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17)

#75

규격보다 반 뼘쯤 긴 상대의 검이 위로 매섭게 내리쳤고, 나는 그것을 쳐낼 요량으로 위로 검을 들었다. 웬만한 강행군에는 얄미울 만큼 멀쩡해 보이는 녀석이 숨을 거칠게 몰아쉴 정도면 지친 게 확실하다고 판단했는데. 움직임이 느려진 게 확연히 보였다.

그럴 만도 하지. 몸무게의 배가 넘는 추를 달고도 산을 오르내릴 수 있는 내가 들기에도 꽤 묵직한 검을 그렇게 빠르게 휘둘러 댔으니. 승리를 예감한 내가 입꼬리를 비죽이며 웃는 순간.

‘시발.’

섣부르게 승리의 미소를 지은 나를 질책하기라도 하듯 내 검이 디멘시온이 휘두른 검에 맞아 파였다. 미세한 정도였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부러질 것이다.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지치는 건 사람만이 아니라는 걸 간과했다. 스펠먼가에 굴러다니는 훈련용 규격 검 중 아무거나 주워 2주간 혹사시켰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디멘시온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눈치챈 걸 그라고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 얼음처럼 투명하고 옅은 눈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차분했지만, 기이한 흥분이 비쳤다. 조금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이른 승리를 점친 것이다.

순간 울컥했다. 자존심이 있지. 여기서 이렇게 그가 원하는 것을 내줄 수는 없다.

“집중해.”

조금 전 그가 한 말을 되돌려 주며 이를 드러내 웃었다. 상대의 의아함이 깨달음으로 변하기 전에 빠르게 한 손을 놓으며 더 힘을 주고 그대로 돌렸다. 부러진 검날이 살갗을 베고 지나갔다. 뺨이 화끈거렸지만 개의치 않으며 손을 뻗었다.

옅은 색의 벽안에 오늘 처음으로 당황이 들어찼다.

“그만!”

스펠먼의 외침과 함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조금 전까지의 적막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소음이 몰려왔다. 둘을 감싸고 있던 껍질이 깨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디멘시온의 검은 내가 떨쳐낸 상태 그대로 어정쩡하게 굳어 있고, 내 손은 그의 팔뚝을 잡고 있었다.

대련의 중단을 알린 스펠먼이 다가오기도 전에 알아서 떨어졌다. 한쪽은 검이 부러졌지만 팔을 잡았고, 한쪽은 검을 부러뜨렸지만 그대로 굳어 버렸다. 굳이 승리를 나누자면 그대로 팔을 부러뜨릴 수 있는 내가 유리한 상황이었으니 미련이 없었다.

디멘시온도 늦게나마 검을 추슬렀다. 평소 같으면 미련 없이 쿨하게 자리를 떠났을 놈이 이상하게 자꾸 내 얼굴을 쳐다봤다. 눈썹을 살짝 찌푸린 그 찝찝한 표정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거라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 그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손을 대려는데 귀신처럼 빠른 반응 속도를 발휘한 디멘시온이 그 손을 잡았다.

“손이 더럽다.”

흙먼지 속에서 뒹군 건 매한가지인데 갑자기 무슨 소리를. 땀이 줄줄 흐르는 중에 연무장 한가운데서 손을 붙잡고 있는 상황이라니.

손은 어렵지 않게 빠졌다. 덥석 잡은 것치고 허무할 지경이었다.

“뭔데.”

목소리에는 영 매가리가 없었다. 한창 집중할 때는 날아다녔는데, 그게 깨지자마자 급격하게 피곤이 몰려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걸어서 이동할 기력도 없다. 당장 축축한 옷을 벗고 씻은 다음, 배부르게 먹고 그대로 쓰러져 자고 싶었다. 스펠먼가 침대에서 자는 것도 마지막이니 며칠 간의 휴가를 즐겨야 했다.

“얼굴에 상처가 났다.”

입술을 달싹이며 시간을 끌던 디멘시온은 결국 내가 짜증 난 티를 내고서야 급하게 말했다.

“얼굴?”

“손이 더럽다니까.”

무의식적으로 얼굴로 향하던 손이 다시 잡혔다. 아. 상처 난 곳에 손이 닿을까 봐 잡았다는 거구나. 납득하고 흘긋 목 쪽을 보자 셔츠 깃이 붉게 젖어 있었다. 인지하자마자 상처가 욱신거렸다.

“심하냐?”

“…피는 많이 나는데.”

가만 보면 목소리는 차분한데, 목소리만 차분했다. 돌아가지도 못하고 서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게 웃겼다. 저도 얼굴에 생채기를 단 주제에. 예상치 못하게 피를 보자 당황한 모양이다.

“됐어. 진검을 들었는데 피 정도는 볼 수도 있지.”

“…….”

“정 뭣하면 약이나 받아다 줘.”

“그래.”

거절할 줄 알고 그냥 던져 본 건데. 의외로 그는 즉답했다. 치료사에게 갈 수고를 덜자 기분이 좋아졌다. 빈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본인이 씻기도 전에 착실하게 가서 약을 받아 올 것이다.

“포션으로 되려고?”

다가온 스펠먼에게는 탐탁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지만. 훈련 중 어지간한 상처에는 눈 하나 깜빡 않던 그가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 상처가 심한 모양인데, 내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어 별로 심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흉 지면 내가 백작에게 혼이 난다.”

아하.

전에는 괴수가 우글거리는 산에 검 하나와 사흘 치 육포, 그리고 물만 쥐여 준 채 던져 뒀으면서. 이제 곧 수도에 돌아갈 테니 눈치가 보인다는 거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눈을 피했다.

그간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백작과 형제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어지간히 압박이 심할 것이다. 슬슬 돌아올 때가 됐다고 생각한 올해부터는 더 심할 테고. 그 와중에 스펠먼은 그들에게서 오는 편지조차 자기 선에서 쳐냈다.

스펠먼은 로베누스를 떠나기 전 다시 나에게 결심을 받았다. 스펠먼은 가족들의 걱정과 애정은 이해하지만, 그들과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면 내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고 여겼다. 그 가능성으로 인해 훈련에 목숨을 걸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들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고 말하는 얼굴은 엄숙했다. 그게 스펠먼이 권하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았다. 나는 미약하게 남아 울렁거리는 망설임을 누르고 기회를 차 버렸다.

가족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이 나를 싸고돈 지가 벌써 4년이다. 일방적이라고 할 만큼 쏟아진 애정에 나도 에드윌을 가족이라고 여긴 지 오래였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 그들이 크게 다친다면, 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마땅하다. 나는 레오가 죽는 것도, 백작이 아네트에게 이용만 당하는 것도, 케일이 수도를 떠나는 것도, 아벨이 마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미래도 견딜 자신이 없었다.

*

“아, 죽겠다….”

뜨거운 물에 몸을 더 깊이 담그며 목을 젖혔다. 김이 올라 천장이 잘 보이지 않았다. 스펠먼 저택에서 마음에 드는 걸 꼽으라면 음식, 웬만한 성수보다 잘 드는 포션, 깔끔하고 넓은 훈련장 등도 있겠지만, 그중 최고는 역시 욕실이다.

훈련생들이 머무는 숙소에는 서른 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는 대욕탕과 각자 취향에 맞는 입욕제를 쓸 수 있는 개인 욕조까지 있었고, 심지어 손님 방에도 모두 욕실이 딸려 있었다. 이동형 욕조에 하인들이 물을 채우는 게 아니라, 욕조가 설치된 곳에 물을 직접 틀어 쓸 수 있다는 부분이 중요했다.

몸의 피로를 푼다는 설명이 다섯 줄에 걸쳐 적혀 있던 입욕제를 잔뜩 푼 물 속에 들어가자 온몸이 늘어졌다. 슬슬 나가서 침대로 가는 게 맞는데. 한 번 뜨거운 맛을 봤더니 영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이제 곧 이것도 끝이라고 생각하자 더 그랬다.

수도에도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 언제나 온수가 잘 나오기는 하는데, 보통 온도가 정해져 있어 그 이상은 올라가지 않았다. 에르켈에게 말하면 좋아할 텐데.

이 넓은 땅에 온천이 한둘쯤은 있을 법한데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뜨거운 물에 몸 담그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 특성에는 영 아쉬웠다. 외국으로 나가면 있다고는 들었던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자는 외국에 나갈 수 없었다.

가족과도 연락을 끊은 상태이니만큼, 에르켈과도 연락할 기회가 없었던 건 당연했다. 에르켈은 아카데미에서, 나는 이곳에서 각자 열심히 하고 있을 거라고 믿을 뿐이다.

지난 5년간 여유 없이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지낸 탓인가. 오랜만에 편하게 늘어지자 애써 묻어 두고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그리운 얼굴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에르켈의 순둥한 얼굴은 어떻게 변했을지, 루이스는 마법을 여전히 하고 있는지, 에이든은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은지. 헬레나는 예쁘게 자랐을 테고, 루시아와 여전히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엘리엇은… 그쪽은 좀 걱정이다. 급하게 떠나며 편지를 보내기는 했는데 답장을 받을 시간은 없었다. 내 속내를 다 안다는 듯 굴던 모습을 떠올리면, 급하게 결정된 거라는 핑계가 먹힐 것 같지 않았다. 엘리엇이 로베누스를 떠나기 전에 충분히 얘기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입을 다물었다는 것 때문에 더 화가 나 있을 게 뻔했다. 곧 얼굴을 볼 생각을 하자 막막해졌다. 언질이라도 미리 해 둘걸. 그래 봤자 한참 늦은 후회였다. 싸늘한 얼굴로 내뱉을 잔소리가 벌써 생생했다.

아니다. 그래도 역시 수도에 가서 마주쳐야 할 사람 중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 1위는 따로 있다. 그 자리는 당연히 황태자의 것이다. 그나마 엘리엇에 대해서는 그립기라도 하지, 황태자를 떠올리면 한숨만 나온다.

떠날 때는 한동안 얼굴을 볼 일이 없다는 생각에 홀가분했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미루고 치워 두던 것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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