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17)

#72

“녹스 쪽으로는 안 가잖아.”

만약 그가 나를 끌고 녹스로 향했다면 거절했겠지. 저번이야 엘리엇 때문에 워낙 상황이 급했다지만, 두 번 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었다. 적어도 루크만 믿고 따라가기에 그곳은 너무 위험했다.

루크는 분명 강하다. 치열한 녹스의 서열구도에서 상위에 들 정도로. 하지만 그게 압도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본인의 몸이 다치는 상황이라면 내게 신경을 써 줄 리 없다.

하지만 그 외 골목 정도야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가도 되는 곳과 가면 안 되는 곳에 대한 파악은 베리넌과 함께 쏘다닐 때 이미 끝났다. 무엇보다 녹스가 아닌 골목에서는 루크의 존재 자체로 프리 패스였다.

루크는 가볍게 코웃음 치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위험한 게 녹스 하나일까 봐?”

그의 말은 꼭 그가 내 안전을 대단히 생각하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들렸다. 이번에는 나도 그를 따라 후,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루아침에 거리가 위험해지기라도 했어?”

“거리 말고.”

루크가 한 발자국 다가온 것만으로 거리가 성큼 좁혀졌다. 꽤 차이나는 덩치가 가깝게 붙자 제법 위압감이 들었다.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손끝이 뺨에 닿았다. 그가 얼굴을 기울이자 높이가 다른 이마가 마주쳤다.

“나를 말한 건데.”

낮은 목소리에 한참을 입술만 달싹거렸다. 루크는 그런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고 있기 힘들어 시선을 내렸다. 그래 봤자 가깝게 붙은 가슴이 보였다.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뒤로 물러났다.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 흙이 밀려났다.

갑자기 왜 목소리를 쫙 깔고 그러냐고 타박하며 웃어넘기고 싶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자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다정함을 가장하며 웃고 있기는 했지만 그 안의 날카로움이 숨겨지지 않고 드러나 틈 없이 견고해 보였다.

루크는 천천히 이마를 떼고 이번에는 갈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감각이 있을리 없는 곳인데, 지나치게 곤두선 신경 탓인지 손의 감촉이 느껴진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사실 잘 모르겠어서.”

“…….”

“너는 나한테서 얻을 수 있는 게 없잖아.”

“나는….”

느닷없는 말에 허를 찔린 것 같았다.

친해지고 싶어서, 이 골목에서는 너와의 친분이 쓸 만해서. 당장 떠오르는 말들은 그가 내 신분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꺼내기에 웃긴 것뿐이었다.

일부러 이러는 것은 확실했다. 내가 할 말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내내 들추지 않더니, 갑자기 웬 심술인지 알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처음 꺼낸 핑계를 뻔뻔하게 들이밀려 했지만, 루크는 딱히 내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닌지 말을 잘랐다.

“자기 꼴도 모르고 아무 데나 기웃거리기나 하고.”

일부러 성질을 돋우려고 고른 단어에 고스란히 반응하는 것도 웃기다. 나는 네가 말한 꼴이 뭐냐고 물으려던 걸 억눌렀다.

“앞으로 오지 마.”

“뭐?”

그러나 기껏 노력한 건 곧 소용없어졌다. 예상치 못한 말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분간은 안 된다는 거에서 갑자기 오지 말라는 것까지 훅 뛰어넘는 전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싶은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루크는 농담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또 들어와 있는 걸 발견하면 그때는.”

그때는?

침만 꼴딱 삼키고 있자 그가 중요한 비밀을 말해 주듯 귓가로 얼굴을 숙였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나 기다렸지만, 찾아온 것은 나긋한 속삭임이 아니라 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었다.

“아…!”

이, 개자식아. 비명처럼 욕이 튀어나왔다. 고통에 눈물이 핑 돌았다.

루크는 남의 귀를 깨물어 놓고 뭐가 즐거운지 웃고 있었다. 그러나 창백한 빛을 받아 드러난 미소는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짜증스럽게 귀를 부여잡고 다른 손을 뻗어 거리를 벌렸다. 그렇다고 해도 가까이 다가오려면 얼마든 하겠지만. 다행히 루크는 나를 제압하고 붙어 오지는 않았다.

연신 그와의 거리를 확인하며 심장을 졸였다.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틈을 찾기 힘들었다. 내가 검을 들고 맨손인 그에게 덤빈다고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버티기나 하면 다행이다.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전투력 차이를 계산했는데, 곱씹을수록 착잡해졌다. 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스펠먼을 찾은 거긴 하지만. 과연 좁힐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제국 최고의 검사라는 대공까지는 아니어도, 다른 놈들은 이겨 볼 생각을 했는데.

그렇다고 마탑주가 되는 세드릭 클라인을 이길 거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 결국 남는 건 황태자 정도인가. 하지만 권력에서 차이나는 놈을 무력으로 넘긴다고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얻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후회하지 말고.”

너를 위협하는 것 따위는 손쉽다는 태도에 입술을 잘근 씹었다. 오만하게 보이는 자신감에 근거가 있다는 점이 제일 자존심 상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오란다고 따라오는 것도 그렇고. 똑똑한 척 굴기는 하는데 멍청해. 그게 귀엽기는 한데.”

말을 들을수록 그의 의향을 종잡기 어려웠다. 일단 루크가 내게 흥미를 느낀다는 것까지는 알겠다. 애늙은이처럼 굴다가, 위협에는 또 곧잘 쪼는 내 모습이 우스운 것도 이해한다.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렇다면 왜 흥미로운 걸 밀어내냐는 것이었다.

에르켈은 분명 그가 흥미와 짧은 쾌락을 즐기는 성격이라고 했다. 아직 어려 원작의 성격과 다를 수는 있다고 해도, 없던 본성이 갑자기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루크는 내 심란한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무슨 말을 해 주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냥, 이러는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야.”

“내가 무슨 이유에서 그러든, 너를 납득시켜야 하는 이유가 있어?”

이러면 또 할 말이 없어진다. 입꼬리라도 올리며 유지하던 미소가 사라지자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루크는 내게서 시선을 뗐다. 골목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고 비딱하게 선 그는 지금의 상황이 대단히 따분하다는 듯 심드렁해 보였다.

“별 이유 없이 그런다고 해도 네가 어쩔 수는 없잖아. 만약 내가, 폭력을 휘두르든, 강간을 하든, 죽이든. 반항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아까 그가 말하다 말았던 ‘그때는’의 뒷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감을 잡지 못하자 그는 친절하게 예시까지 들어준 것이다.

진심인가? 아니면…. 일부러 골랐을 폭력적인 단어들 속에서 진심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담담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당장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큰 거리낌 없이 방금 나열한 것들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떠올렸다.

무려 에르켈이, 넷 중 으뜸이라 칭한 쓰레기였다. 황태자처럼 갑자기 돌변해 나를 죽이려 든대도 놀라운 일은 아닌 것이다.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당장 몸을 돌려 앞으로는 보지 말자고 외치고 싶었지만, 앞으로 몇 년은 얼굴을 보기 힘들 거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확실히, 지금 힘들다고 놔 버리면 나중에는 더하겠지. 하지만 그나마 곱게 말로 할 때 그만둬야 한다는 유혹이 컸다.

내가 고민하고 있자 루크는 내가 결론을 내리길 도와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성큼 다가왔다. 그만큼 물러나려다 보니 등에 벽이 닿았다.

“이것 봐. 지금도 내가 봐주지 않으면 네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떨어져.”

“겁을 먹었으면 얌전히 네 세계로 돌아가서 틀어박히라는 말이 많이 어려워?”

“하지 말라고!”

뺨을 건드리다 목으로 내려오는 손에 놀라 거칠게 떼어냈다. 격한 반응에 놀랐는지 공중에 뜬 손을 바라보던 루크는 한쪽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언제나 여유로워 보이던 얼굴이 사납게 느껴졌다.

로베누스에 온 뒤 적응하느라 바빠서였는지, 황태자와 물리적으로 멀어졌다는 안도감 탓인지 악몽을 꿀 일이 없었는데. 어두운 골목과 저항하기 힘든 체격 차이가 황태자와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숨을 헐떡이자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손이 또 다가왔다.

“손대지 마.”

개새끼야. 욕은 속으로 웅얼거렸는지, 밖으로 내뱉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야가 어지러워서 바닥이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제대로 서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연신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루크는 그런 내 몸을 끌어 안 듯 다가왔다. 벽과 루크의 품 사이에서 몸이 의지와 다르게 떨렸다. 심장이 뛰어 구역질과 함께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곧 다가올 무언가를 생각하다 차라리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쪽을 택했다.

내가 목을 조르는 것에 크게 반응하는 것을 알았을 텐데. 예상과 달리 그가 닿은 곳은 목이 아니라 이마였다. 머리칼 위에 가만히 입을 맞추고 떨어지는 감각에 눈을 뜨자 루크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기회는 여러 번 없어, 린.”

나는 답하지 못했다. 무릎이 멋대로 후들거려 벽에 바짝 붙었다. 조금 늦게서야 꼴사납게 주저앉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크는 천천히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났다. 흐릿하게 보이던 윤곽도 곧 완전한 어둠 속에 가라앉는다. 뚜렷한 경계 속에 갈라진 둘 사이에 나직한 경고가 떨어졌다.

“네 말대로 나는 빌어먹을 개새끼라, 화가 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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