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17)

#63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 친구가 안쪽에서 길을 잃었어요.”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길을 잃는 게 말이 돼? 저리 안 꺼져? 안 그래도 비상인데, 별 거지 새끼가 다….”

경비는 당사자를 앞에 두고 똥 밟았다는 듯 욕을 뱉었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그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평민, 그것도 가난한 자와 대도시 경비의 신분 차는 제법 크다. 평소에는 서로 말을 섞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단어 선택이 저따위인 건 용납이 안 되지만… 은 개뿔, 시발. 상대가 귀족이든 평민이든. 로베누스에 사는 사람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게 그의 일이 아닌가.

모자를 벗고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가 내 얼굴을 알 거라는 기대는 없지만, 르웰린의 얼굴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누가 이 얼굴을 밥도 제대로 못 먹는 빈민으로 볼 수 있겠어.

“나는 르웰린 에드윌이고, 내 친구는 딜런가의 후계자인데. 그래도 이게 재수 없는 일인가? 그를 찾기 위해 사람을 움직여. 당장. 물론 일개 경비에게 그런 권리가 있을 거라 여기지는 않으니, 상관에게 가서 보고하라는 뜻이야. 내 신분은 호텔에서 보증할 거고, 멀다면 옆의 가게에서 이틀 전 옷을 구매했으니 내 얼굴을 기억하겠군.”

기사가 멍하게 내 말을 듣다가 “어어….” 하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당장 움직이지 않는 그에게 성질을 냈다. 이런 인간들은 차라리 강하게 나가면 증거 없이도 내가 귀족임을 믿을 것이다.

“에드윌과 딜런의 이름이 기사단을 움직이기에 부족한가? 그러면 대체 로베누스의 큰일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 거지?”

그러나 정신을 차린 경비가 내지른 말은 내 예상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찾았습니다!”

뭘?

*

나는 곧장 기사단 본부로 옮겨졌다. 내게 욕을 뱉던 경비는 차마 말도 제대로 못 붙이고 나를 공손히 모셨다. 본부 사람들은 내 요청대로 뜨거운 우유에 초콜릿을 넣어 주고도 어색하게 서서 전전긍긍했다. 그들이 새것이 없냐고 난리를 피우며 숙소를 뒤집은 후에 가져온 담요가 어깨를 덮었다. 기사들이 나를 찾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베리넌이 영 못 써먹을 정도로 악질은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우유를 홀짝였다. 설마하니 그 녀석이 이렇게까지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고. 엘리엇이 성질을 낸 모양이다. 그가 무사하다면 그걸로 됐다. 마침 복도가 시끄러웠다.

그러나 문을 부숴 버릴 기세로 열고 들어온 건 베리넌도, 엘리엇도 아니었다.

“형, 님…?”

내 옆에 서 있던 기사마저 놀라게 만든 건 차남이었다. 제대로 여미지도 못한 셔츠와 코트를 보며 그가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앞에서 호구같이 웃는다고 해서 차남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혈통, 실력을 깐깐하게 따지는 황실 기사단에서 부단장까지 올라간 사람이 그렇게 멍청할 리가. 실제로 그가 욕하며 성질을 내는 것도 목격한 적 있다. 레오폴드 에드윌의 성격은 빈말로도 좋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 성질이 정면으로 나를 향한 적은 없었다. 황태자와 함께 만날 때 굳은 얼굴도 혹여나 내게 피해가 갈까 황태자를 경계하는 마음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그의 머리 위에 올라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생각도 할 수 있었다. 그가 기꺼이 내 손바닥 위에 올라가길 자처한 탓이다. 그러나 지금, 차남은 이전에 본 적 없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곧장 나를 향해 걸어왔다.

“르웰린.”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은 레오폴드는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화를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 중 고르며 한참 입을 벌리고 닫던 그가 많은 것이 담긴 한숨을 쉬었다. 간신히 내 손을 잡은 손가락이 덜덜 떨려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나는, 네가….”

“형님.”

“네가 사라졌다고, 내가, 얼마나.”

채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을 나열하던 레오폴드는 내 무릎 위에 쓰러지듯 머리를 기댔다. 레오라면 심하게 놀라며 나를 걱정할 거라고 생각해 놓고 완전히 잊고 있었다. 너무 놀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핑계를 댈 수는 없었다. 지금의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얌전히 그의 머리를 토닥였다.

“죄송해요.”

“…….”

“제가 잘못했어요, 형님.”

아직도 바짝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풀렸다. 그가 아무리 화가 났어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을 알았다. 애초에 이건 화가 난 게 아니라 걱정을 한 거니까. 그가 내게 자주 하듯 머리를 끌어안고 달래자 결국 몸이 느슨해졌다.

“만약 네가 잘못됐으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었을 거야.”

그건 너무 간 거 아니냐고, 당신의 잘못도 아닌데 그러지는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심정을 영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엘리엇을 잃어버린 사이에 잘못됐다면, 나도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더 잘 보고 있어야 했는데, 내가 더 신경 써야 했는데. 실제가 되지 못한 가설들이 내 목을 조였겠지. 그 대상이 열 살 어린 동생이라면 자괴감이 더 클 수밖에.

“설명은 들었지만, 네게 직접 듣고 싶다.”

“베리넌이….”

“베리넌이?”

“베리넌이, 엘리엇이 안쪽으로 들어갔다고 했어요. 길을 잃었을 거라고. 그쪽은 위험하다고 했으면서.”

어린애 싸움을 어른에게 이르는 기분이었다. 조용히 시작한 설명을 끝낼 때는 흥분해서 ‘그 새끼가’ 따위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그 직전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었다. 레오폴드는 차분하게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단어 하나도 빼먹지 않겠다는 태도에 민망해졌다. 그래도 완전한 내 편이 있다는 건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니?”

“일단 이야기부터 해 보고요. 사실 아까 열 받는다고 때렸는데, 멀쩡하던가요?”

“아직 내가 손대지 않았는데도 엉망이던데.”

아까는 제대로 때려 줄 여유도 없어 한 대 쳤을 뿐이다. 뺨이 붓기는 했겠지만 레오폴드가 엉망이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다. 베리넌을 엉망으로 만든 건 엘리엇이 분명하다.

“그럼 됐어요. 때리는 건 엘리엇이 제 몫까지 한 것 같아요.”

레오폴드는 마뜩잖은 얼굴이었지만 내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대신 그는 목을 우울하게 쳐다보았다. 큼직한 손이 엉망이 된 목 위로 닿지도 못하고 주변만 맴돌았다.

“이건 누가 그랬니?”

많이 상냥해진 말투지만 그가 검을 꽉 잡는 것을 보았다. 뒷골목 권력자들의 신경전에 끼여서 이렇게 됐다고 하면 당장 그들을 족치러 갈 기세였고, 녹스에서 창부 취급을 당했다고 하면 골목째 드러내기라도 할 것 같았다.

“안에서 싸움이 있었는데. 별건 아니었어요.”

“별거 같은데….”

“정말 괜찮아요. 저를 도와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애가 구해 줬거든요.”

최선을 다해 루크를 변호했다. 내가 뭐라고 하든, 레오폴드는 사람을 풀어 안에서 일어난 일을 캐내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나와 루크가 붙어 다닌 것을 알게 될 텐데. 어쨌든 내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 피해가 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가 내게 키스한 것이 떠올라 욕이 나올 뻔한 것을 빼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차남은 오랜만에 나를 안아 들었다. 이제 나도 컸다고 거부한 지 꽤 됐는데. 지은 죄가 있으니 얌전히 안겨 있었다. 부쩍 자란 나를 어려움 없이 안은 그가 이마를 쿵 부딪치며 약속을 받아냈다.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은 칭찬받아야겠지만. 너도 어리다는 걸 기억해, 르웰린. 부디 너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고 약속해 줘. 비겁하다고 하는 놈이 있더라도 이기적으로 굴겠다고.”

“네.”

“그리고 비겁하다고 욕하는 놈이 있으면 내게 데려와.”

진지한 태도로 덧붙이는 말에 웃음이 터졌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나… 본인도 그렇게 살지, 좀. 차마 뒷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차남의 최우선은 르웰린이고, 그렇기 때문에 르웰린에게도 르웰린이 최우선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에게 “형님도 그렇게 해주세요.” 해 봤자, 평소에는 자신의 몸을 아껴 줄 수는 있어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의 사랑하는 막내를 위해 스스로를 챙기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도록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확답을 기다리는 차남의 이마에 나도 쿵, 했다. 르웰린의 것과 닮은 보라색 눈동자와 눈을 맞추며 약속했다.

“그렇게 할게요.”

레오폴드는 우선 옷을 갈아입겠느냐 권했다.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어도 내 꼴이 심각하리라는 것은 짐작했다. 얼굴도 장난 아니고, 옷도 심각하고, 목 상태도 난리겠지.

일단 베리넌과 엘리엇을 먼저 만나겠다고 했다. 오히려 이런 모습으로 만나야 더 잘 먹힌다. 내가 얼마나 구르고, 개고생을 했는지 베리넌도 알아야 한다.

내 말에 레오폴드도 동의했다. 시너지 효과를 위해 그도 동행하기로 했다. 만날 귀여운 척하던 형제 앞에서 무게를 잡는 건 부끄러웠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검은 제복을 입고 검을 찬 기사가 뒤에 서 있기만 해도 위압감이 클 것이다.

그는 내 허락에 신이 났는지 이참에 걸음도 늦췄다. 내가 채근하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느릿하게 복도를 지나가며 레오는 일 처리가 늦어진 게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 탓이라 자책했다. 정기적으로 수도에 올라가 상부를 직접 대면하고 보고해야 하는데, 그게 오늘이었다고. 빠르게 돌아오기 위해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때마침 내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듣고 뛰쳐나왔다고 했다.

기사가 업무 중 이탈이라니. 군인의 탈영 같은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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