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나는 남부끄러운 애칭에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해 보니 아벨은 마탑에도 내가 요정이니 뭐니 떠들어댄 사람이다. 아카데미라고 조용히 넘어갔을 리 없다. 그나마 마탑에서 저걸 접했을 때는 어리기라도 했지. 다 커서 들으려니 더 부끄럽다.
룩스는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대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룩스 블레인입니다. 이 가게는, 흠. 내 건 아니고… 아니, 내 소유는 맞지만 이것만 그런 건 아니고. 가업을 돕기 위해 잠깐 맡아 운영하는 거라….”
아까와 달리 점잖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지나가던 개가 봐도 룩스가 내게 수작 부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지경이다. 이런 건 또 처음이라 내가 반응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아벨이 내 앞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한스.”
이름은 그새 또 한스로 돌아가 있었다.
“어어…?”
“내가 이름을 잘 까먹는 건 기억하면서, 왜 다른 건 기억 못 해?”
이쯤 되자 룩스도 아벨이 성질을 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넋을 놓고 나를 보던 걸 멈췄다. 아벨이 아하하, 소리 높여 웃었다. 들을수록 불안해지는 웃음을 뚝 멈춘 아벨이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눈 돌려. 뽑아 버리기 전에. 짜증 나게 아는 척하지도 말고.”
룩스는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대놓고 무안을 당한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할 말을 마친 아벨은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화사한 얼굴이었다.
아벨은 기분이 나빠졌으니 이번에야말로 괜찮은 식당을 찾아보자며 다시 앞장섰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그를 따라가며 한숨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번이야 이렇게 넘어갔지만, 이 얼굴로 다니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잦을 것이다. 남자는 발가락으로도 꼬신다던 르웰린의 명성에 대해 에르켈과 떠들어대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다. 설마, 진짜 이런 식으로 호감을 마주할 줄은 몰랐다.
“…차라리 얼굴을 가리고 다닐까 봐요.”
“그게 무슨 소리야, 르웰린.”
아벨이 눈썹을 내리며 울상을 짓더니 내 머리를 끌어당겼다. 나는 순순히 머리를 숙여 주었다. 곧 머리카락 위로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이곳이 거리 한복판이라는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은 아벨이 작게 속삭였다.
“너무 걱정 마. 내가 준비 중인 마법이 곧 완성될 거거든.”
“마법이요?”
“응. 네 얼굴을 일정 시간 이상 바라보면 일시적으로 시력이 제한되는 마법인데, 네가 의식하지 않아도 발동되도록 변형하고 있어. 인챈트 단계만 넘어가면 돼.”
그건 좀. 아니, 좀이 아니라 많이….
일단 내용 자체가 마법보다 저주에 가까웠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지 순진한 얼굴로 웃고 있는 아벨을 보자 골이 띵했다. 이대로 두면 나도 모르는 사이 마법을 걸어 둘지도 모른다. 요즘 쎄하게 구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그런 건 불법, 아닐까요.”
“생각보다 많은 마법이 처음에는 불법이었어. 그 쓸모가 입증되면서 마탑의 인증을 받은 거지. 상대의 동의 없는 추적 마법을 통한 증거 수집도 사용 가능하다고 판명 났는데, 이 정도야 뭐….”
르웰린의 것과 닮은 보라색 눈이 번들거렸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피해자가 너무 많이 생길 거 같다는 말을 삼켰다. 어쨌든 곧 세드릭 클라인을 만날 테니, 그 녀석을 닦달하면 해결 방법이 나올 거라 믿고 싶었다.
아무래도 아벨은 내가 떠나던 날 자신의 추적 마법이 파훼된 것에 대해 대단한 앙심을 품은 모양이다.
나를 끌어안고 내 어깨가 다 젖도록 울던 아벨은 그때 추적 마법만 파훼되지 않았어도 내가 돌아오기까지 손을 놓고 있지 않았을 거라며 이를 갈더니, 며칠 뒤 새로운 추적 마법을 가져왔다.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도 유지되는 마법이라고 알려 주며 웃는 모습은 분명 다정한데 어딘가 음산한 구석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릴 때도 나에게 마법이 걸려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소소한 에피소드였다. 어쩐지. 스펠먼이 왜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이동 마법진을 타고 여러 번 짧게 이동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는 순간이다.
마법석을 이용한 순간이동은 이론적으로 이동 거리를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라, 현재 위치와 이동할 위치 사이를 극단적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법석 게이트는 보통 높은 지대에 있고, 중간에 거대한 건물 따위가 있으면 보조석을 설치해 피해 갈 수 있게 한다.
결국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지점을 통과하는 이동 방법은 대상자의 위치 좌표를 읽어내는 추적 마법과 상극일 수밖에 없다. 단시간에 여러 번 이동하고 나면 좌표가 폭발적으로 입력되고, 결국 과부하가 걸려 끊어질 수밖에 없다.
참고로 아벨이 언급한 ‘상대의 동의 없는 추적 마법 합법화’도 에드윌에서 힘을 실어 준 결과라고 들었다.
나는 당장에라도 저주 마법을 쓸 거 같은 아벨의 손을 잡았다.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 악당처럼 굴던 얼굴이 순식간에 유쾌한 셋째 형의 것으로 돌아왔다. 레오나 케일을 데려왔으면 그를 효과적으로 말릴 수 있었을까. 나는 빠르게 기대를 접었다. 동조해 등을 떠밀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부쩍 발화점이 낮아진 아벨을 달래며 그냥 다른 곳으로 들어가자고 떠미는 중, 묘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거리에 사람이 많았는데도 단번에 그에게 시선이 꽂혔다. 시선의 주인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안경알에 빛이 반사되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을 어디서 봤더라.
묘하게 낯이 익었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가 몸을 돌리자 물이 빠지듯 인상이 빠르게 지워졌다. 잔상처럼 무언가 길게 휘날리는 것이 떠올랐지만, 조금 지나자 그 무언가가 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런 기이한 경험은 전에도 한 적이 있다. ‘그림자의 왼발’을 쓴 황태자를 봤을 때도 상대의 인상이 희미해졌다. 생각해 보면 전에 봤던 그 물건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황태자가 이곳에 있을 리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먼저 부딪혔다. 황태자의 측근. 믿을 수 있을 만한 사람에게 맡긴 걸 수도 있다. 키시아르 테사 정도라면 신화시대 유물도 빌려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림자의 왼발’이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가면 형태였던 것과 달리 방금 그 남자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왜 그래? 저기 뭐가 있어?”
“아뇨. 아무것도요. 어서 가요.”
간신히 진정시킨 아벨이 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까 봐 팔짱까지 꼈다. 흘끔거려 봤자 이미 상대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아직 기억나는 모습마저 잊을까 열심히 되새겼다. 다른 식당에 도착할 즈음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남자의 뒤로 길게 흩날리던 것은 하얀 머리카락이었다.
17. 새로운 가능성의 등장
나를 두고 돌아섰던 엘리엇은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얼굴을 비쳤다. 사실 어제 도착했지만, 굳이 일찍 찾아오고 싶지는 않았다고 알려 주며 차를 홀짝이는 태도가 얄미웠다. 귀찮아 죽겠다고 하는 아벨을 그래도 교수에게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로 어르고 달래 내보내자마자 찾아온 것도.
“바로 아카데미로 가자. 외부인 출입 기간은 어제부터였으니 오늘은 사람이 제법 있겠네.”
“뭐, 그래….”
내가 심통이 난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것도 추가다. 부루퉁해 있자 결국 엘리엇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도 아벨의 집착이 심하다는 거 알면서 그렇게 굴지 마. 그대로 같이 열차를 타고 왔다 간 내가 네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 언제, 누구와 약혼할 계획인지까지 내내 떠들어야 했을 텐데.”
물론, 맞는 말이긴 했다. 나는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간 쌓인 죄책감 탓에 웬만한 일은 웃어넘겼지만, 슬슬 거부해야 할 때가 오긴 했다. 수위가 끝을 모르고 올라가 한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찰랑인다. 보호라고 부르기보다 집착이라고 명명해야 할 행동들은 전처럼 마냥 ‘예쁘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우리 막내!’ 수준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옛날에 폐기한 가설이 떠오르기도 했다. 혹시… 에르켈이 이 망할 소설을 쓰면서 근친 루트를 열어 뒀던 건 아닐까 하는 내용이다.
만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레일의 꼭대기에 올라간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리고 아찔해진다. 주역 네 명만으로 충분히 버겁다. 거기에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가족들까지 얹고 싶지는 않았다.
엘리엇은 그런 나를 보며 혀를 찼다.
“하여간 극성인 건 네 형제들만이 아니라는 건 알아 둬.”
할 말이 없다. 나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런데 웬 약혼이야. 벌써 약혼 얘기가 나와?”
“아직 얘기만 오가는 중이고, 확정된 건 없어. 아무래도 가문 간에 오갈 수 있는 것 중 제일 큰 거래니까.”
귀족 간의 약혼이 깨지는 일은 많지 않다. 이미 가문끼리 주고받을 것을 대부분 확정 지은 상태라 큰일이 없다면 그대로 결혼까지 진행된다. 극단적인 예시로 이사벨 로즈벨과 약혼했던 오리온 딜런이 동성의 부르주아와 결혼하기 위해 파혼한 일로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한 일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평생 함께할 배우자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인데. 약혼을 입에 올리는 엘리엇의 태도는 담담하다 못해 시큰둥했다. 이 녀석에게 로맨스를 기대한 건 아니긴 했는데. 조금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봤자 아직 열여덟. 물론 제국법상 성인이 된 지 1년을 넘겼다지만, 현대로 치면 대학생 나이다. 벌써 이렇게 스스로를 삭막하게 몰아갈 필요는 없었다.
내 연애는 망했으니, 주변인이라도 잘 되면 좋겠다는 쓸데없는 오지랖에 엘리엇을 툭, 쳤다.
“그래도 이왕이면 좋아하는 사람인 게 좋잖아.”
너무 이득만 따지지는 말라고 하는 말에, 엘리엇은 가만히 나를 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새겨들을게.”
전혀 새겨듣는 얼굴은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