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룬칸델의 서쪽에는 마법사의 도시 라히드가 있고, 남쪽에는 아카데미가 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리 아카데미가 중요하다지만, 도시와 건물을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마탑이라고 했으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직접 아카데미를 보자 왜 이걸 도시와 비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카데미는 룬칸델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로, 현자의 거리에서 이어진 지식의 길 끝에 있다.
마탑과 황실의 공동 지원 속에 신설된 도서관을 지나면 그곳에 제국 최고(最古), 최대 규모 교육 기관이 있다. 설립 이념에 따라 성별,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유일한 곳. 그래 봤자 어마어마한 등록금 탓에 어지간한 집안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부르주아가 아니라면 극소수의 장학생 정도나 평민 출신이었다.
아카데미의 크기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울타리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이어져 있었고, 거대한 건물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아카데미라기에 대충 사진으로 본 외국 대학교 캠퍼스 정도나 상상했는데, 완전 착각이었다. 이 정도면 과장을 보태 아카데미가 룬칸델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룬칸델 옆에 아카데미라는 도시가 붙어 있다고 봐도 좋을 수준이다.
돈 많은 집 자식들이 다니는 곳은 다르구나. 나는 정문을 지나 한참 마차를 타고 들어가며 창문을 기웃거렸다. 세드릭 클라인만 아니었어도 그냥 아카데미 검술부에 지원하는 건데. 이런 시설을 한 번도 즐겨 보지 못했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러다 누구를 홀리려고.”
슬슬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지자 엘리엇이 나를 끌어당기고 커튼을 쳤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에 얌전히 끌려 좌석에 앉았다.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저번에도 말했잖아. 거울 좀 보라고.”
내가 스스로 르웰린의 얼굴에 대해 논하는 것과, 친구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데미지가 달랐다. 나는 아벨과 레오의 동료들이 요정이니 천사니 하고 떠들어댈 때보다 더한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지금 나 소름 돋은 거 안 보여?”
“네가 우리 집에 다녀간 후 들어오는 초대장 중 대부분이 너와 함께 와 줬으면 한다는 내용으로 끝나. 웬만해야 네가 에드윌이라 그런가 보다 하지. 가끔은 연서를 보내는 놈들도 있다고.”
“놈….”
여자도 아니고 ‘놈’이란다. 어제부터 연속으로 찾아온 충격에 어지러울 지경이다. 어떻게 크자마자 바로. 아니, 뭐 제대로 얼굴이라도 비쳤으면 모르겠다. 데뷔도 안 했는데 내 얼굴을 어떻게 알았는지조차 모르겠다.
“너희 집에 보냈다간 그대로 불태워진다는 얘기가 퍼지기라도 한 모양인지, 이제 나한테…. 나는 안 태울 거 같았나? 어찌나 절절한지. 모아 놓고 태우면 장관이겠어.”
코웃음을 친 엘리엇이 이죽거렸다.
“몇 개는 내용도 기억하는데, 원하면 읊어 줄 수 있어.”
“대체 내 얼굴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겠어?”
그가 온화하게 웃으며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기사단 입부서를 쓸 때 추천인의 설명을 더하라는 말에 네 작은 형님께서 친히 초상화를 들고 온 덕이지.”
레오 때문이구나. 나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했다. 내가 쪽팔려서 살 수가 없었다. 그게 기사단 외부로 다 퍼질 정도라면, 이미 내부에서는 다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도 내 앞에서 내색하지 않아 준 단장들이 존경스러웠다.
“미치겠네. 가면이라도 쓰고 다녀?”
“그런다고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만, 잠시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벨이 내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시력이 저하되는 저주를 걸겠다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데, 아벨이 하면 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단 말이야.”
그쯤 되자 얄밉게 굴던 엘리엇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뭐든 적당히가 좋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런 식으로 깨달을 줄은 몰랐는데. 어디 가서 몰매 맞을 말이지만, 얼굴이 잘난 것도 지나치면 독이군. 네가 검이라도 배워서 다행이다. 허튼짓하려는 놈이 있으면 그냥 찔러. 백작께서 복직하는 한이 있어도 무죄로 만들어 주실 테니.”
정말 얼굴 때문이었으면 황태자 옆에도 변태들이 잔뜩 꼬였겠지. 엘리엇 앞에서 원작 탓을 할 수도 없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머리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간 내내 스펠먼과 둘이 사람 없는 산에서 지내느라 상황의 심각성을 몰랐다. 스펠먼 저택에 들렀다고 해도 워낙 짧았고, 거기 있는 놈들은 대부분 검에 대한 열망 하나로 불타는 독종들이었다. 디멘시온이 유독 심하긴 했지만, 다들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내가 속이 터지겠다는 듯 벽에 머리를 기대자 엘리엇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창문틀에 팔꿈치를 걸치고 턱을 괬다.
“네가 여기서 맹세의 상대를 찾으면, 소문을 좀 크게 내는 게 좋겠다.”
“그게 도움이 될까?”
“금방 약혼이라도 할 것처럼 굴면 눈치라도 보겠지. 이왕이면 데뷔 연회 파트너도 통일시켜. 사람들이 너와 상대가 둘도 없을 세기의 연인인 것처럼 떠들 수 있도록.”
이러면 조건이 확 까다로워진다. 나는 엘리엇이 추천했던 루시아를 떠올리며 고민했다.
아무리 주목받으며 수도에서 데뷔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고 해도, 약혼설까지 도는 건 적령기의 귀족 영애에게 그리 좋은 방향이 아니었다. 수도는 보수적이고, 약혼설이 떠오른 상태에서 우리가 거래를 종료하면 전적으로 여자인 루시아에게 불리했다. 어쩌면 나 때문에 루시아의 혼삿길이 막힐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엘리엇은 걱정할 거 없다는 듯 말했다.
“루시아라면 할 거야.”
“그렇게 확신하는 걸 보니, 최근까지 연락이라도 한 거야?”
“아카데미에 간다고 끊어질 얄팍한 인연을 위해 어린 시절 내내 애들이랑 살롱에서 어울린 줄 알아? 당시에 놀며 친분을 꾸려 둔 녀석들하고는 꾸준히 연락했어. 누구처럼 편지에 답장도 없이 몇 년씩 사라지지 않았거든.”
내가 잠깐 잊고 있었는데, 엘리엇은 뒤끝이 존나 길었다.
*
에르켈은 어릴 때 그대로 자랐다.
단정하고 결 좋은 갈색 머리, 빛을 받으면 더 연하게 보이는 헤이즐넛색 눈동자. 끝이 처져 순둥한 인상을 완성시키는 눈도, 그의 어머니 로웨나를 꼭 닮았다고 생각한 코와 입술도 꼭 그대로였다.
몇 년의 텀이 있었는데도 꼭 어제 본 것처럼 익숙한 얼굴을 살피면서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에르켈의 상황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얇은 입술을 깨문 에르켈은 간헐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저러다 눈물이 흐른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야 놀라지 않아도, 주변에서는 놀라서 호들갑을 떨 일이다.
우리는 한참 마주 보며 말 없는 대화를 나누었고, 에르켈이 먼저 입을 열어 나를 반겼다.
“크흐읍… 끕, 잘, 잘 지냈구나.”
간신히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눈물만 흐르지 않은 울음을 삼키지 못한 에르켈이 훌쩍거렸다. 서러운 호흡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눈물에도 전염성이 있다고 했나. 소아과 진료실에서 울음소리가 나면 대기실에서도 온통 울음이 터지는 것처럼, 우는 에르켈을 보자 내 코도 시큰거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꾸 벅차올랐다.
황태자와 망측한 소문이 난 것부터, 산에서 뒤지게 구른 것, 로베누스에서 일까지. 그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일이 산더미였다. 중간에 그레도르의 편지를 통해 대화를 했다지만, 얼굴을 직접 본 건 꼬박 6년 만이었다.
분위기를 타 하마터면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도 잊고 끌어안을 뻔했다. 세상에서 제일 기이한 광경을 봤다는 듯 구겨진 엘리엇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그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옆에는 엘리엇이 있고, 에르켈의 뒤쪽에는 함께 놀이 친구로 지냈던 에이든 루스터와 루이스 클로이가 있었다. 심지어 이곳은 언제든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복도다. 이미 충분히 이상한 상황이었다.
엘리엇은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루이스는 눈치 보며 웃고 있었다. 에이든은 뻣뻣하게 굳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르는 로봇처럼 삐걱거렸다. 아마 ‘친하다곤 해도, 이 둘이 이렇게까지 애틋하게 서로를 반길 정도였나?’ 하는 것이 셋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일 것이다.
나는 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우선 얼굴을 소매로 가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벅차오르는 재회를 가질 거라고 생각은 못 했지만, 주체하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야, 나와 에르켈은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도 결국 이 세계에서 완전히 믿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건 서로밖에 없었다.
내가 케일을 믿고, 레오를 아끼고, 아벨을 좋아해도 그들에게 가서 ‘사실 여기는 소설 속이고, 저는 남자 넷 사이에서 핑퐁 되는 탁구공인데, 그 과정에서 레오가 죽기 때문에 소설 스토리대로 진행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따위의 말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러면 안 되는 거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생각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