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17)

#86

내가 표정 관리를 하는 사이 에르켈도 진정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것을 보지 못한 척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르웰린. 바뀐 게 없네.”

“너야말로, 루이스.”

내게 변한 게 없다고 말하는 루이스야말로 바뀐 게 없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장난스러워 보이는 얼굴도, 눈매도 그대로였다. 민들레 홀씨처럼 나풀거리던 금발이 어린 시절에 비해 좀 더 진해졌다는 것 정도가 달라졌다 할 수 있겠다.

성장기가 지나고 마주하는 것이니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길을 가다 마주쳐도 단번에 알아봤을 것이다.

엘리엇과 루이스, 에르켈까지. 어린 시절 그대로 자라 확장판이 된 느낌인데, 에이든 루스터만은 확 달라져 있었다.

키도 키인데, 체격 자체가 달랐다. 나는 제복처럼 생긴 교복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에이든의 근육을 훑으며 내심 감탄했다. 그 울보가 저렇게 자라다니. 과거 소심하게 주눅 들어 있던 모습을 떠올리면 경이롭다고 표현할 만한 변화였다.

“안녕…. 르웰린. 오랜만이야.”

에이든은 수줍게 눈을 내리깔고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에 ‘혹시?’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바래 가는 옛날 기억을 훑자 저 녀석은 원래 저런 식으로 말을 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반가움은 들어가서 마저 나눌까.”

얼굴이 빨개지도록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은 에르켈이 뒤늦게 황자의 권위를 보였다. 그 말을 들은 루이스가 갑자기 “아!” 하고 소리쳤다.

“정말 죄송하지만 교수님이 부르셨던 게 이제야 생각나서요. 반가움을 나누고 계시면 제가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어휴,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갑자기 교수의 부름이 생각났다며 너스레를 떤 루이스는 에이든의 팔을 잡더니 자리를 떠났다. 저보다 한참 큰 몸을 끌고 가기 힘들었을 텐데, 에이든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얼굴로도 얌전히 따라갔다. 그 모습을 본 엘리엇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도 갑자기. 잊고 있던 약속이 급하게 떠올라서….”

아벨과 함께 역에 간 날. 뒤돌아서며 던진 것만큼 성의 없는 핑계였다.

그렇게 애들이 자리를 피해 주자 에르켈과 둘만 덜렁 남았다. 부끄러운 장면을 들킨 것 같았지만, 피해 준다는 걸 굳이 붙잡기도 뭐했다. 우리에게 재회의 기쁨을 나눌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에르켈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또 찡하게 서로를 바라보았고, 곧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서로에게 다가가 부둥켜안았다. 내 어깨를 감싸려다 높이 차이로 허리로 내려온 에르켈의 손이 엉망으로 떨렸다. 그를 껴안은 내 손도 만만치 않았다. 둘의 진동을 합쳐 진동 마사지기도 만들 수 있을 수준이었다.

“끄흐응, 허어읍….”

“…시발….”

에르켈은 내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고 서럽게 울었다.

“황자는 왜, 시바, 은퇴가 없어…. 나 그냥 은퇴하고 귀농이나, 흑, 귀농할래.”

에르켈은 울면서 그간 있었던 서러운 일을 토로했다. 제일 충격적인 건 독살 시도에 대한 거였다.

황성에서는 그나마 함부로 암살자가 숨어 들어오는 일이 없었는데, 아카데미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보안에 힘을 쓴다 해도 한계가 있고, 그마저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다. 사방이 보는 눈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독을 탄 수프를 먹고 피를 토했는데, 그걸 어디에도 알릴 수 없어 슬펐다는 말을 듣자 내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레도르의 편지를 보낸 후 루크에게 팽 당한 이야기, 5년간 뒤지게 구른 이야기, 서브를 만난 이야기를 경청하는 에르켈의 어깨도 떨렸다.

그렇게 꼴사나운 모습으로 한참을 지난 몇 년간의 고생에 대해 토로하다 떨어졌다.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는데, 콧물이 아니라 눈물일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카데미로는 왜 부른 거야? 곧 돌아오는 거 아니었어?”

“아, 그거….”

여태 훌쩍이며 코맹맹이 소리를 낸 에르켈이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뭔가 떨어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한참 이어지더니 뭔가를 들고 나왔다. 그 뒤로 어지럽게 늘어진 종이와 상자들이 보였다.

“쨔잔.”

수동 효과음을 낸 에르켈이 내 앞에 들이민 것은 책이었다. 짙은 고동색에 금박으로 장식한 책은 제목과 외형이 모두 익숙했다.

“제국의 역사-개국편?”

이 상황에 야심 차게 꺼내 들기에는 지나치게 흔한 책이다. 어린 귀족들이 역사를 배울 때 제일 흔하게 접하는 책이고, 나도 황성에서 공부할 때 교과서로 사용했다. 혹시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건가 싶어 뒤적였지만 별다른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에르켈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도 엿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의 눈이 눈물로 엉망이 된 것에 어울리지 않게 반짝였다.

“어쩌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

상상하지 못한 말에 몸이 굳었다.

에르켈의 얼굴은 진지했다.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입술을 물었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에르켈이 장난으로 이런 주제를 꺼낼 성격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돌아간다. 원래 세계로. 이미 몇 차례 확인에도 가능성이 없어 포기하고 있던 일이다. 오래전 잔잔해졌던 마음에 바위를 던진 듯 어지럽게 파문이 일었다.

제국에는 마법이 있다. 한때는 이 점에 주목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이니, 어딘가에는 범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있지 않을까. 그러면 그곳에 차원을 넘어가는 힌트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기대와 달리 대륙의 마법은 어디까지나 과학을 대체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 과학의 대체품. 용, 신 따위의 초월적 존재는 신화로 남았고, 한때 이름만으로 대륙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마탑의 주인은 이제 현자를 뜻하는 칭호가 됐다. 아카데미 마법부를 졸업한 소위 엘리트의 능력이 고작 수도 불꽃 축제를 위해 사용되는 세계에 과연 차원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나는 빠르게 체념했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다면 상황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지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게 현명하니까.

“혹시 내가 아카데미에서 가져와야 할 게 있다고 한 거 기억해?”

그런 적이, 있었나? 워낙 까마득한 일이었다. 나는 한참 기억을 쥐어짰지만, 아카데미에 가기 전 마차에서 훌쩍거리는 에르켈의 모습 정도나 간신히 떠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뭐, 기억 안 나도 괜찮아.”

어깨를 으쓱한 에르켈이 책을 펼쳤다. 얼마나 열심히 펼쳐본 것인지, 기본적인 보존 마법이 걸려 있을 텐데도 책 모서리 색이 바래 있었다. 의아하게도 에르켈이 펼친 곳은 책의 1장이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초반 아닌가? 초대 황제 사르바잔의 신화를 다룬 삽화를 보며 나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이제 와서 용이라도 찾아보겠다는 건 아니지?”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아니고.”

깨알 같은 글자 위로 손가락이 헤매다 “여기, 여기.” 하고 짚어 주었다.

그곳에는 태양신 야캅이 사르바잔을 위해 구해온 물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사르바잔이 야캅에게서 받은 물건을 넷으로 나누자 그것들은 각각 죽은 자를 살리고, 운명을 바꾸고, 진실을 비추고, 무엇이든 벨 수 있게 되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사르바잔의 신화 마지막 장을 읽었다.

건국 신화가 으레 그렇듯, 사르바잔의 일대기도 온갖 과장된 이야기를 덧붙인 영웅설화였다. 만물이 사랑하고, 신의 축복을 받고, 악을 베어 세계를 구하고, 용의 수호를 받은 영웅.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핏줄인 황족은 선택받았으며, 영원한 영광을 누리기 마땅하다는 요지의 선전물.

나는 에르켈이 소리 내어 읽은 문장을 곱씹었다. 위대한 왕이 죽음을 피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신이 내린 선물. 네 개로 갈라진 성물의 행방. 진정되지 않은 손이 자의를 벗어나 떨렸다.

“너, 설마. 그걸 찾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용도, 신도 찾을 수 없는 세계다. 신화의 증거는 몇 남지 않았고, 고대 마법은 대부분 사장되었다. 신이 준 성물이라도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

단호하게 부정하며 자꾸 비집고 올라오려는 기대감을 누르려 했다.

이건 ‘신화’였다. 대부분 허풍으로 이루어진 허구고, 골조가 된 역사조차 신화와는 성격이 다를 것이다. 단순히 신화시대의 유물을 찾는 것과는 이야기가 달랐다. 성물이 아직 온전히 남아 있고, 그걸 무사히 찾을 가능성은 내가 지금부터 마법을 시작해 세드릭 클라인을 이기고 마탑주 자리를 차지할 확률보다 희박했다.

“있어.”

에르켈은 단호하게 말했다.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걸 마주보며, 나는 그제야 그가 굳이 돌아갈 방법이라는 자극적인 문장을 꺼낸 이유를 알았다. 에르켈은 진작, 어쩌면 처음부터 성물의 존재와, 그 능력을 알고 있었던 거다.

깨닫는 순간 한가지로 추릴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서운함, 배신감, 안도, 기대감, 실망 따위로 명명되는 것들이었다.

“알고 있었구나. 그게 있으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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