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17)

#81 

“갑자기 나타나서 맹세 상대가 되어 달라는데 해 줄까?”

“황실 기사의 서약 상대가 되는 걸 거절할 사람이 얼마나 되려고.”

엘리엇이 입술을 비뚜름히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너라면 가문의 이름이 없어도 가능할걸.”

바로 이해하지 못하자 그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아직 다른 조건들보다 얼굴을 따질 나이잖아.”

아. 그거 때문에. 민망함에 얼굴을 만졌다. 르웰린의 얼굴은 내 이상과는 거리가 있는 곱상한 외모라 그렇지, 객관적으로 어디서든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남자에게만 잘 먹힌다고 하기에는 아깝지. 과장을 조금 덧붙이자면 하루 종일 거울만 보고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정도다. 차라리 현대에서 연예인을 했다면 굶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좋을 거 같은데?”

재킷을 챙겨 입으며 묻자 엘리엇이 검지로 툭툭, 탁자를 두드렸다. 저 습관도 여전하구나 싶었다.

“그건 네가 정해야지.”

“이미 고려한 상대가 있으니까 말을 꺼냈을 거 아니야.”

내가 너를 모를까 봐. 어디서 밑장 빼기야.

내 말에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던 엘리엇이 어깨를 으쓱했다.

“루시아.”

“루시아 아이센?”

“똑똑한 애니까. 네가 운만 떼도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거야. 본인에게 이득 되는 걸 금방 파악할 테니 거절하지 않을 거고. 어쩌면 네가 먼저 말하기 전에 접근할 수도.”

나는 오래전 보았던 루시아 아이센을 떠올렸다. 그녀에 대해 생각나는 것은 금발 벽안의 예쁘장한 얼굴이라는 것, 헬레나와 친하다는 것,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또래 여자애들을 휘어잡던 것 정도다. 자연스럽게 무리의 중심이 되던 모습을 생각하면, 확실히. 어떤 상황에서도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바라는 것을 넘어 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할 수 있을지도.

16. 아카데미

정확히 열흘 후 아카데미가 있는 도시, 룬칸델행 열차를 탔다. 형제 중 대표로 나선 아벨이 함께였다.

에르켈이 나를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벨을 데리고 움직이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갈 때는 엘리엇과 함께고, 올 때는 졸업식까지 마친 에르켈까지 합류해 돌아올 예정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달래도 아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방긋방긋 웃던 그는 급기야 모교가 그리워 들르고 싶다는 핑계까지 꺼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건 아벨의 특기다. 자세히 보면 이상한데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조금만 신경 쓰면 새빨간 거짓말인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교수들이 아무리 불러도 찾아가지 않았으면서. 심지어 룬칸델은 마탑이 있는 라히드에 육로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금세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모교가 갑자기 그리워졌을 리 없다.

백작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건 케일만이 아니었던 거지.

원래 엘리엇과 아카데미 졸업회 시작보다 일찍 룬칸델에 도착해 에르켈을 만나 보기로 했다. 일정에 맞춰 역에 도착한 그는 내 옆에 찰싹 붙은 아벨의 모습을 보곤 온화하게 웃었다.

음소거된 욕이 들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일단 눈을 접고 입꼬리를 올렸으니 일단 웃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그리고는 다가오지도 않은 채 멀리서 인사를 건넸다. 아벨에게 팔이 엮인 내가 부르자 엘리엇은 인사를 한 것만으로 본인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자신은 따로 가겠다고 마차를 되돌렸다. 사정이 생겼다는 뻔한 핑계조차 없었다.

아벨도 예의상 붙잡는 말조차 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얼굴은 놀이공원에 가는 어린애처럼 해맑았는데, “엘리엇이 눈치가 빠르네….”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호러 특급에 나올 만큼 음산했다. 나는 애써 듣지 못한 척 그의 팔을 끌고 객실로 들어갔다.

5년이나 자리를 비운 건 좀… 잘못된 선택이었던 걸지도. 나는 늦어도 한참 늦은 후회를 했다. 수련에 열중한 것까지는 좋은데, 어째 형제들 상태가 영 별로다. 보통 그냥 웃어넘기다가도 또 가끔은 뒷목이 서늘해질 만큼 집착하는 일이 늘었다. 징징거리는 면은 있어도 차남에 비하면 정상적이던 아벨이 어쩌다 저렇게 됐는지 모를 일이다.

동부 여행 이후 열차에 흥미가 생긴 차기 가주 덕인지, 딜런가에서는 철도 사업에 대대적으로 투자했다고 들었다.

많은 지분을 가진 엘리엇 덕에 예약도 없이 제일 좋은 좌석을 꿰찬 나와 아벨은 편하게 늘어졌다.

아무리 보는 눈이 좋다고 해도 고작 10대 초반인 어린애의 말을 듣고 과감한 결정을 내리다니. 백작 부부가 대단한 건지, 엘리엇이 대단한 건지 고르기 어려웠다. 사실 내가 볼 때는 양쪽 다 범인은 아니었다.

원래 열차 사업은 동부에서나 각광받던 사업이었다. 서부 귀족들은 보수적이라 마법석 게이트와 마차가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했고, 투자를 한다 해도 차명 계좌를 이용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몇 개 가문이 막을 수는 없었다. 딜런을 선두로 돈 좀 있다 싶은 가문에서는 모두 이 사업에 뛰어들었고, 초반에 대단한 이윤을 올렸다. 요즘도 안정성이 보장된 것 중 하나로 꼽힌다 하니 나쁘지 않았다.

나는 세금 다루는 것은 기가 막히면서 사업 감각은 영 떨어지는 백작을 생각하자 아쉬움이 남았다. 같이 좀 하라고 언질해 둘걸. 이미 광산을 몇 개나 소유해 부유한 편이었지만,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내가 산속에서 구르며 문명과 떨어져 있는 사이 열차는 많이 늘었다. 본래 제국의 중앙쯤 위치한 섹텔에 가야 동부로 향하는 열차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이제 수도와 가까운 베센에도 역이 생겼다. 초반에 돈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은 딜런 덕이 컸다.

비싼 땅 위에 철로를 놓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돈이 필요했을 텐데. 역 내부 시설을 꾸미는 데 딱 그만큼의 돈이 더 들었다고 했다. 실제로 보니 황성만큼 화려하다는 소문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게 실패했다면 딜런이 휘청거릴 뻔했다더니. 그냥 과장인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고급스럽고 화려한 내부가 귀족들의 마음에도 들었는지, 서부 이용자도 많이 늘어 나날이 호황이었다.

“수도나 로베누스에 비할 건 아니어도 룬칸델도 꽤 재미있을 거야. 따지고 보면 루베테보다 역사는 더 오래됐으니까. 졸업회 때 검술부가 현자의 거리를 따라 행진할 테니 미리 구경하러 가자. ‘봄과 아침’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가게 이름은 웃겨도 맛은 좋아. 요리사가 그대로라면 네 입맛에도 맞을 거야.”

간만에 나를 독점하게 된 아벨은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오랜만에 활기 넘치는 얼굴을 보자 나도 기분이 좋았다. 스트레스에 바짝 말라 가던 모습에 걱정이었는데.

자신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은지, 룬칸델과 아카데미에 대해 떠드는 동안 침이 마르는 건 아닌가 걱정하게 될 정도로 말이 많았다. 굳이 마주 떠들어 줄 필요도 없었다. 대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좋아요.’ 정도의 반응만 해도 알아서 대화를 이어 나갔으니까.

“이번 마법부 학부생 중 대단한 애가 있대. 클라인이라고.”

가만히 수다를 받아 주던 나는 아벨이 꺼낸 이름에 멈칫했다. 깜빡이 좀 켜지. 갑작스럽게 스트레스 유발자2의 이름이 나와서 놀랐다. 모른 척 시침을 떼며 물었다.

“클라인이요?”

“응. 천재가 나왔다고 하던데. 영감님이 그렇게 호들갑 떠는 건 처음 봤다니까.”

마탑주이자 아카데미 교장인 피사 테콘의 얘기까지 나왔다. 그가 실제로 몇 년 후에 세드릭 클라인에게 마탑주를 넘겨준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감탄하며 처음 듣는 얘기에 흥미가 생긴 척했다.

원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일이 적은 아벨이었다. 순위를 매겨 보면 나와 마법이 제일 앞에, 그다음에 다른 가족들이, 그리고 한참의 텀을 두고 동료 마법사들이 있지 않을까. 그런 아벨이 학부생에 불과한 세드릭을 알고 있을 정도면….

단순히 학교 성적이 잘 나온다고 마탑주가 친히 천재라고 떠들어대지는 않았을 테고. 나는 과연 세드릭 클라인이 뭘 가져와 그 영감님의 호감을 샀을지 꼽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이면 그가 그레도르의 편지를 이용해 연락 수단을 개발했으려나?

“정말 대단한가 봐요.”

와아아, 해맑은 척 어울리지도 않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벨은 내가 여전히 열두 살처럼 구는 걸 좋아했다.

“그러면 졸업 후에 세드릭 클라인도 황실 마법부에 들어오게 될까요?”

“글쎄. 따지고 보면 나도 탑 소속인데 황성에서 일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우선 탑에 가겠지. 우선 거기 소속되는 게 일하기 편하니까. 그래도 확신은 못 하겠네. 천재라고 불리는 놈들 중에는 정상이 없어요, 정상이. 그 클라인이라는 녀석도 특이한 타입이라면… 생각지도 못한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

본인도 천재라고 불린 조기 졸업생이면서.

나는 쯧쯧, 하고 혀를 차는 아벨을 보며 아연해졌다. 이런 걸 제 얼굴에 침 뱉기라고 하던가?

사실 세드릭 클라인이 아카데미에 틀어박혀 조수부터 교수까지 해 먹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쓸데없이 수도에서 얼쩡거리면 눈에 계속 걸릴 테니까. 같은 직장이라고 해도 넓은 황성에서 기사와 마법사가 마주칠 일은 많지 않겠지만, 그가 주요 캐릭터인 이상 또 모르는 일이었다. 갑자기 마법사와 함께 수사를 진행하는 식으로 엮일지도.

상상만으로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얼른 마탑주가 되어 꺼져 버리길 바라며 카운트 다운을 하게 될 스스로가 눈에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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