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담을 지나자 경사가 완만하게 늘어진 천막이 나왔다. 이걸 건너자고? 낡은 천막은 곳곳이 해져 과연 이게 내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루크는 잘 보라는 듯 천천히 발을 디디더니, 어렵지 않게 건너편 지붕에 도착했다. 나는 입술 안쪽을 잠깐 깨물고는, 그를 따라서 천 아래에 기둥을 덧댄 부분을 밟고 올라갔다.
“잘하는데.”
칭찬이라도 하듯 달라붙는 미소에 뺨이 근질거렸다.
“어린애 취급하지 마.”
목소리는 제법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자기를 어리게 보지 말라고 따지고 드는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비웃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루크의 웃음이 더 짙어지는 걸 보자 한층 더 심기가 상했다.
“알겠어.”
그 뒤로도 지붕 몇 개를 더 넘었다. 체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이러나 싶기는 했다. 루크는 가끔 틈을 훌쩍 뛰어넘고, 가끔은 내 팔을 잡아 이끌며 부지런히 걸었다.
“대체 뭘 하러 가는 거야?”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최근 들어 깨달은 건데, 루크의 성격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좋을 거라고 기대한 적도 없기는 하지만, 예상보다 더했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골라서 대답하는 점이었다.
속으로 그러니까 네가 메인이 못 된 거라고 혀를 차다가, 정작 메인이 된 황태자의 성격도 만만치 않다는 걸 떠올렸다. 아니, 그쪽이 더했지. 나는 명제를 고쳤다. 메인이라는 건 인성에 반비례하고 권력에 비례하는 감투일지도 모른다. 남자끼리라고는 해도 로맨스 장르인데 로맨틱한 놈이 지는 거라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멈춰 서서 더위에 거칠어져 가는 숨을 고르고 짜증스럽게 땀을 훔쳤다.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칠까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또 어딘가를 짚고 올라가야 할 때 짐이 될 게 뻔했다.
“거의 다 왔어.”
루크는 그제야 나를 살살 달랬다. 거의 다 왔다는 말만큼 신뢰도가 하락하는 것도 없는데.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말과 얼굴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벌어진 거리를 좁혔다. 여기까지 온 거, 기꺼이 속아 주는 게 나았다.
*
아주 놀랍게도, 당연히 거짓말 같던 그 말은 진짜였다.
루크는 얼마 가지 않아 도착을 알렸다. 지붕과 천막, 담을 몇 개나 건너 도착한 곳은 종탑이었는데,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된 듯 거대한 종은 잔뜩 녹이 슬어 있었다. 탑 옆에 있는 건물 지붕 아래로는 기둥이 몇 개 늘어져 있었다. 필요할 때 천을 매달아 광고판처럼 사용하는 용도였다.
제일 위쪽에 있는 봉은 그나마 튼튼해 보였지만, 정말 그나마였다. 폭이 좁고 높아 사람이 건너가는 용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어디 하나 부러지는 건 확실했다. 끝을 단단하게 묶어 고정해 두기는 했는데, 썩 믿음스럽지 않았다.
이걸 건너겠다니. 진심인가?
나는 이쯤에서 루크가 ‘놀랐어? 설마 저기로 가려고.’ 하고 나를 골려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말없이 앞장섰다. 루크가 발을 디딜 때마다 봉이 탄력적으로 흔들렸다.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니 어련히 잘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그가 떨어질까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기둥의 3분의 1 정도를 지나갔을 즈음. 루크는 탑에 가장 가깝게 붙어 있는 기둥의 튀어나와 있는 장식을 잡고 올라갔다. 단단한 철 장식이 툭 튀어나와 있는 데다, 외벽이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아 딛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볍게 뛰어 아치형으로 열린 기둥 사이로 들어간 루크가 내 쪽을 보며 바닥에 앉았다.
“손이라도 뻗어 줄까?”
나는 대답하는 대신 기둥을 밟았다. 제법 아찔한 높이라 아래를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꾸 신경이 아래로 쏠렸다. 숨을 가다듬고 집중했다. 그렇게 어려운 난이도도 아니다. 차라리 블로젯과 진검을 들고 싸우는 게 훨씬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다.
기둥을 지나서 탑의 장식을 붙잡기만 하면 그걸 타고 올라가는 건 쉬웠다. 내밀어진 손을 무시한 채 몸을 완전히 안쪽으로 들이자 루크가 기꺼이 하나뿐인 쿠션을 양보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착한 곳은 종이 있는 곳의 바로 아래층이었는데, 루크가 자주 들르는 곳인지 곳곳에 생활감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넓은 건 아니지만 천장이 높고 사방이 트여 답답하지 않았다. 아치형의 기둥 사이가 휑하게 뚫려 있어 어느새 붉어지고 있는 구름의 색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느새 나는 가만히 바람을 맞으며 평소와는 다른 풍경을 바라보았다. 탑은 객관적으로 대단히 높은 건물은 아니었던 터라 로베누스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중앙 거리 정도는 엿볼 수 있었다.
한 겹, 한 겹을 벗어날 때마다 풍경이 다르다는 장미의 도시. 중앙, 즉 내부는 그 화려함을 뽐내고 있고, 겉은 생명력을 잃은 듯 검게 시들어 있었다. 멀리서 흐르는 개천은 고요해 그 너머에 무법지대가 있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웠다.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자 뒤늦게 레오 생각이 났다. 퇴근 전에는 돌아가야 할 텐데. 한창 낮이 긴 시점을 넘긴 후라서 저녁은 짧았다. 금세 밤이 될 텐데, 오늘 이런 깜짝 이벤트가 있는 줄 알았으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 둘 걸 싶었다.
걱정스럽게 밖을 바라보자 무언가 불쑥 시야를 침범했다. 반이 쪼개진 사과를 건넨 루크는 내가 걱정하는 게 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늦지 않을 거야.”
“뭘 할 건데?”
“마실 건 없는데.”
누가 얘한테 대화하는 법을 알려 줬으면. 분명 두 사람이 있는데, 한쪽이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하자 대화가 성립되지 않았다.
나는 과육이 드러난 사과를 씹으며 눈을 갸름하게 떴다. 사과는 풋내가 감돌았지만,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주머니가 홀쭉했는데, 이건 어디에서 나온 걸까.
“훔쳤어?”
탑은 아무리 봐도 주거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기껏 해 봤자 아지트 정도. 용도를 짐작하기 힘든 천 뭉치나 굴러다니는 곳에서 과일을 장기 보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묻자 루크는 순순히 대답했다.
“응.”
그 당당함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이미 잇자국이 난 사과를 찝찝하게 바라보다, 마저 씹었다. 이미 상품 가치가 떨어진 걸 버려 봤자 뭐 하겠나 싶었다.
“오늘 공연이 있거든.”
루크는 이제 와서야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를 설명했다.
“공연?”
내가 되묻자 그가 내 뒤쪽으로 몸을 붙이며 한쪽을 가리켰다. 높은 곳이 아니면 단번에 찾을 수 없었을 골목 어딘가, 꽤 널찍한 공터가 보였다.
“이름 없는 음악가와 멍텅구리 무희.”
“그게 뭐야?”
“명성을 얻지 못하고 내몰린 예술가들이 공연하는 걸 그렇게 불러. 먹고살 돈도 없으면서 예술이란 걸 버리지 못하는 게 멍청해 보인다고.”
자연스럽게 어깨 위로 올라오는 팔을 쳐냈다. 그는 두 번은 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루크가 내게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니만큼, 꽤 괜찮은 공연이었는지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나는 선을 긋는 대신 줄을 길게 늘여 만든 간이 무대 위에서 공연을 시작하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와 늙은 첼리스트를 보며 그가 왜 이 탑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푸석한 얼굴만 봐도 느껴지는 가난과 달리 관리가 잘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젊은이의 얼굴에는 생기가 깃들었고, 꽤나 조악한 옷을 입은 첼리스트의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이 떨렸다. 공연을 즐기는 사람 중에는 무희가 있었는지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곧 악기를 든 사람들이 멋대로 공연에 난입해 음을 맞췄다.
공연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했지만, 확실히 흥겨웠다. 로베누스에서 제일 큰 공연장인 새벽 나무 홀에 간다고 해도 느낄 수 없을 생동감이었다. 저명한 음악가들이 영혼을 담아 만들어내는 음악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저 삭막한 골목에 활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만 봐도 대단했다.
나도 모르게 발끝을 까딱거리며 음을 타자 놓치지 않고 팔이 다시 어깨로 올라왔다.
왜 자꾸 가만히 있는 사람의 모자를 건드리고, 어깨를 짓누르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어깨동무 정도면 평범한 친근감의 표현이라 볼 수도 있지만, 글쎄. 루크는 평범하게 친근감을 드러내는 유형은 아닌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얌전히 치워 줄 생각이 없는지 밀리지 않았다. 원래도 제법 묵직한 무게인데, 내가 크게 반응하지 않자 루크는 일부러 무게를 쏟기 시작했다. 이러다 허리가 접히겠다 싶었다. 이 새끼는 또 왜 이래. 공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뭐야.”
급하게 손을 들어 막지 않았으면 또 입술을 내줄 뻔했다. 한 번은 방심이라지만, 두 번은 변명도 어렵다. 루크는 입이 막힌 채 눈만 접어 웃었다. 가늘어지는 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곧 손바닥에 축축한 것이 닿자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졌다.
흐악, 저도 모르게 소리 높여 비명을 내질렀다. 기겁하며 손바닥을 치우려고 하자 루크가 내 손목을 붙들어 손바닥에 코끝과 입술을 바짝 붙이며 말했다. 나는 애써 방금 전 손바닥에 질척하게 닿은 게 그의 혀가 아니라 입술과 호흡일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 쪽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혀 쪽이 조금 더 데미지가 컸다.
“네가 자꾸 다른 데 신경을 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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