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고 느낀 건 지나친 비약이었을까. 나는 아직 지은 죄도 없는데 괜히 고개가 숙여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내 형제 때문에 고생했을 상관에 대해서는 매번 안타까움을 가졌기에, 실제로 마주한 칸딜하스 단장의 앞에서 송구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볼 면목이 없었다.
“레오 그 녀석 못지않다고.”
그런 분위기를 읽지 못했는지, 스펠먼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칸딜하스 단장의 팔 을 치며 “기쁘지 않나? 재능 있는 젊은 녀석들이 많아졌어.” 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봐도 레오에 비할 재능은 아니었지만, 영감님 낙을 막을 수도 없었다. 저렇게 제자 주접이라도 부리는 게 늘그막에 얻은 몇 안 되는 기쁨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다.
칸딜하스 단장은 이미 재능이나 실력 따위의 단어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레오 못지않다.’라는 말이 주는 위력이 강렬했던 탓이겠지. 가슴께를 부여잡은 그는 단단한 체격이 무색하게 비틀거렸다.
결국 내상을 크게 입은 칸딜하스 단장은 비척비척 사라졌다. 스펠먼은 아직 젊은 녀석이 몸 관리도 제대로 못 한다며 혀를 찼다. 칸딜하스의 단장이 몸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든 주요 원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는 모습이었다. 레오가 단장에게 스트레스성 위염을 주는 이유 중 6할은 나일 거라는 데 생각이 닿자 죄책감이 늘었다.
입단 후에는 최대한 조용히 지내야겠다. 지금처럼 간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것만으로도 민망한데. 내가 직접 그의 골칫거리가 됐다간 칸딜하스 관사 앞은 지나가지도 못할 거다.
다음으로 만난 것은 카힐름과 비시온의 단장이었다. 나는 카힐름의 단장인 키시아르 테사를 살폈다. 그는 조금 전 만난 칸딜하스의 단장과 달리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고, 갈색 머리가 단정한 데다 안경까지 걸치고 있었는데, 덕분에 기사단장이 아니라 문관처럼 보였다. 광대에서 창백한 뺨까지 이어지는 선이 날카로운 데다 눈이 가늘어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설사 그가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좋은 인상을 가질 수는 없었겠지만. 황태자를 도우며 사람을 여럿 죽이는 것을 직접 목격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당시 대단히 크고 위압적으로 보이던 몸이 사실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것 정도가 의외였을 뿐이다.
“그래서, 레오의 동생은 어디로 갑니까?”
비시온의 단장이 고개를 쑥 내밀어 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몸에 꼭 맞게 입은 제복 탓인지 모델처럼 날렵해 보였지만, 키가 매우 크고 체격이 좋았다. 머리는 짙은 녹색이었는데, 결이 좋은 머리칼은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다가도 곧 제자리를 찾았다. 수염도 멋들어지게 정리한 것을 보면 외견에 꽤나 신경을 쓰는 타입인 듯했다. 반질거리는 머리카락이 꼭 해초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 서임도 못 받았는데 무슨.”
스펠먼은 그렇게 말해놓고 헛기침을 했다.
“룩, 허흠, 룩베론…. 세르이어스는 어디 있지?”
스펠먼은 혹시나 두 단장이 알아듣지 못할까 룩베론을 두어 번 더 불렀다. 모른 척하는 게 더 우스울 정도로 노골적이었으나, 어쨌든 그 둘은 알아듣지 못한 척해 주었다. 비시온의 단장은 한술 더 떠 아쉬운 척까지 했다.
“알고 계실 거면서 말을 안 해 주십니까. 비시온도 스펠먼 경께서 직접 가르치실 만큼 재능 있는 기사를 보유할 때가 됐지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제가 꽤 괜찮은 상관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다면서 할 말은 다 하는구나.”
스펠먼의 타박에도 비시온 단장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비시온의 단장이 2황자의 친척이었나. 그 집안 계보를 떠올리자 새삼 제국의 요직을 정말 소수의 가문이 독점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 특혜를 받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앞으로 몇 년 후면 그 소수의 가문 중에서도 몇 남지 않고 쓸려 나갈 걸 생각하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스펠먼과 비시온 단장이 떠드는 동안 가만히 있던 키시아르 테사가 말했다.
“세르이어스 경은 곧 돌아올 겁니다.”
“자리를 비웠나?”
“예. 황후 폐하께서 부르셔서 잠시.”
황제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지 오래다. 이제 기사단장을 불러 성 내 치안에 대해 논하는 것은 황제가 아니라 황후였다.
한때 사냥과 전쟁을 즐기던 매력적인 젊은이였을 황제는, 이제 젊은 날의 부상이 악화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무릎에 고름이 차고 팔이 떨리는 것은 이제 상습적이었다. 포션부터 성수까지 써 보지 않은 것이 없고, 직접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대신관까지 황제를 대면했으나 잠시 호전되는 듯해도 돌아오기를 반복할 뿐, 상태는 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륙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영생할 수는 없는 거지. 초라한 말년을 보내는 황제를 보자 씁쓸했다. 이미 권력의 대부분은 황태자와 황후에게 넘어갔고, 부축해주는 사람 없이는 황좌에 앉을 수도 없는 황제의 곁에 남은 것은 아네트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착실히 자신에게 남은 것들을 아네트와 그 아들인 5황자에게 쥐여 주고 있었다.
비시온의 단장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깔끔하게 치우기는 했어도 생활감이 넘치다 못해 땀 냄새 나는 레오의 것과 달리 모델 하우스처럼 잘 꾸며진 방이었다.
이야기를 주도해 나가는 비시온 단장과 스펠먼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 앉은 나는 맞은편에 앉은 키시아르 테사를 보며 시선을 내렸다. 대외적으로 황태자의 라인을 타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는 그다.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이해관계가 맞으니 움직였을 텐데.
황태자 하나만도 신경 쓰기 버거운데, 견제해야 할 대상이 지척에 있다고 생각하자 벌써 스트레스였다. 그나마 카힐름 소속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속을 알기 어려운 거야 비시온 단장도 마찬가지라지만, 카힐름에 들어갔다간 내 행동 하나까지 황태자의 귀에 들어갈 확률이 높았다.
최선은 속내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칸딜하스 단장인데. 이미 차남의 상관으로 업무 스트레스에 허우적거리는 그가 나까지 맡게 된다면 정말 사표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레오가 단장이 될 텐데. 그것도 달갑지 않았다.
단원들 앞에서 천사 같다느니, 귀엽다느니 해대는 레오를 생각하자 눈이 질끈 감겼다. 현실성이 넘쳐서 더 두려운 상상이었다.
곧 내 직속 상관이 될 룩베론의 단장이 도착했다.
“늦었습니다.”
스펠먼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기사는 나를 보더니 씩 웃었다. 룩베론의 단장은 황실 기사단 네 개 단의 단장 중 유일하게 여자이며, 제일 어린 라리트 세르이어스였다.
짙은 고동색의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어 날개뼈까지 닿았고, 짙게 그을린 피부는 날렵하게 붙은 근육에 잘 어울렸다. 녹색 눈은 생기 넘치게 반짝였다. 전체적으로 쾌활한 인상이었다.
성격도 생긴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지 두 기사 단장이 애써 스펠먼의 힌트를 못 들은 척해 준 것과 달리 세르이어스는 대놓고 나를 부하 취급했다. 정식 서임식 전에 단원들끼리 술이라도 한잔하러 가자며 호탕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얌전히 내숭을 떨었다.
수다스러운 셋과 불편한 하나 사이에서 시달리다 벗어나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나는 기가 쪽 빨린 채로 비척거리며 빠져나왔다. 세르이어스와 합이 맞은 비시온의 단장은 스펠먼과 함께 술집을 예약했다. 다행히 나는 아직 정식 기사가 아니라는 이유를 대며 빠져나왔다. 키시아르 테사는 묵묵히 둘을 따랐다. 저 정도의 인내심이 있어야 황태자도 바로 옆에서 모시겠지.
밖은 아직도 밝았다. 해가 아직 중천인데 벌써 술 얘기라니. 나와 함께 한동안 모든 욕구를 틀어막고 살더니, 한동안은 저렇게 지낼 모양이었다. 한때 깐깐하며 가차 없다고 생각했던 스승의 변화가 신기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한 철 만에 사라질 꽃들이 정원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에 관심을 줄 여유는 없었다. 취업 전 짧은 백수 생활을 최대한 즐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는 분명 아름다웠지만, 지나치게 강한 향은 썩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숨을 짧게 들이켜고 느리게 뱉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때 작은 이질감이 신경을 건드렸다. 바람의 방향과 상관없이 바스락거리는 덤불. 습관적으로 허리에 손이 갔지만, 아직 황성에 검을 차고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터라 텅 비어 있었다. 늦은 깨달음과 동시에 허공을 저은 손을 꽉 쥐었다.
싸우는 내내 검이 있었던 건 아니다. 스펠먼에게 요청한 것은 검 실력뿐이었는데, 그는 내 목적이 뭔지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법을 가르쳤다. 숲과 산맥에서 나는 나뭇가지로, 돌로, 때로는 맨주먹으로 괴수와 맞닥뜨렸다.
상대의 기척은 아주 작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천천히 쉬던 호흡을 멈추고 곧 튀어나올 것을 대비했다. 종아리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다. 바닥을 밟는 소리는 어린애의 것보다 더 가벼운데, 어린애가 이만큼 기척을 숨기는 데 능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짐작되는 크기도 아주….
나는 시선을 좀 더 내렸다. 둥근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꼬리가 우아하게 흔들거린다. 이거, 뭔가 익숙한 상황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