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17)

#61

“그 빌어먹을 혀, 적당히 놀리는 게 좋을 거야. 아무리 오웬이 너를 아낀대도 다 받아 주지는 않을 테니까.”

“눈에 들지도 못해서 주변이나 맴도는 새끼가 짖기에는 우스운 말인 거 알지?”

“개새끼가.”

급기야 남자가 루크의 멱살을 잡았다.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휘파람을 불었고, 직원은 흔하게 벌어지는 싸움에 관심을 주는 대신 짜증을 내며 술잔 가격을 내라고 고함치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 이 상황이 경악스러운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루크가 나이에 비해 키가 큰 것은 맞지만 남자에 비하면 호리호리해 보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남자의 허벅지가 그의 허리만 한 것 같았다.

“다시 덤비게? 이번에는 어떤 수를 준비할지 기대되는데.”

“어린 새끼가 건방지게….”

그가 주먹을 날리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지만, 떨리는 눈으로 확인한 것은 의외의 광경이었다. 허벅지를 발로 걷어차서 나는 소리라기에 지나친 파열음이 이어진 후 바닥을 뒹구는 남자에게 다가간 루크가 다시 같은 부위를 짓밟았다.

“건방진 건 너지, 론. 한 번 졌으면 얌전히 꼬리를 말든가, 제대로 덤비든가. 주제에 짖을 줄은 알아서 살려 줬는데. 네가 자꾸 이렇게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나도 좀 화가 나지 않을까?”

고통에 못 이겨 발버둥 치다 상체를 일으키려는 남자의 복부를 가격한 루크가 그의 품에서 꺼낸 단검을 가볍게 던졌다 받았다.

“씨, 바알….”

“그리고 저게 내가 끼고 다니는 애면 네가 어쩌게. 이제 찾아갈 수 있는 창부도 없지 않아? 그나마 녹스에 있는 놈들은 약에 쩔어서 정신이 나가 있으니 네가 씹질이라도 할 수 있는 거잖아. 역시 다리 하나로는 모자라? 그래서 자꾸 시비를 거는 거야?”

의족이 바닥을 긁으며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다리를 자른 게 루크라고? 나는 조금 전 내가 그를 걱정한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는지 깨달았다.

“귀엽게 봐줄 수도 없는 얼굴로 왜 그러지. 다음에는 좆까지 잘라 주는 게 나을까? 어차피 쓸 데도 없는 거, 들고 다니면서 구걸이라도 하면 누군가는 불쌍하게 봐 줄 거 아니야.”

당장에라도 실행할 듯 다리 사이를 노린 검에 남자가 발버둥 쳤지만 루크는 어렵지 않게 그를 버티고 있었다.

“정 아쉬우면 잘라낸 좆을 본인 구멍에 쑤셔 박아 줘?”

남자와 함께 떠들며 웃던 놈들조차 그의 편을 들어 주지 않고 웃기만 했다. 이곳에서 친분은 술값으로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술잔이 비면 함께 사라지는 정도의 것이었다.

검이 배 아래쪽을 향해 천천히 파고들자 미친 새끼라고 욕을 내지르던 남자는 목에 핏줄을 세운 채 이를 악물었다. 루크는 그 꼴을 보고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겁먹었어, 론? 설마 내가 네 보잘것없는 성기에 손이라도 대려고. 세울 게 없으면 좆이라도 세워야지.”

이미 자존심이 재기 불능한 수준으로 짓밟힌 남자가 험하게 얼굴을 구기며 욕설을 뱉었지만 그것에 겁먹을 사람은 없었다. 그는 한참 어리고 작은 루크에게 연이어 박살 난 패배자였고, 많은 사람에게 그 꼴을 보였다. 심상치 않은 눈으로 루크를 노려보는 남자는 뭐든 할 것 같았다.

“올라가자.”

“제대로 처리하는 게 낫지 않아?”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한다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차라리 제대로 죽이는 게 낫지, 저런 식으로 적당히 살려 뒀다가 그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내 말에 눈을 깜빡이던 루크가 느슨하게 웃었다. 황태자의 미소가 사람의 것 같지 않아 사람을 홀리게 만들었고, 세드릭의 것이 당시 감상만큼은 귀여웠다면, 루크는 위험했다. 처음 계획할 때만 해도 마주치지도 않게 피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에르켈이 생각났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괜찮아. 두 번이나 진 놈이 살아갈 만큼 인정 넘치는 곳이 아니거든.”

걱정이라니. 내가 그를 걱정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루크는 어디에 던져 놔도 살아남아서 자신을 던져둔 인간을 죽이러 갈 놈이지, 누군가에게 걱정을 받을 놈이 아니었다. 사냥꾼에서 사냥감의 위치로 전락할 남자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루크는 나를 앞세우며 뒤를 가렸다. 그가 떠미는 대로 계단을 올랐다. 좁지는 않았지만 삐걱거리는 소리가 심했다.

엘리엇을 찾는 걸 도와준다는 말에 그가 데려오는 대로 따라왔다. 목적지를 앞에 두고서야 미뤄 둔 질문을 꺼냈다.

“위층에 뭐가 있는데?”

“녹스의 주인.”

*

보폭이 맞지 않는 걸음 탓에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루크는 망설임 없이 큰 보폭으로 복도를 가로질렀고, 나는 혹시나 그를 놓칠까 옷을 붙든 채로 주춤거렸다. 가장 안쪽 방, 새로 덧칠한 듯한 검은색 문을 열자 안을 채운 연기가 새어 나왔다. 매캐한 냄새가 눈과 코를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급하게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지만 이미 눈물과 기침이 흘러나왔다.

“이건 또 무슨 물건이야.”

짧은 금발의 남자가 물고 있던 궐련을 손에 들더니 내 얼굴 앞에 연기를 뱉었다. 그제야 이 연기가 저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눈이 맛이 가 있는 게 아닌 것을 봐서 약은 아닌 것 같았다. 남자는 콜록거리는 나를 가만히 훑었다. 왼쪽 눈을 가로지른 흉터가 뺨까지 내려와 있었다.

“언제부터 남창도 취급한 거야?”

루크는 아래에서처럼 상대의 성질을 긁지는 않았지만,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내 손을 잡아끌었다. 다시 한 번 아까 같은 싸움이 벌어지는 건 아닌지 긴장했지만, 남자는 기분 나빠하는 대신 “빌어먹을 애새끼!” 하고 외치며 크게 웃었다.

자욱한 연기 속, 흐린 등불에 의지하는 상황에서도 루크는 어디에 부딪히지도 않고 용케 잘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양잇과처럼 금색 눈을 가졌다고 정말 그것들처럼 어둠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건가.

“오웬.”

의자에 기대 늘어진 남자는 꼭 조각 같았다. 조각처럼 아름답다는 뜻은 아니고, 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명암의 효과가 극단적으로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그랬다.

시체처럼 핏기 없이 거무스름한 피부 위로 검은 곱슬머리가 흐트러져 있었고, 짙은 눈썹 아래 눈은 깊었다. 도드라진 광대와 마른 뺨, 단단한 턱. 옷을 입은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푼 셔츠 아래 드러난 몸은 아래에서 아직도 치욕감에 떨고 있을 론에 비하면 위협적이라고 부르기 민망했지만, 충분히 단단해 보였다.

이 사람이 녹스의 주인. 나는 바짝 언 채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정확히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남자는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처럼 강해 보였다. 앞으로 몇 년 후에 루크에게 왕좌를 내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린이야. 녹스는 처음이고, 거리에 온 지 얼마 안 됐대. 베론이 일을 가르치는 중인가 봐.”

거리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언급한 적은 없고, 베론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초를 칠 만큼 눈치가 없지도 않았기 때문에 루크가 만들어 준 신분을 받아먹었다. 다른 사람들의 질문을 개무시하던 루크가 오웬에게는 먼저 말을 꺼내는 것만 봐도 다른 놈들과 오웬의 권력 차이가 분명했다. 눈치를 보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지만 반응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민망해하지 않고 오웬을 향해 목적을 말하는 루크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했다.

“친구를 잃어버렸는데, 녹스에 들어온 게 아닌가 싶어서 찾으려고.”

“여기가 탁아소인 줄 알아?”

빈정거리며 답한 건 오웬이 아니라 뒤에서 나타난 여자였다. 여자는 여러 사람들 중에 섞여 있어도 금방 찾을 수 있을 만큼 키가 컸고, 사나운 기운을 풍겼다. 하나로 바짝 묶은 갈색 머리는 군데군데 물이 빠져 흐린 등불에 비칠 때면 금색으로, 붉은색으로 보였고, 허벅지와 견갑, 가슴 아래를 조인 끈 아래 근육이 바짝 긴장되어 있었다. 검집 없는 검처럼 날 선 여자가 아차 하는 사이 내 목을 잡아챘다. 모자는 눌러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쉽게 떨어졌다.

“어지간히 까불어, 루크. 로젠에 이런 얼굴이 있으면 잡일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창부로 키웠겠지. 푸른 문에도 흔하지 않은 수준인데.”

컥,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루크가 내 턱을 잡았던 건 장난으로 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의를 담은 것도 아닌데 목이 졸렸다. 발은 이미 땅에 닿지 않아 허공만 저었다. 이대로 간단히 내 목을 비틀어 버릴 것 같았다. 루크는 그녀와 드잡이를 하는 대신 내 모자를 주워 먼지를 털었다.

“나는 네 허락을 받으러 온 게 아니야.”

“오웬은 네 말이면 다 그러려니 하겠지만 나는 아니야. 정체도 모를 애새끼를 끌고 와서, 어쭙잖은 수작 부리지 마.”

둘 사이의 신경전에서 나만 죽어났다. 꺽꺽거리며 숨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여자의 팔목을 때리고 긁어댔다. 단단한 근육은 꼼짝도 않았다. 아, 제발, 좀. 줄어든 악몽과 함께 잊어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목 안쪽에서부터 관이 천천히 조여 숨을 틀어막는 것 같다.

나를 구제한 것은 내 얼굴에 연기를 뿜었던 남자였다. 루크와 여자 사이에 끼어든 남자는 “둘 다 좀 진정해.” 하며 나를 내려 주었다.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등 위로 토닥이는 손이 내려왔다.

“왜 애한테 시비야, 렐. 오웬이 허락하는 일에 끼어드는 것도 주제넘은 거 아니냐.”

“그 새끼 데리고 빠져 있든가.”

짜증 낸 여자가 “그렇게 세게 조르지도 않았어! 저게 괜히 울어대는 거지.” 했다. 더러운 것 취급하는 태도로 그녀가 나를 창부쯤으로 오해한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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