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걱정스러웠지만 레오폴드는 “내 위에 있는 사람보다 내 아래에 있는 사람이 많으니 괜찮다.”는 똥 같은 논리를 펼쳤다. 내가 그의 부하였으면 뒷목을 잡았겠지만, 그의 동생이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단시간에 수도에서 로베누스까지 올 수 있었는지 듣자 이놈이 미친놈이구나 싶었다.
기차를 이용할 여유도 없어 직통 마법진을 발동시켰다는 말까지는 그런가 보다 이해했다. 하지만 그 직통 마법진이라는 게 3급 이상의 위기 상황에서만 사용 가능한 군용이라는 이야기에는 얼이 빠졌다. 그게 사용하고 싶다고 사용할 수 있는 거였나? 의문은 금방 풀렸다.
“황태자 전하께서요?”
“그래. 전하께서 허락하셨지.”
정말 감사하고 있다고 덧붙이는 목소리가 꽤나 싸늘했다. 황태자가 계속해서 나를 불러내는 것 때문에 안 그래도 날을 세우던 그다. 그 속내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어도 자신의 상사가 어린 동생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캐치해낸 모양이다.
“전하께서 너를 아끼시니 다행이야.”
“형님께서 제 얘기를 자주 해서, 제가 꼭 동생처럼 느껴진다고 하셨어요.”
황태자가 내 앞에서 예쁜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로베누스에 올 때도, 차남이 급하게 달려 나올 때도 황태자의 도움을 크게 받은 것은 맞았다. 레오가 동생에 미쳐 제 상사를 노려보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에 황태자의 편을 들어 주기로 했다. 차남은 가족에게 절대 성애를 느낄 수 없다고 믿는 정상적인 성 관념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동생’이라는 단어에 금세 누그러졌다.
주제는 금세 다른 형제들에게 옮겨졌다. 장남에게는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을 거고, 아벨은 열심히 오고 있을 거라고 했다. 백작이 모르기를 다행이다.
레오폴드의 저 성질머리는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돌아가신 백작 부인께서는 아주 얌전하고 참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 했으니, 분명 백작의 유전자다. 장남인 케일도 다를 것 없이, ‘역시 에드윌’ 따위의 평가를 받는다. 한창 정치판에서 구르던 시절의 백작은 칼 대신 혀로 상대를 조지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
“미친.”
엘리엇과 베리넌이 감금, 아니, 보호되어 있는 방에 데려다준 레오폴드가 나를 내려놓았다. 한걸음에 달려 나오던 엘리엇이 내 꼴을 확인하고 입을 벌렸다. 심각해해야 하는 건 베리넌인데 얘가 더 심각해졌다. 목에 꽂힌 시선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던 엘리엇이 베리넌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베리넌은, 음. 엘리엇이 정말 열심히 때려 준 모양이었다. 내가 때린 왼쪽 뺨도 심각하게 부어 있었지만 오른쪽은 더했다. 오른쪽 눈꺼풀은 부어서 반쯤 감겨 있고, 광대 위 멍도 심상치 않다. 습관처럼 웃으려던 베리넌은 찢어진 입술이 주는 고통에 파르르 떨다 다시 얌전해졌다. 지금 보이는 게 얼굴뿐이라 그렇지, 옷 안도 장난 아닐 것 같았다.
엘리엇이 나처럼 검을 배운 것도 아니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려면 체력이 필요하다는 수험생 학부모 같은 마인드로 운동이나 좀 하는 걸로 아는데. 애가 저 지경이 되도록 패는 게 가능한 건가. 나는 의심스럽게 레오폴드를 보았다. 아직 손 안 댔다며? 그는 미소를 찾은 평소의 얼굴로 속삭였다.
“내가 손댔으면 걸어 다니고 있지 않겠지.”
다 들으라고 한 속삭임에 베리넌이 움찔했다.
“내가 손대도 죽을 것 같은데.”
“저 새끼를 가만히 둘 수는 없어.”
엘리엇은 단호했다. 베리넌이 얌전히 맞기만 한 건 아닌지 엘리엇의 입술도 터져 있었다. 그래도 다른 곳은 멀쩡해 보여 다행이었다. 셋 중 제일 엉망은 엘리엇에게 처맞은 베리넌이었고, 다음은 나였다. 골목 안쪽에서 길을 잃은 줄 알았던 엘리엇은 조금 투덕거린 흔적을 빼면 아주 멀쩡했다.
놀라서 정신도 못 차리고 달려갔던 게 억울해질 지경이었다.
내 얼굴, 목으로도 모자라 몸을 돌려보는 엘리엇의 손을 뿌리치고 소파에 앉았다. 레오폴드는 얌전히 따라와서 내 옆에 앉고 나를 들어 올려 자신의 위로 옮겼다. 허리를 감싼 팔이 놀이공원 안전 바만큼 단단했다. 벗어나는 것을 포기하자 마음은 편했다.
“어떻게 된 거라고?”
“어떻게 된 거긴. 저게 입 턴 거지.”
지가 잘못했음을 아는 건지, 나를 안고 있는 차남 때문인지. 베리넌은 잘 놀리던 혀를 얌전히 말고 있었다.
엘리엇이 설명한 내용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룩스틸과 이야기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자 엘리엇이 베리넌을 재촉했고, 베리넌은 돌아가는 길이지만 어쨌든 음료수를 파는 곳을 알려 주었다. 당연히 나와 엘리엇의 길은 엇갈렸다. 골목을 다 외우지도 못한 엘리엇이 예상보다 더 오래 헤매느라 자리에 없는 사이 내가 도착하자 심통이 난 베리넌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한숨이 튀어나왔다. 블러핑이 맞았는데도 사안이 심각하다 보니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건 내 실수가 맞지만 베리넌도 도를 넘었다. 설마 내가 정말 골목으로 뛰어 들어갈 거라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만약 내가 옷과 머리를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골목을 외우지 못했다면. 루크를 만나지 못했다면. 조건 중 하나만 어긋났어도 여기에 있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얻어맞은 건 맞은 거고. 시발, 저거 때문에 하마터면 네가 죽을 뻔했어! 그 꼴을 하고도 더 못 때리겠다는 말이 나와?”
“안 때리겠다고 했지 그냥 넘어가겠다는 말을 한 게 아니잖아.”
잔뜩 흥분한 엘리엇은 당장 베리넌을 넘어뜨려 분이 풀릴 때까지 다시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엘리엇의 성격이 순한 편은 아니지만 폭력적인 애는 아니었는데. 베리넌에 대한 반감이 큰 상태에서 내가 위험해지자 놀란 것 같았다. 그럴 상황이 아닌 것은 알면서도 조금 감동이었다.
“자작 부인은?”
“내가 불렀어.”
조용하던 차남이 사람을 보내 뒀다고 알려 줬다. 자신의 아들이 소심할 뿐 천사 같은 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베리넌 부인이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하자 조금 착잡했다. 케일 베리넌이 남은 며칠 조용하기만 했으면 그의 장난질을 웬만큼은 받아 줄 생각이었는데. 베리넌 부인에게 그의 실체를 까발릴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녀가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베리넌은 뭐라고 말하려 하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멍과 상처로 엉망인 얼굴이라 표정을 제대로 보기는 힘들었지만, 심통이 난 것처럼 보였다.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베리넌 부인은 자신의 아들을 보고 입을 틀어막았고, 나를 보고는 비틀거렸다. 옆에 서 있던 기사가 그녀를 부축했다. 엘리엇도 그 모습에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찝찝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이게, 무슨.”
어떻게 하면 심약한 그녀가 이 이상으로 충격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사건의 전말을 설명할 수 있을까. 엘리엇이 단어를 고심하며 최대한 순화해서 상황을 알리고 있는데, 내내 조용하던 카일 베리넌이 입을 열었다.
“왜 오셨어요?”
어머니 앞에서 부끄러움 많은 척하던 모습은 치우기로 했는지, 내용도 목소리도 냉랭했다.
“급한 일이라고 가셨잖아요. 중요한 일이라고. 그래서 안 오실 줄 알았어요.”
“또라이 새끼가….”
엘리엇은 언어를 순화하고 있던 것도 잊고 욕을 뱉었다. 사실 감탄사에 가까운 거였다. 하마터면 나도 ‘미친놈이….’ 할 뻔했으니까.
“어머니가 오신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도 않을 텐데요.”
대강의 사정을 듣고도 현실을 믿지 못했을 베리넌 부인이 아들의 낯선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통 숨을 고르지 못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저런 아들을 가져 본 적 없어 그녀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분노, 슬픔, 실망. 부정과 인정을 반복하며 커진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겠지.
당장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 걱정스러웠는지 기사가 그녀를 앉혔다. 엘리엇과 나도 그녀에게 큰 유감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잘못은 카일 베리넌이 한 거니까.
“그런, 말이 어디 있니? 내가 어떻게 안 올 수가….”
“그러셨어요? 지금까지는 일을 중요히 여기시기에,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어요. 에드윌의 이름이 크기는 한 모양이에요. 이렇게 한걸음에 달려오실 줄은 몰랐죠.”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는 그녀가 보이지도 않는지. 카일 베리넌은 여전히 입에 독을 담았다. 엘리엇은 당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건 또 뭐야? 벙긋거리는 입술을 보며 나는 늦게 감을 잡았다.
반쪽짜리. 블로젯은 베리넌을 그렇게 말했다.
“내가 온 건, 물론 르웰린이 위험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게 네 일이기 때문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상냥하시네요. 그 정도는 돼야 자신의 피가 섞이지도 않은 애를 키울 수 있나 보죠.”
“카일!”
어느 쪽인가 했더니. 자작 쪽이었던 모양이다. 알고 있던 나도 당황스러운데, 엘리엇은 더하겠지. 시큰둥하거나, 이죽거리는 얼굴이 대부분이었던 그는 거의 턱이 빠질 만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도 베리넌이 갑자기 던진 자작의 부정이 당황스러웠다. 전개가 거의 주말 연속극이다. 이런 데서 왜 갑자기 출생의 비밀이야. 그거 아니야. 집어넣으라고. 이거 설마 ‘성격 나빠 보이지만 사실 상처 받은 남주인공’ 클리셰 같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