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17)

#82

“그런데 되게, 익숙하게 부르네….”

아벨은 여전히 웃고 있음에도 어딘가 음산해 보였다.

나는 그가 황태자와 나 사이의 소문을 들은 게 틀림없다는 가설에 확신을 더했다.

아무리 마탑 현자들이 아끼는 제자이자 마법부의 인재라고 해도 대놓고 황태자를 향한 반감을 드러낼 수는 없다.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최근 내 앞을 막아선 채 주변을 경계하는 게 심해졌다.

스펠먼과 어떻게 지냈는지 몇 번이나 되묻기도 했다. 사람이 없는 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는 말에는 웃다가, 스펠먼 저택에서 머무르는 날도 있었다는 말에는 자세히 캐묻고 몇 개의 이름을 곱씹었다. 제일 인상 깊었던 놈에 대해 할 말이 제일 많은 건 당연해서, 나도 모르게 디멘시온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나왔다. 마지막까지 그를 이길 수 없었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지만, 이미 아벨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디멘시온이 사용하는 가명을 잊지 않겠다는 듯 연신 중얼거리는 모습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실수로 그가 내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걸 말하기라도 했다면, 스펠먼 저택에 때아닌 재앙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하마터면 은혜를 원수로 갚을 뻔했지. 간신히 그의 관심을 돌리던 순간에는 정말 등골이 오싹했다.

잠깐.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멈칫했다.

…설마 엘리엇이 아벨을 보고 돌아간 것도, 그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

나는 그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해 애썼다. 아무리 아벨이 예민해져 있대도 그렇지. 열 살부터 함께 놀던 소꿉친구까지 그런 의미로 경계할 정도면 상태가 심각했다.

“들어 보긴 했어요. 수도야 워낙 소문이 빠른데, 클라인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돌아온 직후부터 지금까지 나와서요. 대단한가 싶어 이름은 기억해 뒀죠.”

“응, 그렇지.”

아벨은 방긋방긋 웃었다.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말하는 거니까 거기에 맞춰 넘어가 주겠다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아벨이 세드릭 클라인을 경계해 아카데미까지 쫓아오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급하게 덧붙였다. 에르켈과 함께 움직이려면, 아벨은 최대한 떨어뜨려야 했다.

“형님과 같은 마법사라는 점도 그렇고. 따지고 보면 형님의 후배잖아요.”

치마 입고 다니는 변태 새끼기도 하고.

순간 내가 아는 세드릭이 떠올랐다. 씨씨라는 애칭에 어울리는 하얗고 예쁘장한 얼굴. 초식동물처럼 까맣고 순한 눈. 행동이 굼뜨고 낯을 많이 가렸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일 만큼 인형 같은 어린 시절이었다.

세드릭 클라인에 대해 곱씹다 하마터면 형 앞에서 순진한 척 내숭 떨던 게 깨질 뻔했다. 그런 얼굴 아래에 그렇게 시커먼 속을 가졌을지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처음 여자애처럼 입고 있었던 것까지는 엘리자베스 룩스틸과의 거래라고 하니 이해할 수 있다. 어린애들끼리 그 정도 장난은 칠 수도 있지.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정체를 숨기며 나를 속이려고 한 건 용납하기 힘들다. 개자식이, 그래 놓고 목걸이를 얌전히 받은 데다 뽀뽀까지.

이미 더 찐하게 입 맞춘 루크도 있는 판에 첫 뽀뽀 따위에 미련을 갖는 것은 아니었지만, 울컥하긴 했다.

에르켈과 엘리엇이 연신 첫사랑 아니냐고 바람을 넣은 게 생각난 탓이다. 첫사랑 같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게 아니라고 당시에도 부정하기는 했지만, 어영부영 넘어가기도 했었다. 첫사랑의 치읓만 나와도 허튼소리 말라고 입을 찰싹 때려 버렸어야 했는데.

*

룬칸델에 도착하자마자 아벨은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호텔에 들를 시간도 주지 않아 짐만 따로 보내야 했다.

오랜만에 산책을 나온 강아지가 신나서 달려가듯 앞서가던 아벨이 아차 싶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잠깐 고민하던 그가 내 옆에 찰싹 붙었다. 옆구리에 찰싹 붙은 아벨이 나를 보며 웃었다. 그 해사한 얼굴을 보며 나도 마주 웃어 주었다.

결국 아벨과 한 몸처럼 붙은 채로 도시 구경을 해야 했다. 아벨은 잠시라도 눈을 떼면 내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최대한 몸을 밀착한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초밀착 케어’였다. 사람 많은 놀이공원에 미취학 아동을 데려간대도 이 정도는 아닐 거 같은데.

한 짓이 있으니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순간 열 살로 돌아간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정말 열 살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차남이 하루 종일 나를 안고 다니며 걸을 일이 없게 만들기는 했지만, 다른 형제들은 무난한 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방을 채워 준다거나, 더 맛있는 디저트를 공수해 와 경쟁하는 정도의 귀여운 수준.

내가 얌전히 옆에 붙어 있자 아벨이 어깨 위에 팔을 둘렀다. 차마 다 큰 동생을 들고 다닐 수 없었던 차남이 요즘 자주 하는 자세였다. 레오와 키 차이가 제일 많이 나는 탓에 그가 팔을 두르면 나는 거의 팔걸이가 된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그 모습에서 형으로서의 듬직함을 본 모양인데, 아벨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듬직함의 절반 이상은 레오의 덩치에서 나왔다. 아벨은 노력해 봤자 발꿈치를 바닥에 제대로 대지도 못하고 떠 있는 모습이라 레오가 보여 준 모습과는 차이가 컸다.

내가 5년간 최선을 다해 큰 덕에 우리는 이미 키가 비슷했고, 굳이 체격을 비교하자면 내가 더 나았다. 르웰린의 몸 자체는 가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온종일 햇빛도 쐬지 않고 실내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마법사와 연무장 뺑뺑이 도는 게 일상인 검사를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 봤자 나 또한 이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나는 아무리 열심히 운동해도 한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일정 이상 두꺼워지지 않던 흉통과 팔을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디멘시온까지는 인정한다. 그 녀석이야 원래 무인이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어 단단한 팔과 손을 가졌다고 해도 큰 패배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놈에게 덤벼 치열 하게 겨룰 수 있다는 것에 뿌듯할 정도였다.

하지만 황태자는 얘기가 다르다. 정해진 운동량만 소화하는 귀한 몸께서 체격이 좋을 필요가 뭐가 있다고. 우아한 분위기에 가려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는데, 다시 떠올려 보면 지나칠 정도로 잘 자란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르웰린의 체질로는 꿈도 꿀 수 없는 크고 단단한 체격에 억울할 지경이었다. 뒤지게 구른 건 이쪽인데. 왜 그쪽 몸이 자랐느냐고.

한때나마, 어릴 때, 아주 잠깐… 검을 잡았으니 차남 정도는 될 거라고 기대했던 과거를 떠올리자 설움은 한층 더 깊어졌다. 내가 노력하면 바꿀 수 있는 것의 범위에 내 몸 하나 들어가 있지 않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으로 꼽을 만한 건 원작뿐이다. 비중이 적은 캐릭터면 몰라도, 주인공이라면 작가가 취향껏 설정해 둔 체형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던 거겠지. 나는 언젠가 에르켈이 말한 것처럼 그의 후속작에 빙의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생각하다, 이내 포기했다.

생각해 보니 그곳의 주인공이 그만한 체격을 가진 이유가 있었다. 에르켈은 한창 ‘그대의 곁에서’를 집필하던 시절에는 가녀린 체형을 좋아했는데, 후속작을 쓰면서 취향이 달라졌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체격이 좋은 만큼 튼튼하니, 잘 망가지지 않아 원하는 대로 굴려도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다는 이유였다.

진짜 취향하고는. 본인 말로는 나름 꿈과 희망이 넘친다는 소설에서도 이렇게 허우적거리는데, 에르켈이 피폐하다고 못 박은 소설에 빙의됐으면 그냥 다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이런 가족도 없었을 테고. 나는 백작 부인보다 백작을 닮아 잘 뜯어봐야 르웰린과 닮은 구석이 있는 아벨의 얼굴을 보며 형제들이 내게 반감을 보이는 세계를 상상해 보았다.

반감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나를 보면 바보처럼 풀어지는 얼굴이 아니라, 남들을 대할 때처럼 대하는 것만 상상해도 우울해진다. 귀찮다고 해도 그들이 먼저 와 내게 애정을 퍼부어 주지 않았다면 낯선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훌쩍이던 시간은 훨씬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벨에게 내가 더 이상 그의 허리에나 오던 꼬맹이가 아니라는 걸 상기시키는 대신 무릎을 조금 굽혀 주었다. 남들 보기에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겠지만, 어차피 오래 볼 사람들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

불과 20년 전까지 룬칸델은 각지에서 몰려든 마법사들과 마법 용품을 파는 상인들로 북적거리는 도시였다.

마탑이 있는 라히드는 사방이 산맥으로 막힌 데다, 마법으로 방어벽을 구축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접근하기 힘들었다. 마탑의 인장이 찍힌 자만 라히드로 통하는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었는데, 이 인장을 받을 수 있는 건 마탑 소속의 마법사뿐이었다. 일반적으로 라히드에 출입할 수 있는 방법은 룬칸델을 통한 육로뿐이었다.

대륙 한복판에 있으면서 외딴섬을 자처하는 라히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룬칸델을 통해 들어오는 물자가 필요했고, 룬칸델은 라히드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굴러가는 식이었다.

오래 유지되던 이 구조는 마탑주인 피사 테콘이 아카데미 교장직을 맡은 것을 기점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