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17)

#89

거기까지 말한 엘리엇은 잠깐 말을 쉬었다. 자신이 이해하길 기다리는 거라는 걸 안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는 이미 전쟁을 앞둔 분위기야. 당연한 얘기지만 수도 귀족들은 그 폭풍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까. 우리가 그러니, 분쟁의 중심에 서 있는 황족이라면 더할 거라는 점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믿는다. 결국 에르켈 전하께서 능력이 있든, 없든. 선하든, 악하든. 부지런하든, 나태하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전하께서 직계 황족이라는 거고, 황위 계승 서열이 높은 황자라는 거지. 솔직히 말해서 전하의 목숨은 운에 달려있다.”

거기까지 말한 엘리엇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멍청한 선택이다. 분명 후회하겠지. 에드윌과 협력해 황태자를 지원하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르다. 다음 황제가 될 사람을 고르고 줄을 대는 건 위험도가 높은 만큼 얻을 것도 있지만, 힘이라곤 없는 황자를 돕는 건 높은 위험도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이건 장사도 아니고 적선이다. 하지만.

“나는 그분을 도와, 살리기로 했다.”

“…….”

“그로 인한 이득을 생각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겠어. 나는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하거든. 그래도 제일 큰 이유는 네가 말한 대로 에르켈 전하께서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어릴 때의 정이라고 하자. 전하께서 내게 도움을 청했고, 나는 그걸 받아들였다.”

정을 운운하고 있는 것치곤 지나치게 감정 없는 삭막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에이든은 엘리엇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루이스도 결연한 표정을 하고 에이든을 보고 있었다. 에이든은 입을 벙긋거리다 닫았다. 할 말이 많았고, 동시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에르켈이 둘에게는 도움을 요청했지만, 자신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멍청하게 굴어서…. 멍청한 데다 용기도 없어서.’

절로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에르켈은 매번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응원도 해 줬는데. 자신은 그의 어려움을 알아주기는커녕, 믿음도 주지 못했다. 코끝이 시큰거렸고, 곧 시야가 일그러졌다. 울지 않으려 노력하며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이렇게 아무 때나 울고 있으니 믿음을 사지 못한 거다. 상황을 바꿔 자신이 에르켈이라도 이런 겁쟁이에게 뭘 맡길 수 있을까. 동정심에 챙겨 줄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뭐… 나도 엘리엇과 비슷해. 이제야 말하지만, 그간 전하께 몇 번 암살 위협이 있었거든. 내가 본 것만 해도 한 손도 아니고 두 손으로 꼽아야 할 정도니, 실제로는 더 많았겠지. 처음 알게 됐을 때는 무서웠고, 다음은 의아했거든. 대응하려고 하면 아예 못 할 것도 없었을 텐데. 나중에 상황 파악이 될 정도로 크고 나서야 안쓰러워졌지. 정신 차려 보니까 내가 독과 해독제에 대해 독학하고 있더라니까.”

그것도 몰랐다. 에이든은 다시 핑 도는 눈물을 소매로 거칠게 닦아냈다. 독이라니. 암살이라니.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엘리엇과 루이스는 에이든이 우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그 대신 그간 서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에르켈을 돕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던 일로 초점을 돌렸다.

“찢으면 글자가 바뀌는 종이. 그거 네가 만든 거지?”

“응.”

엘리엇은 루이스의 발명품을 양산할 수 있는지에 떠올리며 말했다.

“실력이 괜찮던데. 그 정도면 너도 아까 말한 세드릭 클라인처럼 천재인 거 아냐?”

“미친 소리 마!”

루이스가 펄쩍 뛰더니 소름이 끼친다며 자신의 팔뚝을 마구 쓸었다.

“그 녀석은 또라이라고! 정말 실망이다, 엘리엇.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나는 보라색 머리만 봐도 그 자리를 피해. 세드릭 빌어먹을 클라인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아. 그냥, 다 지보다 못 한… 실험체 같은 거지. 그 새끼가 사람을 관찰하는 것처럼 쳐다볼 때마다 얼마나 소름이 끼치는지 알아?”

별 생각 없이 한 말에 루이스가 진심으로 질색하자 엘리엇이 떨떠름하게 사과했다.

“어… 미안하다.”

“실력이 좋으면 뭐 해. 나는 그 녀석 때문에 천재라는 것들에 대한 인식도 안 좋아졌어. 선입견은 안 좋지만, 엘리엇, 너도 한 달만 겪어 보면 내 마음을 이해할걸.”

엘리엇은 자신이 아는 마법사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냥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수준부터, 감탄할 만큼 대단한 실력까지 다양했다. 루이스 정도면 충분히 후자에 가까웠다.

실력 좋은 마법사는 꼭 성격이 더럽던데. 르웰린의 셋째 형만 봐도 그렇다. 그 정도면 마법사, 그러니까 엘리엇 기준에 마법사라고 칭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마법사치고 ‘썩 괜찮은 축’에 속한다. 성격 더러워야 실력이 좋은 건지, 실력이 좋을 만큼 열심히 하다 보면 성격이 더러워지는지 그 선후 관계야 알 수 없지만.

덕분에 루이스의 말에는 떨떠름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해 듣기로는 아카데미에서 루이스의 이름도 제법…. 일단 어디 가서 고분고분하다는 말을 듣기에는 무리가 있는 성격이었다.

마법사는 성격이 나쁘다는 소리는, 외부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성격 나쁘다고 욕하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시작된 걸지도.

꽤 가능성 있는 가설이긴 한데. 엘리엇은 굳이 그 말을 입 밖에 꺼내 흥분해 있는 친구를 건드리지 않고, 말을 돌렸다.

“전하께서 주변에 둔 마법사가 많지 않으니 네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금방 알았어.”

다행히 루이스는 엘리엇의 의도대로 금세 세드릭 클라인에 대해 이를 갈던 걸 멈추고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난 좀 걸리긴 했어. 매번 룬칸델 여관에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는 걸 알고 너구나 싶었지만.”

“뭐.”

엘리엇이 어깨를 으쓱했다. 부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열차가 있다곤 해도 대단하다. 거의 달마다 오지 않았어?”

“어쩔 수 없지. 편지는 중간에 누군가 가로챌 확률이 높으니까.”

“하긴… 편지를 가로챌 만한 후보들이 워낙 비범들 하셔서. 그래 봤자 학부생이 만든 건 금방 들킬 거야. 목소리나 짧은 메시지라도 바로 보낼 수 있는 도구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건 곧 나올 거야.”

심드렁한 목소리에 루이스가 흥분해 바짝 붙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만들었대? 수도에서 나왔나? 내가 없는 사이에 그런 게 나왔다고?”

질문을 퍼붓는 그를 밀어낸 엘리엇은 르웰린이 호언장담했던 투자 물건에 대해 떠올렸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타이밍만 잘 노리면 열차에 투자한 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대충 계산해 본 것만으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결과가 도출된다. 엘리엇은 순식간에 이해심과 포용력이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할 수 있다면 르웰린의 뺨에 입이라도… 아니, 이건 좀. 아무튼 도움을 준 그에게도 충분한 사례는 할 생각이다. 더해서 소소하게 득이라고 한다면, 그 익명의 개발자가 누군지 대충 감을 잡은 것 정도. 루이스가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아이디어 자체를 떠올리는 사람은 제법 되는데, 그걸 실행할 능력이 없는 거니까. 그러면 그걸 발표할 사람이 누군지는 뻔했다.

“그럼 너희는… 에르켈 님을 도울… 돕고 있는 거지?”

“그래.”

“너무 걱정 마. 기억 지우는 거 아픔도 고통도 없어. 잠깐이라고.”

에이든은 루이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나, 나도….”

목소리는 아직도 떨렸지만, 친구들을 바라보는 에이든의 눈은 곧았다. 강렬한 의지가 깃들어 결연해 보이는 눈이었다.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달라진 표정에 엘리엇과 루이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 정도면.

“나도 함께할게. 계약서 줘.”

*

검을 오래 쥐어 단단해진 손에 힘이 들어가자 그 모양새만으로 제법 위협적이었다.

쟤는 맨손으로 책장도 부술 것처럼 생겨서. 루이스는 에이든의 손안에서 가련하게 떨리는 펜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패기 넘치게 서명하겠다고 외친 것과 별개로 에이든에개는 긴장을 감출 요령이 없었다.

그런 루이스의 생각을 알 길 없는 에이든은 연신 마음을 다잡으며 숨을 골랐다.

아카데미에 오며 뭔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검에 대한 욕심과 재능은 크게 차이 나지 않았고, 체격도 커지며 자신감이 붙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간 쌓아 온 것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에이든은 시간이 되돌아가 열 살, 볼품없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방에 있는 둘은 친구의 회상을 기다려주기엔 성격이 급하다. 개중 하나가 유독 그렇다. 엘리엇이 탁자를 두드리는 텀이 점점 빨라졌다. 신경질적으로 단단한 원목을 두드리는 소리에 루이스의 마음도 급해졌다.

처음에는 어울리지도 않게 온화한 모습으로 자기 서명의 무게에 대해 아는 건 중요하다며 여유를 부리던 엘리엇이었지만, 슬슬 그 인내심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곧 콧김을 뿜어댈 기세였다.

결국 루이스가 주변을 맴돌며 “에이든, 힘들면 안 해도 돼. 정말이야.” 하고 위로를 가장한 재촉을 네 번째 하고 나서야 에이든이 서명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았다. ‘에이든 루스터’라고 썼는지, ‘에러블 룩터’라고 썼는지 알아보기 힘들 만큼 형편없는 글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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