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17)

#80

기시감을 느끼며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다. 화를 내며 날뛰던 2황자의 목소리, 품에 안은 털 뭉치, 그리고 목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가는 검. 가만히 되짚던 나는 그 고양이가 이 고양이일 가능성을 떠올리고 당장 주변에 귀를 기울였다.

고양이의 주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먀아아, 울어대는 고양이를 두고 걸었다. 아치형으로 장식된 덤불을 지나고, 짙은 향에 코끝이 무뎌질 즈음 그곳에 황태자가 있었다.

나는 그를 발견하는 순간 그대로 멈춰 섰다. 기억 속에 있는 것도, 잠시 상상해 본 것도 지금의 그를 담을 수는 없었다.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해가 금발 위로 쏟아졌다. 손을 델 것 같은 색과 다르게 온기라곤 없는 눈이 곧 나를 향했다.

아주 잠깐, 상대가 정말 살아 있는 인간이 맞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사람이 가져야 할 온기를 덜어낸 얼굴은 잘 만든 조각품처럼 미학적인 요소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게 살아서 눈을 깜빡이고 숨을 쉬며, 움직이고 있다니.

전부터 얼굴, 얼굴 하기는 했는데. 기억이 바랜 것인지, 그가 과거에 비해서도 더 화려한 외모를 갖춘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일단 내 기억보다 더 엄청나다는 것은 확실했다. 정신을 차리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인사도 하지 않고 서 있으면 그것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떨어져야 하는데. 황태자는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는 동안 그 또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색 옅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얼굴로 받은 충격이 좀 가시고 나자 그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니다. 눈썹도, 눈도, 입술도 모두 언제나 그래 온 것처럼 제자리에서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묘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곧 그의 입술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눈을 살짝 접으며 웃는 모습이 옛날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살아 있었군.”

황태자가 과연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던 나는 예상과는 다른 말에 고개를 숙인 채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다. 오랜만이라고 반가워한다든가, 무례함을 지적하는 것 정도는 후보에 있었는데.

황태자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거기까지는 예상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과는 다르다는 게 의문점이다. 그때의 황태자도 웃음을 띤 것과 달리 쌀쌀맞은 목소리로 사람을 대했다. 어린 나이부터 모든 것을 제 아래에 둔 듯 오만한 태도였다. 그것을 감히 지적할 자가 있을 리 없으니 바뀔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어딘가 심기가 상한 듯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의 외모에 대해 얄팍하게 기억하던 것처럼 태도에 대한 것도 퇴색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달라진 것인지 섣불리 답을 고를 수 없었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고양이가 내 옆을 지나가 주인의 발치에 몸을 비볐다. 황태자는 익숙하게 그것을 안아 들었다.

“서임식 전에 얼굴을 보려면 또 온갖 핑계를 대야겠군.”

그러지 않아도 찾아오겠다는 말은 차마 빈말로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또 침묵을 택했지만 황태자는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었다.

“사람 없는 곳에서 수련만 했다더니. 스펠먼 경은 제자를 위해 검과 대화하는 법도 가르쳐야겠어.”

내용이 제법 날카롭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 더 할 말이 없다. 확실히. 오히려 어릴 때는 잘 굴러갔던 혀가 이제 뻣뻣해진 걸 느꼈다. 검이든 말이든 자주 써야 느는데, 사람과 대화하는 것보다 괴수를 마주치는 일이 많다 보니 퇴화했다.

이대로 아네트라도 만났다간 뼈도 추스르지 못하고 털릴 게 뻔했다. 지금도 황태자에게 얻어맞기 바빴다.

“다망한 일정에 작위도 없는 일개 귀족 자제가 만남을 청하기 대단히 어려웠다고, 핑계라도 읊어야 하지 않아?”

오히려 답을 들이대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먹기 민망한 법이다. 나는 우물쭈물 황태자의 말을 대체할 만한 핑계를 떠올렸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뭔가 막힌 것처럼 마땅한 것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검을 들고 가서 싸우는 게 훨씬 편하겠다.

“다망한, 바쁘시다 들어… 제가 만남을 청하기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미처 그것을 헤아리지 못했군. 초대장을 보내 면을 살려 줄 테니 부끄러워 말아.”

짜증에 들끓는 속을 누르고 공손하게 답했다. 재회하자마자 기 싸움에서 밀린 기분이다. 억울함에 코끝이 찡할 지경이었다. 원작자가 원망스러웠다. 반했다더니. 반한 이후로는 다정하게 군다더니. 저게 다정인가?

황태자의 손길을 가만히 받는 고양이에게야 다정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하지만 대놓고 망신을 주는 것에 다정을 붙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에르켈이라면 민망하게 웃으며 ‘그래도 펠 정도면 다정하지 않나?’ 할 게 뻔했다. 쓰레기가 연애하는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다정함의 기준은 쓰레기 매립지에 있었다.

*

그날 황태자는 곧 등을 돌려 사라졌다. 머릿속에서 상황을 몇 번이나 리플레이 했지만 정말 그게 다였다. 처음 원작이 발동됐을 때처럼 꿀 떨어지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상한 플러팅이라도 해댔으면 소문이 커진 것을 이해해 보기라도 하겠다.

내가 통 이해할 수 없다며 불만을 늘어놓자 엘리엇이 한숨을 지었다.

“그들을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무시할 수도 없다. 소문은 언제 악질적으로 변할지 모르니까. 그나마 지금은 풋풋한 연정 따위로 귀엽다는 얘기를 하는 모양이던데.”

“풋풋은 무슨.”

풋풋한 연정이 다 죽은 게 아니고서야. 코웃음을 치던 나는 다음 말에 성질을 낼 뻔했다.

“이러다 네가 전하의 정부라는 내용으로 발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정, 시발.”

입 밖에 꺼내는 것만으로 짜증이 이는 단어였다. 정부라니. 내가 정말 황태자와 연애라도 하면 억울하지나 않겠다. 아니, 설사 연애를 한다 해도 억울할 거다. 연인 사이에 붙이기에는 너무 노골적이고 부정적인 단어였다. 이렇다 할 관계도 없는 사람과 추문이라니. 황태자는 이 사태를 알고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나는 오만상을 쓰며 그 말도 안 되는 가설을 부정했다.

“네 앞이니까 말하는 거지만, 나는 전하와 무슨 사이로도 정의되고 싶지 않아.”

“알아. 그러니까 적어도 서약식에 맹세의 대상은 신경 쓰라는 뜻이다.”

시큰둥한 엘리엇의 답에 내가 되물었다.

“데뷔 연회 파트너가 아니라?”

“그건 이미 네 형들이 열심히 찾고 있을 거 아니야. 표정을 보아하니 가족을 데려갈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최대한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상대로 고르는 게 좋을 거다.”

기사의 서약식은 두 개의 맹세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언약, 하나는 레이디에 대한 맹세였다. 요즘에는 간소화하거나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여전히 격식을 중시하는 가문에서는 큰 행사로 취급했다.

황실에서 주최하는 언약은 식순이 복잡하지만, 결국 내용은 단순하다. 운신이 불가한 황제를 대신한 황태자가 나와 기사의 자격을 인정하고 친히 검을 내릴 것이다. 그가 그 자리에 선다는 것만으로 차기 황제가 될 것이 거의 확정됐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자리였다.

그러나 더 주목받는 것은 레이디에 대한 맹세 쪽이다.

사실 ‘맹세’ 쪽이 더 중요한 것이라, 상대는 반드시 레이디가 아니어도 된다. 표면적으로 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라는 의미를 달고 있으니 기사가 아닌 누구라도 괜찮았다. 그러나 일생에 한 번 할 수 있는 것이라서, 전통적으로 로맨틱한 의미가 있었다.

보통 연인을 상대로 하는 경우가 많고, 마땅한 상대가 없다면 직위 높은 귀족 여인에게 부탁했다. 요즘에는 가족이나 친척, 친구를 상대로 하는 경우도 많았다. 괜히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미끼를 던져 주느니 형제 중 하나에게 부탁하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황태자와 그런… 류의 소문이 돌고 있다면 엘리엇이 충고하는 대로 초반에 잠재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문제는 마땅한 상대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지.

내가 별생각 없이 형님들이 해 주면 안 되냐고 한 후 이미 자신으로 확정이라도 난 듯 김칫국을 사발째 들이켜고 있는 형제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불어 데뷔 파트너를 찾을 때처럼 또 한 번 온 수도 귀족을 다 뒤질 극성스러움을 생각하자 속이 아팠다.

“차라리 네가 하는 건?”

“나는 안 돼.”

혹시나 싶어 권했지만, 엘리엇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왕이면 여자로 골라. 괜히 남자에게 상대해 달라고 해서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간 가족이 하는 것보다 못할 테니까. 최대한 여지를 남기지 말라고.”

절대 사양하고 싶은 종류의 소문이다. 나는 최근 들어 자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일단 고민해 보겠다고 일어나는 내게 엘리엇이 던지듯 제안했다.

“상대를 구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이번에 아카데미에 가서 찾는 건 어때.”

처음에는 언뜻 의아하게 들렸지만, 곱씹어 보니 꽤 괜찮은 대안이었다. 원래 부르주아들에게나 필수로 여겨지던 아카데미는 최근 수도 귀족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졌다. 특히 우리 대에는 황자인 에르켈이 아카데미로 향하면서 귀족들도 대거 입학을 선택했다. 황족 중에 아카데미에 입학한 선례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직계 황자가 가는 건 의미가 달랐으니까. 당시 한창 살롱의 시작을 알리며 주목을 끌던 에르켈이라면 더 그렇다.

또래가 모여 있는 곳이니 당장 수도에 있는 명단 중 추리는 것보다 풀이 넓었고, 친분이 있는 상대도 다들 아직 거기 있었다.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청한다고 표현할 수도 없다. 상대도 수도에 오자마자 심심치 않은 주목을 받게 될 테니 따지자면 윈윈이다. 초대장에 의하면 보름 후부터 시작되는 졸업회가 일주일간 진행된 후 끝난다고 하니까. 조금 급박하게 준비해야 하겠지만, 영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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