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17)

#67

“베리넌은 어때?”

“안 그래도 그 녀석이 식당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온 거야. 대체 어떻게….”

말을 잇지는 못했지만 뒷말이야 뻔하다. 어떻게 그렇게 얌전하게 굴도록 만들었냐는 거겠지. 블로젯의 찝찝하게 찌푸린 얼굴을 보며 맞은편 의자의 다리를 발끝으로 밀었다. 블로젯은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얘한테도 확실히 선을 그어 둬야 했다. 내가 백년 만년 로베누스에 있을 것도 아니고. 결국 계속 얼굴을 보고 있을 건 얘네인데. 기껏 베리넌이 정신 차리게 만들어 놨는데 이쪽에서 계속 시비를 걸어댄다면 소용이 없었다.

“네가 베리넌과 사이 안 좋은 게, 그 녀석 출생 때문이야?”

블로젯은 내가 대뜸 그렇게 물을 줄은 몰랐는지, 잠깐 놀라다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그것 때문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불쾌함 속에 감춰진 부끄러움을 찾아내며 고민했다. 저 자존심 센 녀석은 자신이 출생만으로 사람을 판가름한다는 것을 지적받는 것이 심히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성격이 좆같은 게 더 문제지.”

때마침 들어온 엘리엇이 이죽거렸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엘리엇은 슬슬 로베누스를 떠나 수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어 온종일 바빴다. 가기 전에 해 놓고 싶은 게 많다는데, 어지간히 일 욕심이 많은 녀석이었다.

엘리엇이라면 베리넌이 사생아였다는, 정확히는 반쪽도 아니라 완전히 평민의 피라는 점에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그 성격이 문제라고 따지고 들었다. 이 부분은 꽤나 의외였다. 신분보다 쓸모가 더 중요하다는 걸까.

“나는 네가 어디서든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미 대부분 알아.”

“확신은 없잖아. 자세히 모르면서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 같이 떠들 뿐이지.”

블로젯은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저번의 그건 실수였어.”

“그러면 사과했어야지.”

당연하지만 집에서 왕자님처럼 자란 녀석에게 그걸 바라는 건 무리였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건 적어도 자신과 같은 격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니까.

“앞으로 하지 않는 건 할 수 있어. 하지만 어째서? 그 녀석 때문에 다쳤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식당에서 일하도록 시키고 있잖아. 그거면 됐어. 출생을 두고 협박하는 건 너무 추잡하잖아.”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알아는 들은 듯했다. 선명한 빨간 머리를 가진 소년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오늘 대련은….”

“아, 오늘은 안 돼. 미안하다.”

일부러 호텔까지 찾아온 블로젯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나는 대신해서 다음에 레오를 참관시키겠다고 달랬다.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엘리엇은 “설마 베리넌을 보러 가는 건 아니겠지?” 하고 물었다. 목소리가 묘하게 날카로웠다. 그는 베리넌이 감자를 깎는 걸 보고 한참 웃어댔으면서도 통 마음을 풀지 못했다. 그만큼 당시 충격이 컸다는 반증이라 할 말은 없었다. 내가 베리넌을 용서하고, 기회를 주기로 했다고 해서 엘리엇도 그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사실 나조차 베리넌에게 꾸준히 관심을 두며 살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걱정은 없다. 레오와 칸딜하스라면 알아서 잘 보고 있겠지. 베리넌의 감시 역은 제임스 셀츠 경이었다. 그 정도라면 정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훌륭하게 상대의 속을 긁어 줄 것이다.

“절대 아니야.”

단호하게 잘라 말했는데도 엘리엇은 통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진짜 아니야. 다른 볼일이 있어서 그래.”

“볼일?”

“친구… 를 좀 만나려고.”

핑계로 꺼낸 단어가 민망해 볼이 근질거렸다. 엘리엇은 블로젯과 마주 보았다. 둘 다 표정이 제법 묘했다. 엘리엇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너, 친구 없잖아.”

*

있다. 친구… 라고 부르기에 민망하며, 사실 친구로도 엮이고 싶지 않은 인물이지만 친구로 정의되어야만 하는 인물이.

엘리엇은 내가 만나러 간다는 ‘친구’가 누구인지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나는 어물거리며 말을 넘겼다. 탐탁지 않은 눈길이 달라붙어도 어쩔 수 없었다.

‘녹스에서 만난 녀석이 있는데, 아. 녹스라는 건 로베누스 뒷골목 중에 제일 안쪽에 있는 위험한 동네야. 괜찮아. 그 녀석은 곧 녹스에서 왕 노릇을 할 거거든. 아무튼 그 녀석과 안면을 튼 김에 친해져 보러 가려고.’ 했다간 엘리엇은 화사하게 웃으며 욕을 쏟을 것이다. 그리고는 당장 레오에게 연락해 버리겠지.

레오가 알았다면 내 안전을 핑계로 방에 가둬 두다시피 할지도 모른다.

내 앞에서는 어리숙하게 굴어 내심 차남을 쉽게 생각하던 옛날이었다면 모를까.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물 같은 수프만 떠먹던 날을 잊기에는 아직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하려나 싶기도 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분명 그렇게까지 할 거다. 한 번 방어 기제가 올라간 전적이 있다면, 두 번은 쉬울 테니까.

어쩌면 이미 사람을 붙여 두었을 수도. 나는 최대한 감각을 집중해 봤지만, 걸리는 건 없었다. 하기야 어린애에게 걸릴 정도로 형편없는 실력이라면 따라다녀 봤자 보호도 제대로 하지 못하겠지.

존재하는지도 모를 미행의 눈치를 보며 대로를 벗어났다. 당장에라도 누군가 나타나 말릴 것 같아 긴장한 것과 달리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없는 건지, 여기까지는 허용 범위라는 건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왕이면 전자인 게 좋겠다. 조금 쪽팔린 장면이 연출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조심스럽게 루크가 데려다준 골목에 도착한 나는 근처를 서성였다. 이번에는 전문가의 조언을 토대로 미리 교환을 위한 빵도 준비했다.

거리 애들은 고소하고 따끈한 냄새가 나는 빵을 보고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옷을 받아 어렵지 않게 골목의 풍경에 어울렸다.

아무리 그래도 입던 옷을 교환한 건 좀 그런가. 나는 팔뚝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저번에는 맡지 못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소매 끝이 낡은 거야 당연했는데, 자세히 볼수록 영 상태가 별로인 것 같았다. 반지와 함께 구매하는 게 나았을지도. 나는 저번의 가게에 들러 다시 구매한 반지로 염색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끝이 어두운 게 다시 봐도 낯설었다.

어차피 금발인 것을 들켰는데 다시 머리 색을 바꾸는 게 민망하긴 했다. 그래도 골목에서 표적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 르웰린의 머리 색은 제법 눈에 튄다. 드러내고 다녔다간 녹스가 아니라고 해도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기다리는 사람은 나오지 않고, 꽂히는 시선만 늘어 갔다. 모자의 챙을 최대한 눌러쓰고, 어깨를 폈다. 소심하게 굴어 봐야 의심만 산다. 이런 거리에서 뭐가 켕기는 듯 굴었다간 소매치기 따위로 오해를 받을지도 모른다.

장소를 옮겨가며 시간을 때우다 해가 기운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에르켈의 말대로 이게 게임도 아니고. 언제나 특정 장소에서 만날 수 있을 리 없지. 오늘은 날이 아닌 듯했다. 이만 포기하고 돌아가야 할 성싶었다.

“조심하라니까.”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이 돌아갔다. 루크가 툭, 가볍게 모자챙을 쳤다.

“오늘도 친구를 잃어버렸어?”

웃음기를 단 눈이 가볍게 휘었다. 영 속내를 알기 힘든 눈을 보며 모자를 건드리지 못하게 손을 잡았다. 오늘은 휘둘릴 수 없었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자 루크도 내 얼굴에 단단히 시선을 고정한 채 나를 찬찬히 살폈다.

“아니.”

“그러면?”

“너를 만나러 왔어.”

루크의 몸은 대부분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고, 드러난 것도 저물어 가는 햇빛을 받아 붉게 보였다. 골목 모든 것이 원래의 색을 잃은 노을 속에서 노란 홍채만이 원래의 색으로 반짝였다. 그것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눈가에는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나를?”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루크는 어디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얼핏 고양잇과 동물처럼 보이는 눈은 내 말의 진위를 파악하듯 가늘어졌다.

“친구를 찾았어. 네 덕에 녹스에서 잘 돌아오기도 했고. 고마워. 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무사히 돌아오기 힘들었을 거야.”

여기까지는 진심이었다. 루크가 내게 흥미를 느껴 도와주지 않았다면, 녹스에 발을 디뎌 보기도 전에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들었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녀석이, 내게 먼저 다가와 호의를 베푸는 이유는 뭘까. 역시 그가 원작의 공 중 하나였기 때문인가?

미약한 기대감이 가능성을 안고 싹텄다.

직접 대면한 루크는 친절했다. 농담으로라도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라고 칭할 타입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아직 키워드를 충족하지도 못했으니 황태자처럼 갑작스럽게 반했다거나 하는 건 아닐 테고. 그의 친절이 대부분 흥미의 영역에 걸쳐져 있다는 건 확실했다. 자기 영역에 들어온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가 발로 건드려 보는 수준 정도.

예시야 귀엽지만, 실상 위험한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애초에 루크는 그걸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위협은 아니었던 탓일까. 그 위험은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지 않았다. 어쩌면 저 흥미와 호의라는 것을 토대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키워드에 대한 가정이 사실이라면, 언젠가는 확인해 봐야 할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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