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야.”
같은 무게의 황금과 교환된다는 성수를 바르자 목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상처를 치료하고 돌아갔더니 베리넌은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여기가 자기 방인 줄 알아. 그 때문에 방에 들어오지도 못한 기사들이 안타까웠다. 그들에게는 베리넌도 차남의 일행으로 보여서 함부로 대하지도 못했을 텐데.
소리를 내며 들어가는데도 나를 본 척도 안 하는 게 어이없어 포션을 던졌다. 소파 위를 굴러가는 병을 뚱한 시선이 따라갔다.
“입이랑 뺨 주변에 발라. 제대로 벌어지지도 않을 거 같아서 챙겨 왔으니까.”
“나랑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센 척하지 말고 바르라고.”
바를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기세로 반대편에 앉아 팔짱을 끼자 베리넌이 얌전히 얼굴에 포션을 발랐다. 뺨, 광대, 입술. 터지고 부은 부위가 빠르게 치유되자 사람 꼴을 찾았다.
“내가 말 시작하면 중간에 끊는 거 허용하지 않을 테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미리 해라.”
“미안해.”
아까의 지적을 받아들였는지 순순히 사과가 튀어나왔다.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네가 그렇게 놀랄 줄 몰랐어. 엘리엇과 친하긴 하구나. 평소였으면 안 속았을 텐데.”
“비꼴 건지, 사과할 건지 하나만 골라.”
“진심이야. 네가 많이 놀란 것 같아서 거짓말이었다고 하려고 했는데 이미 안으로 들어갔더라고.”
성질을 잔뜩 낸 베리넌은 오히려 차분해져 있었다. 나는 베리넌의 갱생 가능성을 1%에서 3%로 수정했다. 이 정도면 건드려 볼 가치는 있지 않나.
엘리엇은 내가 베리넌에게 가서 이야기해 보겠다는 말에 이럴 줄 알았다고 성질을 냈다. 그 자식이 이게 처음이냐, 정말 실수였다고 단언할 수 있느냐, 하마터면 네가 죽을 뻔했다. 쏟아내는 말들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에게 뭐라고 하든 베리넌에 대한 평가는 바뀌지 않을 거고, 바꿀 필요도 없다.
내가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나선 건 일종의 의무감이었다. 어쨌든 카일 베리넌은 아직 새파랗게 어린 꼬맹이다. 이대로 살기에는 저놈의 인생도, 베리넌 부인의 인생도 아까웠다. 물론 이게 무슨 영화도 아니고. 내가 명연설을 늘어놓으면 베리넌에 감화되어 지금까지의 행실을 뉘우치고 앞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엔딩은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에게 해 줘야 하는 말이었다. 주변에 잔소리해 줄 어른 하나 없는 꼬맹이에게, 누군가는 혼을 내고 쓴소리를 해야 한다. 제국의 상식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그랬다.
“사과를 하는 건 네 자유지만, 받아들이는 건 내 자유야.”
“그래.”
“너를 용서할지, 말지는 조금 더 생각해 볼게.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사람이 죽을 뻔한 건 맞으니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장난이라는 핑계로 나와 엘리엇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놈과 장본인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설마 내가 어린애한테 약한 걸 알고 일부러 이러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쁜 놈, 미친놈의 가면을 벗은 카일 베리넌은 지나치게 얌전했고, 자신이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부인께도 사과해.”
“…….”
“네 친모가 아니더라도 네 어머니가 되어 준 건 결국 베리넌 부인인데. 너 그 음악가 얼굴이나 제대로 알아?”
“응.”
베리넌이 실소를 흘렸다. “찾아가 봤었거든. 연주회에.” 하며 말하는 목소리는 담담했고, 그래서 더 우울했다.
“사실 조금 기대했는데. 그런 거 있잖아. 한눈에 알아보는 거.”
“책에 심취하는 타입인 줄은 몰랐는데. 그런 건 소설에나 나와. 현실에 없어.”
“응. 그렇더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민해 봤지만 역시 그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는 건 내 역할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는 적어도 베리넌 부인이 직접 하는 게 맞다.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클레리가 베리넌을 두고 떠난 건 맞으니 원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내용의 질이 다르다.
“너를 위로해 주려고 온 거 아니야. 아까도 말했잖아. 주변 탓 하지 마. 결국 그렇게 행동한 건 네 잘못이야. 어디에든 원망을 쏟고 싶은 것도 알겠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할 나이인 것도 알겠어.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남는 게 대체 뭐가 있다는 거야? 어설프게 자존심 세우지 마. 그거 자존심 아니고 오기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베리넌이 실실 웃었다. 평소와 비슷한 웃음이었다. 재수 없었다는 뜻이다.
“르웰린, 전부터 느꼈는데 너 꼭 나를 어린애 대하듯 한다. 나랑 동갑이라는 자각은 있는 거야?”
“정신 연령이 다르잖아. 네가 애새끼처럼 구는데 어쩌라는 거야?”
자꾸 눈앞에 살랑거리는 앞머리를 거칠게 넘겼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나이만 쳐도 베리넌의 두 배가 넘는다. 르웰린 에드윌이 된 후 4년이 흘렀으니 만만치 않은 차이다.
“어머니께는….”
“결국 만만하니까 화낸 거잖아. 사실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그게 더 좆같아.”
베리넌이 “왜 그렇게 생각해?” 했다. 나는 그를 한껏 비웃었다. 2황자의 평소 행실을 따라 하면 상대로 하여금 주먹이 떨릴 만큼 격한 감정을 일으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정말 싫어했으면 네가 부인 앞에서 그렇게 내숭을 떨고 있지도 않았겠지. 천사 소리 들으면서 얌전히 있었던 건 결국 사랑받는 아들로 남고 싶어서 그랬던 거잖아?”
“…….”
“아니면 아니라고 해 보든가.”
“네가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그렇게 다 알고 있다는 듯 굴면 좀 짜증 난다.”
지는 가만히 있어도 짜증 나는 주제에. 어이가 없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정곡을 찔려 한껏 사나워진 놈에게 굳이 시비를 털 만큼 여유가 넘치지는 않았다.
“딱히 네가 달라지는 걸 기대하지는 않아. 내가 네 보호자도 아니고. 오늘 이후로 내 인생에 끼어들 여지도 없는 놈이 어떻게 살든 내 알 바 아니잖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구나.”
“피곤해 죽겠는데도 내가 굳이 와서 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누구라도 한 번은 해야 하는 말이니까 하는 거야. 이후에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신경 안 쓸 거야. 계속 그따위로 살면 지금 이건 시간 낭비가 맞는 거고. 아니면 조금은 가치가 있겠지.”
베리넌은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고민에 빠진 얼굴에는 습관처럼 붙어 있던 미소가 없었다.
“네가 무슨 꼬리에 불붙은 개야? 되는대로 뛰어다니면서 일 벌리기만 하지 말고 책임을 져. 열둘이면 어리기는 해도 그 정도도 못 할 만큼 어린 건 아니잖아.”
한참 후에야 “그렇게 할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3%가 성공할 수 있을지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 하루였는데 애 붙들고 있었더니 기력이 부족했다. 뒤늦게 허기와 피로가 동시에 밀려와서 뭘 먼저 해야 할지 정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음 주부터 봉사 등록해 놨어. 이 건물로 와서 테일스 경을 찾으면 돼.”
“어?”
“뭘 놀라. 책임지라고 했잖아. 아무 데나 쏘다닐 기운 있으면 와서 심부름이나 해. 그래봤자 어린애한테 뭐 대단한 거 시키겠냐만, 몸이 피곤하면 헛소리 덜 하겠지.”
거짓말이다. 차남의 권력을 이용해서 기사단 내 식당 봉사로 꽂아 넣었다. 어차피 매일 일손이 부족한 곳이라 없는 자리를 만들어 내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최대한 힘들지만, 불평은 나올 수 없는 자리를 고르느라 고민 좀 했다.
차남은 아예 종자로 붙여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러다 잘못 걸리면 생각보다 일이 커질 테니까. 이걸로 충분하다. 평민들과 함께 일하게 될 테니 자존심도 상할 게 뻔하고. 운동도 제대로 안 해 본 몸은 후들거리게 힘들 거다. 쭈그려 앉아 감자를 열심히 깎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웃음이 났다.
“네 감시역도 있을 거야. 고생해라.”
13. 결심
블로젯은, 그러니까 꼬맹이 쪽인 세스 블로젯은 이틀 후에야 찾아왔다. 제 삼촌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놀란 얼굴이었다.
“너… 괜찮냐?”
“괜찮아.”
나는 어렵지 않게 답했다.
이미 포션을 들이부은 몸은 괜찮다 못해 힘이 넘쳤다. 잠이 몰려오는 부작용도 이번에는 달가웠다. 오랜만에 정말 푹 잤다. 로베누스에서 제일 큰 골칫거리 두 가지를 해결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베리넌의 상태를 계속 확인하지는 못했어도 마지막으로 봤을 때 독기가 많이 빠진 상태였고, 루크와도 얼굴을 텄으니 이곳에 온 목적도 어느 정도 이루었다.
에르켈은 루크의 키워드를 콕 집어 말하지 못했다.
[골목이랑… 음, 로켓 정도?]
황태자에 비해 대단히 빈약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내 지적에 그는 또 ‘ㅠㅠ’ 하고 쓰며 메인과 서브라는 게 그렇다고 변명했다.
골목에서 처음 만났으니 하나는 충족했다. 로켓은 또 뭐냐고 물었더니 원작의 첫 만남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르웰린이 기사로 근무하던 중 루크는 한창 수도에 올라와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능력으로 가문과 황태자의 총애를 뒤에 업고 기사가 된 르웰린과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온 루크. 둘은 우연히 마주치고, 사건에 얽혀든다. 강한 흥미는 사랑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다 르웰린의 소지품이었던 로켓을 루크가 주우며 인연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키워드에 들어가는 게 ‘로켓’인지, ‘소지품’인지, ‘분실물’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나는 혀를 찼다. 황태자는 첫눈에 반하고, 세드릭 클라인은 편지로 낚이더니, 이번에는 분실물이라니. 신데렐라냐? 뭐 유리 구두를 떨어뜨리는 것도 아니고.
기사가 되어 ‘임무’ 중에 있었다는 것도 키워드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일단 그것 외에는 다 채워 두는 게 최종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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