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놀란 기사를 차남이 내보냈다.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카일 베리넌만 떠들었다. 얼마나 집요하게 상처를 후벼 파는지, 입에 든 게 혀가 아니라 송곳이래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부정을 입에 담는 게 싫으세요? 웬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는 이야기잖아요. 금술 좋은 베리넌 부부 사이 태어난 애가 왜 아버지도, 어머니도 닮지 않았을까. 저 금발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베리넌 자작은 왜 사창가에 빠졌던 음악가를 지원했을까. 왜 하필 그 여자가 금발과 푸른 눈을 가졌을까.”
나는 참지 못하고 차남의 팔을 풀고 일어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던 베리넌의 얼굴에는 악의가 가득했다. 당장 베리넌 부인을 상처 입히는 데 눈이 멀어 지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대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게 어디다 대고 화를 내.”
“…….”
“뭐, 시발. 뭐. 출생의 비밀이 뭐 어쨌다고. 네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인간 같아? 뭐 얼마나 대단한 사연을 가졌기에 이 지랄을 하나 했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고, 베리넌 부인은 혼절할 것처럼 신음을 냈다. 차남은 의외로 별 반응이 없었다. 천사니 뭐니 나를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유리 인형처럼 다루던 사람이라 욕을 하면 놀랄 줄 알았는데.
“만날 뒷골목 쏘다니는 주제에. 거기 애들 못 봤어? 아, 혹시 빈민가에 가면 뭐라도 된 것 같아서 상대적 만족감 같은 거 얻냐?”
“제 형에게 인형처럼 안겨 다니던 너한테 듣자니 조금 민망하다, 르웰린. 네가 뭘 안다고….”
“네가 쓰레기라는 건 알지. 쓰레기 새끼야, 네가 그따위로 사는 게 문제지 왜 애먼 데 화를 내냐고. 내가 지금 너한테 같잖은 사과나 받자고 왔지, 그따위로 구는 거 보려고 온 줄 알아? 아까부터 미안하다는 한마디도 안 하던 주제에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짜증이 나서 쏘아붙이고 그를 남겨 두고 나왔다. 베리넌 부인은 차남이 맡았다. 갱생의 여지가 없는 쓰레기. 저런 놈은 뭐라고 해 봤자 달라지지도 않는다. 협박하고 윽박질러서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는 건 어렵지도 않았지만, 진심이라곤 담기지도 않은 사과를 받아봤자 기분만 더럽다.
뭐 대단한 거라도 있나 생각했던 내가 등신이었다. 심보가 못 돼먹긴 했어도 어린 주제에 머리와 혀를 제법 잘 쓰는 줄 알았는데. 그냥 자기연민에 빠진 머저리였을 줄이야. 본의 아니게 그의 비밀을 알게 되며 전전긍긍했던 과거가 우스울 정도였다.
베리넌 부인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우선 저택으로 모시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고 복도를 걸었다. 나는 잠깐 눈치를 보다 불퉁하게 말했다.
“안 놀라세요?”
“응?”
“욕한 거요.”
어차피 달라지지도 않을 거. 그냥 무시하고 나올걸. 민망함이 조금 늦게 찾아왔다. 기껏 형아니 뭐니. 형제들 앞에서 온갖 내숭은 다 떨었는데. 그러나 차남은 생각보다 완전체였다.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하는 게 왜 욕이지?”
그건 그래.
*
“르웰린.”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베리넌 부인이 나를 찾았다. 안 그래도 하얗던 얼굴은 핏기없이 질려있었다. 긴 속눈썹이 떨릴 때마다 그림자가 짙어졌다.
“대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선 사과하고 싶어. 내가, 잘 몰라서. 너와 엘리엇에게 그 애를 맡긴 게, 정말… 미안해”
“그 부분은, 저희가 거절하지 않은 걸요.”
“아니야. 내가… 내가 미안해. 나는, 그 애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알고 있을 줄, 몰랐어. 너를 위험하게 만들고… 혹시 이 일 말고도 다른 일이 있었다면, 그것도….”
부인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미 고인이 된 자작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욕은 해 주고 싶었다. 상도덕이라는 게 있지. 다른 데서 낳은 애를 집에 데려와서 부인에게 맡기다니. 그 와중에 대외적으로는 사이좋은 부부 이미지였다고 하니 내 속이 다 뒤집혔다.
심지어 남편과 사별 후 기껏 키운 아들은 자기 처지를 비관하며 비뚤어지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가 밖으로 쏘다니는 게 일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카일 베리넌의 그 성질머리를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고 싶었던 걸 수도 있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베리넌 부인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전부 내 잘못인 것 같아서….”
“잘못은 저 새, 카일이 했어요. 부인께서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 없어요.”
엘리엇이 나섰지만 분위기가 전환되지는 않았다. 한참 말없이 울던 베리넌 부인이 더듬더듬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진정과 휴식임을 알고 있고, 굳이 카일 베리넌의 사연을 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이 순간을 피하고 싶었지만,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차남은 관사 안쪽으로 안내했다. 부재중인 사령관실을 레오가 사용 중이라고 했다.
짙은 남색 소파에 넷이 어색하게 둘러앉았다. 이대로 그녀를 집으로 보내도 딱히 편하게 휴식을 취할 것 같지는 않았다.
“카일이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닌 건 맞아. 내가… 불임이었거든. 남편을 속인 건 아니었어. 모르고 있었고, 알게 된 후에 말하자 그이는 괜찮다고 했거든. 꼭 자식이 있어야 가정이 완성되는 건 아니라고. 필립은 다정한 사람이었지.”
“어… 그럼 카일은.”
“클레리가 낳았어. 내가… 그녀를 후원하고 있었거든.”
눈물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아직도 소녀의 것 같은 뺨에 그늘을 드리웠다.
“금발에 푸른 눈이 아름다운 사람이었지.”
엘리엇이 “설마 저 클레리가 클라리사 오린테아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하고 중얼거렸다. 오래전 일을 그리듯, 몽롱한 눈빛을 하던 베리넌 부인은 황급히 덧붙였다.
“필립이 불륜을 저지른 건 아니야. 그건, 정말. 그 부분은 왜 그렇게 알게 됐는지….”
베리넌 부인이 털어놓은 진실은 주말 연속극 뺨을 치는 스토리였다. 내 상상력이 조금 짧았다.
베리넌이 후원하던 아름다운 피아니스트 클레리. 빛나는 외모와 재능을 가진 그녀는 로베누스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점에 임신을 한다.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지만, 아마 거짓말일 것 같다고. 클레리는 자유로운 연애를 즐겼지만, 그게 난잡한 사생활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베리넌 부인은 카일의 친부가 아마 로베누스에 머물던 귀족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아이는 사생아, 본인은 첩으로 묶여 사느니 차라리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 게 나았을 거라고. 많은 고민 속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클레리는 보장된 성공과 아이 중에 자신의 미래를 선택했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 그렇게… 끝나기에 아까운 사람이었으니까.”
“그 애를 부인께서 키우기로 하셨고요.”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어. 결혼 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오히려 내가 낳을 수 없다고 하니까 더 가지고 싶어져서. 그래도 클레리가 낳은 애를 내가 키우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처음 본 순간 반했거든. 나는 그 애가 천사인 줄 알았어. 너무 예뻐서….”
남편을 설득해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키우게 됐다는 말과 함께 간신히 멈췄던 눈물이 다시 터졌다. 나는 한숨이 터졌다.
전말을 알고 나자 오히려 속이 더 뒤집혔다. 카일 베리넌 그 멍청한 놈이 자신이 자작의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이라고 철썩 믿고 빗나가는 동안, 베리넌 부인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놈을 자신의 아이처럼 키우고 있었다.
베리넌이 어떤 점에서 화가 나 있는지 짐작하지 못하겠는 건 아니다.
자신이 자작의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그도 많은 부정과 혼란을 겪었겠지.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도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딱히 친구라고 부를 관계도 없는 베리넌이 그 정도로 정보를 얻었다는 건, 주변에서 그에 대해 떠들었다는 뜻일 테니까.
어른들 사이에서 도는 루머가 애들 귀에도 들어가면서 그들이 베리넌에게 악의적으로 말을 뱉지 않았을까. 실수였다고는 해도 베리넌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출생을 언급한 블로젯의 일만 봐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원망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자작은 이미 죽었고, 친모로 추정되는 사람은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으니까. 화살은 만만한 쪽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그 거지 같은 장난들은 상처 받아 뭉개진 자존심을 감추는 방법이었을 거고.
물론 이해하겠다는 거지, 그가 잘했다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지도 못하고 환경 탓이나 하는 머저리들은 딱 질색이다.
하지만….
눈물만 뚝뚝 흘리는 베리넌 부인을 살펴봤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연회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만히 뺨을 적시고 결국 턱 끝으로 떨어지는 눈물이 처연하기 그지없다. 제 아들뻘의 어린애들과 처음 보는 기사 앞에서 우는 것이 본인도 민망한지, 울음을 참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내면에서 ‘그래서 어쩌라고? 그놈과는 더 이상 엮이지 않는 게 낫다니까!’ 하는 목소리와 ‘아무리 그래도 아직 어리니까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하는 목소리가 싸웠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당연히 전자인데. 차남이 소매를 접어 주는 대로 가만히 팔은 내주며 고민하자 엘리엇의 눈이 사나워졌다.
“허튼 생각 마.”
“허튼 생각, 뭐.”
“네가 지금 하는 생각.”
귀신같은 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