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17)

#78

“에르, 전하께서?”

습관적으로 존칭 없이 부를 뻔했다. 급하게 정정하느라 혀까지 깨물었다. 어디서 독심술을 배워 왔대도 믿을 눈치를 가진 엘리엇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돌아왔다고 연락 드렸어?”

“편지는 보냈지.”

도착하자마자 에르켈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썼다. 넘치는 반가움을 꾹꾹 누르고 최대한 담백하게 쓰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아직 답장이 없더니. 직접 오라고 할 줄은 몰랐다.

“굳이 네 이름을 적은 건 함께 오라는 뜻이겠지. 바쁜 건 안다만 시간 내.”

확실히. 에르켈도 지금 내 상황을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다. 에드윌가 막내가 돌아오자마자 황실 기사단의 정기사가 되어 황제에게 직접 검을 받게 됐다는 얘기는 비밀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떠들썩하게 수도를 뒤집었으니까.

어차피 에르켈의 졸업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수도로 돌아올 그가 굳이 와 달라고 초대장까지 보냈다는 건, 반드시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거다. 깔끔한 필기체로 적힌 이름을 보면서 툭툭 손가락 끝으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렸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세드릭 클라인이었다.

익히 들은 악명을 떠올리자 걱정이 됐다. 클라인은 마법부고, 에르켈은 일반부니 마주칠 일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에르켈이 생긴 것처럼 순한 성격도 아니고, 나보다 이 상황을 더 잘 타개할 것도 알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편지에 무슨 상황인지 알려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감시 아래 고작 ‘와서 자리를 빛내 주길 바란다.’ 정도만 적을 수 있었을 그를 생각하자 안쓰러워졌다.

그나마 세드릭 클라인에 관련된 일이면 다행이다. 어쩌면 더 심각한 일일지도 모른다. 원작에서 아네트가 에르켈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시점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초대장을 다시 봉투에 넣고 잘 챙겼다.

“그래. 가 봐야지.”

“그 전에 혹시나 싶어 물어보는 건데. 확실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뭔데.”

그답지 않게 뜸을 들인 엘리엇이 턱을 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입에서 나온 건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었다.

“황태자 전하와 서로 연애적 의미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거냐?”

“미친.”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엘리엇 때문에 하마터면 황실 모독에 가까운 말을 내뱉을 뻔했다. 나는 펄쩍 뛰며 부정했다. 갑작스럽게 열이 뻗쳐 뒷목이 아플 정도였다.

“헛소리 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서약식에 전하께서 언약의 상대로 나오신다며.”

“그거야, 폐하께서 거동이 불편하니까 대리로 나오는 거잖아.”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황태자와 엮이는 건 나도 불편했다. 그렇다고 해서 서약식에 황태자가 나온다고 해서 과민하게 반응하지는 않았다. 엘리엇은 억울해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은 남의 얘기 하는 걸 좋아해. 수도에서 젠체하는 귀족일수록 더 심하고. 백작 부인이 젊은 화가를 후원하는데, 사실 그게 정부로 들인 거라더라, 약혼녀가 있는 기사가 과부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더라. 남작이 양자를 들였는데 사실 어린 애인이라더라. 그런 류라면 환장하지. 소문이 수도를 한 바퀴 도는 데 나흘도 걸리지 않아. 이 스캔들의 공통점이 뭐겠어?”

“뭔데.”

“실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극적이라는 거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왔다. 깨달음과 동시에 탄식이 흘렀다.

“그러니까… 전하와 나를 상대로, 소문이.”

“아직 크게 퍼지지는 않았지만 곧이겠지. 밤까지 열리는 연회를 두어 번만 거쳐도 스케일이 커지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황족, 그것도 황태자를 대상으로 함부로 떠들었다간 목숨이 두 개라고 해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아마 엘리엇이 늘어놓은 류의 저급한 스캔들은 아니겠지. 소문의 방향을 약간 틀어 순정, 순애, 진심 따위의 로맨틱한 단어를 몇 개 붙여 주지 않았을까.

당혹스러운 상황에 헛웃음만 연신 내뱉다 간신히 단어를 더듬거렸다.

“대체?”

‘대체 어쩌다 그런 뭣 같은 소문이 난 거야?’라고 묻고 싶었다. 어안이 벙벙해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별거 아닌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게 그들의 의무니까.”

엘리엇이 비아냥거리며 할 일 없이 떠들어대는 귀족들을 비꼬았다.

“네가 더 잘 알겠지만 지금의 에드윌은 위치가 미묘해. 폐하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가 나온 게 벌써 2년도 더 됐어. 각자 살길을 찾아 어느 쪽에든 줄을 대고 있어. 아직까지 확실하게 입장을 정하지 않은 가문은 몇 안 남았지.”

결국 황태자와 내가 정말 연인일 거라 생각해서 그런다기보다는, 정치적 문제가 얽혀 있는 거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종류의 문제에 골이 지끈거렸다.

그들은 불안한 거다. 혹시 저쪽이 내가 택한 것과 다른 선택을 하면 어쩌나. 자신이 선택한 것이 실패하면 어쩌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와중에 섣불리 입장을 바꿀 수도 없으니 초조해지겠지.

“백작께서 은퇴한 지 한참인데 아직도 떠들어대는 자들이 많아. 아들이 전부 요직이라 부를 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증거랍시고 들이밀면서. 질투에 눈이 멀었다지만, 그쯤 되면 추하지. 그 와중에 네가 돌아왔어. 어쩌면 형제 중 전적도 제일 화려한 데다, 오자마자 정기사가 된다니. 곱게 보일 리가. 전하께서 서약을 진행하며 말을 덧붙이기 쉬워졌지.”

“핑계 찾는 재주는 좋네.”

정기사는 문제가 아니다. 아마 내가 견습을 하든, 성으로 돌아와 몇 년간 꼼짝 않고 백수 생활을 하든. 주기적으로 이름을 끌어올려 소문을 만들어내겠지.

확실히 엘리엇이 지적한 건 나도 걱정했던 부분이다. 은퇴했다고 해도 자문 위원회에 참석할 자격을 가진 백작에, 두각을 드러내는 형제들. 하여간 가족들이 너무 잘나도 문제라니까.

“거기에 전하께서 불을 붙였고. 사흘 전 반응이 특별했다고 말이 많아.”

“대체 거기서 어떻게 로맨스를 끌어내는 거야.”

다들 작가라도 되는 건지. 사소한 것을 크게 부풀리는 재능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특별하다고 할 만한 일은 없었는데.

엘리엇의 표현에 따르면 황태자가 ‘특별한 반응’을 보인 것은 사흘 전. 스펠먼과 함께 입단 전 기사단장들과 인사하기 위해 황성을 찾은 날이었다.

*

용의 마법으로 긴 세월 동안 변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는 황성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대로였다. 좋은 기억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변한 것 없는 모습을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기사 서임에 앞서 황성에 들른 것은 명목상 스펠먼이 현 기사단장들의 얼굴을 보고 조언하기 위해서였지만, 사실 나를 위한 거였다. 어린 제자가 주변의 시기를 받는 건 아닐까 걱정한 노기사의 배려다. 기사들에게 전설 같은 존재인 스펠먼이 직접 신경 써서 단장들에게 인사라도 시키면 대우가 달라질 테니까.

이런 식으로 연줄을 이용해도 되나 싶어 짧게 망설이긴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이미 받을 건 다 받아 놓고 이것만 거절하는 것도 웃겼다. 스승의 배려가 고맙기도 해 군소리를 달지 않고 따라나섰다.

확실히 보통 20대 중반이 돼야 정기사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례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빠른 속도긴 했다. 당장 집에 스물에 부단장이 된 사람이 있으니 특별하다는 감흥도 없었다.

“제자 얼굴을 보러 가는 것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 원.”

스펠먼이 혀를 찼다. 백작은 기어코 그를 집무실에 데려가 한참 대화를 나누었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그 내용이야 뻔했다. 에드윌가에게 스펠먼은 거의 공공의 적 취급이었다. 가족들부터 사용인들까지 빠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내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먼 곳을 보았다. 차마 아벨이 접근 금지 마법을 준비 중이더라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아벨은 가끔 한 번씩 말도 없이 방에 들어와 내 얼굴을 확인한 후에야 웃으며 나갔는데, 눈 밑이 시커메진 모습을 보자 말릴 수도 없었다. 한동안 연구에 매달리면 종종 저런다고 하니 며칠 더 지나면 잠잠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황실과 수도를 수호하는 황실 기사단은 우선 명목상 제국 최고의 기사단이라고 불렸다. 왜 명목상이냐 하면, 제국의 유명한 다른 기사단과 달리 황실 기사단은 소속된 기사 대부분이 수도 주변의 귀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제국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을 많이 배출했고, 당장 내 옆에 있는 에드워드 스펠먼이 살아 있는 전설 수준이라는 것만 생각해 봐도 수준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실력보다 출신을 먼저 따지는 기사단에 적폐가 없을 리 없다.

아무튼, 속으로야 말 많고 탈 많아도 그 중요도를 무시할 수 없는 황실 기사단은 총 네 개 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선 레오가 부단장으로 있는 은의 매 칸딜하스, 푸른 사자 비시온, 붉은 말 룩베론, 그리고 검은 용 카힐름. 이 넷을 총괄하는 총 단장은 매번 있는 것은 아니고, 황제가 친히 내리는 영예로운 자리였다. 지금은 에드워드 스펠먼의 은퇴 이후 비어 있었다.

네 명의 기사단장 중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차남이 소속된 칸딜하스의 단장이었다.

키는 작달막했지만 몸이 단단하고 두꺼워 체격이 작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의 옆에 섰다간 호리호리하다 못해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인상을 주게 생겼다. 실제로 칸딜하스의 단장도 비슷한 감상을 했는지, 내 몸을 훑어보았는데 그 얼굴이 썩 탐탁지 못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내 이름을 제대로 듣고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허옇게 뜬 그가 참담함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레오폴드의 동생이라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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