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나는 종종 블로젯과 함께 수업을 들었고, 그의 삼촌과도 제법 친해졌다. 처음에 레오에게 시비를 건 일로 첫인상이 영 별로였던 제크 블로젯은 생각보다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레오의 실력을 인정한다며, 그때는 자신이 순간의 치기를 이기지 못했다고 사과했다는 점에도 가산점을 주었다. 인정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레오가 쿨하게 넘어갔으니 내가 그걸 붙들고 날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가끔은 이대로 로베누스에 붙어 있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겠다 싶을 정도로. 하지만 나는 이게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에드워드 스펠먼에게 보낸 편지에 답장이 올 때가 됐다. 나는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스펠먼에게 하드 트레이닝을 요청했다. 한창 수업을 들을 때는 오히려 기대가 없었지만, 따로 찾아와 계속 도와주겠다고 한 걸 보면 거절하지 않을 거 같았다.
스펠먼에게 ‘과격한 훈련’이라고 하면 그 기준이 남들과는 다르다. 스펠먼가는 디멘시온 못지않게 유명한 검술 명가였고, 내부 교육 과정도 남달랐다.
남들은 그 교육을 받기 위해 몇 년을 훈련생으로 보내거나, 대단히 어려운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가주를 스승으로 둔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했다. 짐작하는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범인의 재능으로 스펠먼의 기준에 맞추려면 정말 토가 나올 정도로 검을 휘둘러야 할 거다.
예정된 개고생에 눈물이 흐를 것 같다. 얼핏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었던 거다.
나라고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민 끝의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태양제와 녹스. 두 번 다 나는 철저하게 무력에서 밀렸다. 전쟁터도 아니고 뒷골목이었다. 다수라고 해 봐야 전문적으로 싸우는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이름 높은 검사도 아니었다.
그나마 녹스는 좀 더 험한 곳이라지만, 패배감은 이번이 더 짙었다. 힘이 전부인 세계에서, 힘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떨었다.
이 자괴감은 원작이 진행될수록 커질 것이다. 원작의 강제성 속에서 개인이 발로 뛴다고 바꿀 수 있는 건 많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안주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발만 동동 구르며 누군가에게 매달릴 거였다면, 이렇게 힘들게 살 필요도 없다.
원작의 갈등은 대부분 르웰린과 황태자가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를 선택, 정말 거지 같은 일이지만 아무튼 황태자 놈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고분고분하게 그의 연인이 된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그러나 나는 기꺼이 그 안전한 세계를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위험을 감수하기로 해놓고 어정쩡하게 편한 생활을 택할 수는 없었다. 돈 많은 백수, 하는 것 없는 월급 도둑의 꿈은 접어 두기로 했다.
재능이 부족하면 열정, 열정으로도 안 되면 노력, 그래도 안 되면 악을 써서라도 올라가야 한다. 적어도 스스로의 부족함을 탓하며 좌절하지 않을 정도로.
굳게 결심을 다잡는 나를 현실로 일깨운 건 나른한 목소리였다.
“입에 안 맞는 모양인데?”
목소리의 주인은 금색 눈을 휘며 웃고 있었다. 계속 제대로 답해 주지 않길래 대화할 생각도 없나 보다 했더니. 나는 한창 생각에 빠져 오래 씹고 있던 과일을 꿀꺽 삼켰다. 겉에 설탕을 묻혀 살짝 졸인 것은 끔찍하게 달았다. 질이 떨어지는 과일이라 평소 입에 넣던 디저트처럼 풍부한 맛을 내지도 못했다.
“아니. 맛있어.”
루크는 턱을 괸 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신분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머리 색도 봤고, 그날 내가 어느 방향으로 돌아가는지도 확인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는 평민인 척 옷을 갈아입고 찾아오는 나를 지적하지 않았고, 나도 내가 귀족임을 그가 안다는 걸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저쪽에서 모른 척해 주겠다는데 내가 그걸 들출 필요는 없으니까.
무엇보다….
나는 루크의 얼굴을 확인하며 졸인 과일을 조금 더 베어 물었다. 오늘 그는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평소 같지는 않았다. 화가 난 게 분명한데 그걸 얄팍한 평정으로 덮어 두니 보는 입장에서는 더 불안할 뿐이다.
감추자 마음먹으면 제대로 감출 수 있으면서. 한 번씩 웃음기 가신 얼굴을 내비칠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일부러 저러는 게 뻔했다. 물론 기분이 더러운 거야 이해는 하지만. 나는 루크의 눈 아래부터 턱 근처까지 길게 남아 있는 자상을 보며 불만을 삼켰다. 그나마 조금 아문 것일 텐데도 핏기가 보이는 상처는 손을 대기도 힘들 만큼 아파 보였다.
루크는 며칠이나 사라졌었다.
원래 만나기로 했던 날 그가 나타나지 않아 바람을 맞고, 그 뒤로도 두 번이나 헛걸음을 했다. 처음에는 잔뜩 성질이 났고, 그다음은 혹시 이 새끼가 나한테 질렸나 싶었다. 짧은 흥미가 식어 이러는 거라면 어떡하지 고민했을 뿐, 설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보통 사람은 들어가지도 못하는 거리를 제집 앞마당처럼 거닐며 덩치가 몇 배나 차이 나는 성인도 이겨 먹는 루크를 확인했으니까. 그러니 며칠 만에 나타난 루크의 얼굴을 확인한 내가 얼이 빠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간 큰 놈이…. 당장 눈에 보이는 상처에 너무 충격을 받아 얼굴이 저 지경이면 다른 곳에도 상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옷 아래 몸 상태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가 몸부림도 없이 얼굴을 내줬을 리는 없다. 그쯤 되자 녹스의 처참한 꼴이 떠오른 건 당연했다. 치료는 고사하고 소독이나 제대로 했을지 모르겠다. 끔찍한 위생 상태는 없던 병도 만들어낼 것 같았다.
당장 병원부터 가자는 외침을 애써 누르고 약이라도 제대로 발라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자 그는 답하지 않고 슬쩍 웃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미소에 내가 끌고 가려 해도 응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찝찝함은 남았지만 네 몸이지, 내 몸이냐 싶어 더는 설득하는 걸 관뒀다. 다치기는 했어도 일어나지 못할 만큼 중상도 아니고. 내가 오지랖 부리지 않아도 그의 처리는 충분히 깔끔했을 것이다. 루크가 이렇게 밖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하다는 것은 곧 상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았다.
“너는 왜 안 먹고?”
처음 샀을 때에 비해서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그의 것을 지적하자 루크는 꼬치를 허공에 휘젓다가 대충 던졌다. 붉고 푸른 과일들은 바닥에 뒹굴었다. 금방이라도 벌레가 꼬일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내 입에는 안 맞아서.”
그 한마디에 설탕 시럽이 손과 입에 묻어나도록 열심히 먹고 있던 내 꼴이 우스워졌다. 나는 반도 남지 않은 꼬치를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루크는 내 입 근처에 남은 시럽을 손가락으로 훔쳐 가서 자신의 엄지와 검지로 문질렀다. 끈적한 시럽이 접착제처럼 묻어났다.
“너무 달잖아. 끈적거리고.”
애초에 입에 넣을 생각이 없었다는 듯한 말에 울컥해져서 말했다.
“그걸 먹어야겠다고 고른 건 너잖아.”
“네가 먹는 건 보고 싶어서.”
말투는 담담한데 곱씹으면 내용이 좀 아찔했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기 위해 주춤거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혹시 얘도? 나는 루크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황태자처럼 나를 무슨, 커스터드 크림이 채워진 슈처럼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나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 정도면 위험한 수위는 아니다.
“오늘은 다른 곳에 가 보자.”
루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평소에는 잠깐 대화나 좀 나누다 말더니. 다치고 오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모양이다.
나는 아직 밝은 하늘을 보며 군소리 없이 그를 따라갔다. 휘청거릴 정도로 빠른 걸음도, 적응하자 아주 따라가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
루크는 곧장 세 번째 골목을 가로질렀다. 나와 엘리엇이 베리넌을 따라 움직일 때는 우리를 붙잡지 못해 안달이더니. 상인들은 루크를 보고 호객 행위를 하기는커녕 그가 보이지 않는 척했다. 가게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걷다 가게 뒤편, 담벼락이 이어진 곳에서 멈췄다. 근처에 향수 가게가 몰려 있어 코가 아팠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루크에 비해 너무 예민해 보일까 봐 소매로 코를 막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위아래로 훑은 그가 옆에 있던 상자를 벽에 바짝 붙였다.
“부서질 수도 있으니까 너무 힘주면 안 돼.”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본인은 상자를 딛지도 않고 담을 가볍게 올랐다. 성인 남자보다 조금 낮은 듯 보이는 담은 그렇게 넘기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훌쩍 가볍게 올라가는 루크를 보자 더 그랬다.
나는 상자 없이도 올라갈 수 있다고 할까, 하다가 그냥 얌전히 상자를 밟았다. 괜히 자존심을 세운답시고 도전했다 실패한다면, 그게 훨씬 타격이 클 것이다.
처음에는 과일을 담았을 상자는 지저분하게 도장이 찍혀 너저분해 보였다. 여러 번 용도를 바꿔 가며 재활용되다 이런 곳에 버려질 만큼 낡은 상자는 살짝 발을 올리는 것만으로 윗부분이 꺾일 듯 소리가 나기는 했다. 아직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는 탓인지 부서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가뿐하게 담 위로 올라가자 이번에는 담벼락 위를 가로질러 걸었다. 그렇게 폭이 넓지 않은 곳을 거침없이 밟고 지나가는 모습은 심지어 우아해 보일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