굴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미형인 것이 추측에 신빙성을 더한 것은 맞지만, 그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추측을 확신으로 바꿨다. 느슨하게 몸을 낮췄지만 숨겨지지 않는 오만함. 태생적으로 왕, 지배자. 희망의 값이 빵보다 싼 거리에서 저런 눈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황태자의 머리와 눈 색을 바꿔 거리에 평민들과 세워 놓는다 한들 그를 천한 신분이라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 위에 서서 부리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다. 루크도 그랬다. 저런 사람이 이 거리에 또 있을 리 없고, 저런 사람을 아래에 놓고 부릴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루크는 녹스의 왕이 될 것이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저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거야?”
“아니.”
“알면서 들어가려고 했다고?”
다시 한 번 어깨 위에 올라온 손을 쳐내자 이번에는 쉽게 떨어졌다. 한 걸음 옮기며 거리를 조금 벌렸지만 지나치게 경계하는 티를 내지는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전까지 쏠리던 시선들이 흩어진 것을 깨달았다. 루크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며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드물지 않게 있긴 하지.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만 죽을 용기는 없어서 녹스로 기어들어 가는 놈들이. 절반 정도는 발 디딘 후 한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칼에 맞아 죽어서 소원을 이루고, 나머지 중 반은 사냥감이 돼서 쫓기다 죽어.”
나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남은 반은 어떻게 됐는지 묻지 않았지만 루크는 알아서 말을 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녹스에 들어왔을 때의 용기마저 휘발됐는지 살려 달라고 빌다 죽든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적응하든가. 그러다가도 어느 날부터 안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개천에 시체가 떠내려가는 경우는 드물어. 운이 좋지. 녹스의 주민이 된 순간부터 최대의 목표가 다른 곳으로 나가는 거로 바뀌는 놈들이 많더라고. 죽어서라도 나갈 수 있게 됐으니 소원은 이뤘잖아.”
녹스를 설명하는 루크는 즐거워 보였다. 아직 청년이 되지 못한 소년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해서, 내용을 듣지 않으면 동화를 읽어 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저곳에 들어가려던 시도가 얼마나 멍청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엘리엇을 구하기는커녕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그가 내 턱을 잡아 올렸다. 빼내려 시도했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도리어 턱과 뺨을 꽉 죄는 손아귀 힘이 아플 지경이었다. 배려 없이 제 눈높이에 맞춰 얼굴을 들어 올린 탓에 발끝으로 간신히 서야 했다. 나름 또래 중 괜찮은 실력인데 고작 몇 살 차이로 꼼짝도 못 하는 게 억울했다. 근력 운동을 더 열심히 했으면 이것보다 괜찮은 결과가 나왔을까.
“죽고 싶어 하는 눈은 아닌데.”
“죽을 생각 같은 거 없어.”
모자를 깊게 쓴 의미가 없어졌다. 챙을 슬쩍 건드리던 루크가 “그럼?” 물었다.
“친구가, 사라졌는데. 길을 잃은 것 같아서….”
말을 하다 말고 눈물이 핑 돌았다. 엘리엇, 그 멍청한 새끼. 베리넌 같은 놈의 수작에 넘어가서 이렇게 짧은 인생을 끝내게 되면 어떡하지. 나와 함께 가겠다고 일행도 없이 먼 동부까지 왔는데. 딜런 백작과 백작 부인을 볼 낯도 없다. 겨우 열셋인데. 인생을 즐기기는커녕 날마다 수업 스케줄에 쫓기듯, 눈코 뜰 새 없이 살던 놈인데.
“잃은 것 같아서?”
“납치되면, 저, 기로 갈 수도 있다고, 그래서.”
“그래서 녹스에 들어가려고 했다고?”
감정이 자꾸 격해졌다.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 않아 입술을 무는데도 흐으으, 소리가 새어 나왔다. 르웰린이 된 후 서러워서 운 적은 없는데. 낯선 세계에 적응 못 하고 잠을 설칠 때도, 차남이 죽는다는 원작 스토리를 알게 됐을 때도 이러지 않았다.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열 받고, 턱을 꽉 쥔 손 때문에 아프고, 결국 속은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놈 앞에서 꼼짝 못 하는 게 쪽팔렸다. 그 와중에 당황하지도 않고 가만히 내가 추스르길 기다리고 있는 루크가 제일 열 받았다.
“도와줄까?”
목소리는 나를 달래듯 상냥했다. 진정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다듬어지지 않는 호흡에 헐떡이며 그의 손목을 붙잡고 버티던 내가 “뭐?”하고 되묻자 루크는 친절하게도 다시 말해 주었다.
“녹스에 들어갈 수 있게, 네 친구를 찾을 수 있게 도와줄까?”
“네가, 왜?”
일방적인 호의는 없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지침이다. 남에게 선의를 베풀기를 즐기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일단 루크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나를 도와줄 리 없다.
“너한테 흥미가 생겨서.”
“웃기지 마.”
턱을 놓아준 루크가 젖은 뺨을 문질렀다. 내 얼굴에 닿은 것 중 제일 거칠고 메마른 손이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 대답을 피하기에는 제일 편리한 말이잖아.”
“하지만 기대했잖아.”
그런 적 없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사람을 믿지 않아 신뢰하는 동료도 두지 않는다던 인간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선의를 베풀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도와주겠다고 했을 때 사정없이 흔들렸다.
“차라리 대가를 말해.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준비할 테니까.”
“대가?”
그는 내 말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짧게 웃었다.
“네가 나한테 무슨 대가를 줄 수 있어서?”
명백한 비웃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평소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생각을 못 했다. 르웰린이 된 후 이렇게 가진 게 없었던 적은 처음이다.
베리넌을 따라다니면서 현금은 적게 들고 다녔고, 대부분은 가게에서 털렸다. 그나마 남은 것도 머리와 옷을 바꾸느라 전부 털고 나왔다. 급하게 몸을 뒤지자 바지 주머니에서 팬던트가 튀어나왔다. 리히트의 보물을 팔던 가게에서 상인이 들이밀었던 것 중 하나였다. 억지로 쑤셔 넣고 돈을 가져갔던 모양이다.
가게에서 봤을 때는 이보다는 그나마 상태가 나았던 것 같은데. 보석을 둘러싼 금속에는 녹이 슬어 있고 가운데의 보석에는 크랙이 가 있었다. 당당하게 대가를 논한 뒤에 내밀기에는 누가 봐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생각보다 취향이 싸구려인데.”
“내 취향 아니야.”
“뭐… 좋아. 그거라도 안 받으면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니까.”
흔쾌히 팬던트를 가져간 루크가 굳이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돈이 모자란 적은 없고, 영지와 수도에서는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 뭐든 구매할 수 있었는데. 좀 멀쩡한 장신구 하나라도 챙길걸. 재킷에 달린 단추를 뜯어 줬대도 이렇게 민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