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17)

#68

황태자의 충격적인 폴링 인 러브 사건 이후 시름시름 앓던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에르켈이었다. 그는 하나의 가설을 내세웠다.

키워드를 이용해 원작에 나온 주요 인물 인물과 원작과 다른 관계성을 구축할 수 있을까?

황태자가 원래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래 봤자 동생 친구, 호위 기사의 동생, 거슬리는 애새끼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호감은커녕, 반감에 가까운 경계심을 가진 건 나뿐 아니었다. 황태자의 경우 거의 밑바닥에 깔려 있던 감정이 원작에 들어서며 강제적으로 솟구쳤다. 갑작스럽게 솟아난 애정에 본인도 당황할 정도로. 당시 나는 원작이라는 거대하고 절대적인 존재가 운명처럼 앞을 가로막은 기분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그토록 절대적이라는 원작은 나와 에르켈에게 교묘한 틈을 허락했다. 원작과 달리 나는 아카데미에 가지 않았고, 에르켈이 대신 갔으며, 그레도르의 일기도 빼돌렸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 제일 중요하게 작용되는, 주요 캐릭터와의 감정은?

황태자처럼 극단적으로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바뀌는 게 아니라, 키워드 달성 직전까지 일정 이상의 친밀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건 원작의 허락하에 색이 다른 감정으로 변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에르켈이 말하는 것 중 태반을 못 알아들을 뻔했다. 개념을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 물음표를 몇 개나 남겼다.

뻣뻣하게 굳은 머리를 굴려 얻은 결론은,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원작이 고무줄 같다는 거다. 많이 당기면 많이 튕겨 나가고, 살짝 건드는 정도로는 반동이 적다. 확실히 작가는 작가라는 건지. 나로서는 떠올릴 수 없는 시각이었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루크가 필요했다.

황태자야 이미 원작이 시작됐으니 패스. 세드릭 클라인은, 그 새끼는 괘씸해서 제치고. 카르윈 디멘시온이 한창 얼어붙은 성에서 검을 열심히 휘두르고 있을 북부는 멀었다. 레오가 이곳으로 발령이 났다고 한들 나를 데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건 한 사람뿐이다.

“흠….”

그게 전부냐는 듯 루크는 내가 붙잡은 것을 무시하고 챙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어느 정도는 힘을 주고 있었는데 소용이 없었다. 자존심이 상해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나이 차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달래 봤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한 차이다. 블로젯과의 대련을 통해 나도 제법 쓸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마음먹은 대로 ‘적당히 강해지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이번에도 실감했다. 사태의 변환을 위해 보내 둔 편지를 떠올리며 나는 애써 뻔뻔하게 굴었다.

“나한테 흥미가 생겼다며.”

“그래, 그랬지.”

“이왕 생긴 거. 좀 더 이어 가 볼 생각 있어?”

그 말에 루크는 아주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못해도 내가 베리넌을 죽이겠다고 장담하던 때만큼은 웃은 것 같다.

“나랑 친해지고 싶어?”

“뭐… 연줄이야 많으면 좋잖아. 너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 많을 거 아냐. 그리고 나도, 너한테, 흥미가 있어서.”

찝찝하고 거북한 기분에 마지막은 거의 억지로 뱉어냈다. 거짓말인 게 티가 났을 것이다. 의외로 루크는 흔쾌히 말했다.

“좋아, 린. 네가 마음에 드니까.”

루크는 갸름해진 눈으로 품평이라도 하듯 나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덧붙였다.

“오늘은 바빠서 어울려줄 수 없으니 돌아가고, 이틀 후에 보자. 세 번째 골목에 있는 식료품점 알아?”

다행히 기억에 있는 곳이었다.

“간판만 새로 단 가게?”

“그곳에 있으면 찾아올게.”

세 번째 골목 정도면 녹스보다는 중앙 거리가 가까운 곳. 달라붙는 시선을 피해 계속 자리를 옮기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모자에 집착하듯 만지작거리는 손등을 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엘리엇은 곧 돌아갔다. 직전까지 붙들고 있던 장부는 결국 내려놓지 못한 채였다.

동부행 열차를 탈 때까지만 해도 여행 생각에 엉덩이를 들썩거리더니. 습관이란 무서운 것인지 그는 영 일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직접 거리를 발로 뛰며 가게마다 물건을 비교하고, 가격을 확인했다.

입으로만 놀고 싶다고 한탄할 뿐, 몸은 할 일이 없으면 만들어낼 기세였다. 미래 제국 상권의 큰 기둥이 될 그를 보며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던 또래 대부분이 아카데미로 떠나자 자연스럽게 엘리엇과 내 생활을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게으르게 사는 건 절대 아니고, 쟤가 너무 열심히 사는 거지만. 이런 게 주변에 전교 1등을 둔 학생의 비애인가.

나는 그 1등과 나를 비교하는 사람이 근처에 없다는 것에 감사하며 그와 역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하려던 일은 잘됐냐.’

엘리엇은 열차에 타며 툭 던지듯 말했다. 짙은 감색 코트가 날렵하게 어울리는 엘리엇은 창백한 뺨과 대비되는 검은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넘긴 상태였는데, 어른스러운 옷차림에 특유의 싸늘한 무표정이 더해지자 어린애라고 부르기 어려워 보였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쟤는 정말 배우를 했어도 잘 어울렸을 텐데. 이번에 보니 연기력도 제법이었고.

‘아마도.’

우수에 찬 영화 주인공 같은 분위기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는 엘리엇 덕에 깨졌지만.

‘아마도? 내가 카일 베리넌과 어울리면서까지 그렇게 고생했는데, 아마도?’

한참 억누른 울분이 튀어나온 듯 잠깐 표정 관리에 실패한 엘리엇이 사납게 말하다 아차 싶었는지 급하게 스스로를 추슬렀다. 시근덕거리는 호흡은 아직 진정되지 않았지만. 나는 아차 싶어 급하게 이전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아냐. 다 잘됐어. 완전 잘됐어.’

엘리엇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나는 심통이 난 녀석을 어떻게 달랠까 생각하다, 원작자 공인 정보를 조금 흘리기로 했다.

‘조만간 아카데미에서 개인 휴대가 가능한 연락 수단이 발표될 거야.’

‘연락 수단?’

백발의 노인이 돼서야 후보로 오를까 말까 한 마탑주 자리를 이제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놈이 꿰찼다는 것부터 심상치 않더니. 세드릭 클라인이 천재는 천재였다. 나는 아니꼬운 마음에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원작에서 그레도르의 편지를 얻은 그는 단점을 보완하고, 기능을 덧붙여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낸다. 회중시계 형태로 만들어진 그것의 기능은 간단한 메시지를 보내는 정도에 그쳤지만, 제국에는 대단히 파격적인 거였다.

한 줄짜리 문자만 보낼 수 있다고 해도 있는 게 어디인가. 한 번 이런 게 등장하면 다음에는 더 좋은 게, 그다음에는 더 새로운 게 나올 것이다.

아마 르웰린이 성인이 될 즈음에는 마법사가 직접 충전해야 하는 초기 모델을 출시하고, 2, 3년 안에 마법석을 사용하는 것으로 개량하게 될 거라고. 확신에 찬 에르켈을 보며 나는 솔직히, 조금 답답했다. 얘는 왜 주요 스토리는 얄팍하게 기억하면서 이런 부수적인 것만….

아직도 황태자가 왜 그 가면을 쓰고 수도를 돌아다녔는지 감도 잡지 못한 상태인데 아무리 돈이 되는 정보를 들어 봤자 달가울 리가 없었다. 그래도 차마 내색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앓았다. 사실 나보다 더 답답한 건 열일곱이 되면 죽을지도 모르는 에르켈일 테니까.

아무튼, 에르켈은 그 연락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나도 동의했다. 일기장은 세드릭 클라인의 손에 들어가야만 한다.

몇 번이나 루트를 확인한 후 아카데미로 내가 가지고 있던 일기장을 보내면서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혹시나 누가 열어 본다면, 그래서 일기장의 비밀을 알아챈다면 어떻게 될지 걱정돼 잠도 설쳤다.

로베누스가 수도에 비해 아카데미와 가까운 것이 다행이었다. 선물을 잘 받았다는 답장은 빠르게 왔다. 에르켈은 그레도르의 일기장 하나를 세드릭이 ‘우연히’ 발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일단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분명히 흥미를 드러낼 테고, 그걸 하나하나 분석해 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거라는 말에 ‘그러다 우리가 나눈 대화까지 털리면 어떻게 하려고.’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에르켈은 그 부분도 염두에 두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게 그렇게 용량이 큰 물건이 아니라서. 세드릭 손에 넘기기 전에 작업해 둘 테니까 걱정 마.]

몇 번이나 확신하는 에르켈을 보며 나도 불안을 눌렀다.

‘어떤 형태로 나올지는 몰라도, 학생 출품작에 관심 가져 봐.’

원작이 조금 틀어지기는 했으니 이번에도 회중시계로 제작될지는 모르겠다. 이 정도만 던져도 엘리엇은 충분히 세드릭 클라인의 아이디어를 찾아내 투자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잘만 하면 동부 열차 때보다 훨씬 큰돈을 만질 수 있을 테고. 이 정도면 값은 확실히 치르겠지.

엘리엇은 입꼬리를 꾹 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수도로 돌아갔으니, 이제 호텔에서 보내던 자유 시간은 끝났다.

나는 레오와 함께 그가 봐 둔 저택으로 들어갔다. 블로젯 저택과 가까워 세스 블로젯이 기꺼워했다. 그는 나를 제법 친밀한 친구쯤으로 여기며 대했고, 때때로 베리넌도 함께였다. 독기가 많이 빠졌다고 해도 베리넌은 여전히 무리와 자연스럽게 어울리지는 못했지만, 나는 억지로라도 그에게 말을 거는 편이었다.

민망하지만 블로젯 무리 중에서 내 영향력은 괜찮은 편이었고, 어린 사내놈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큰 녀석과 친하다는 건 내부 계급에서 마찬가지로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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