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17)

#90

“드디어!”

루이스가 단번에 달려가 계약서를 낚아챘다. 몇 년 치 용기를 쏟아부은 에이든이 물에 젖은 천처럼 흐느적거리며 탁자 위로 엎어졌다.

“내용은 역시 전하 앞에서 채우는 게 낫겠지?”

간신히 서명을 마쳤는데, 이번엔 에르켈을 만나러 간다는 소리에 에이든은 경악했고, 생각이 뇌를 다 거치기 전에 잽싸게 고개부터 저었다. 물론 엘리엇과 루이스는 에이든의 도리질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제일 바쁜 녀석이 있을 때 해결하는 게 낫지.”

“설마… 아직도 우리가 에르켈 님 편에서 일하는 걸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수도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마저도 성에 박혀있었으니까. 나도 그 녀석 얼굴을 며칠 전에서야 봤다고.”

“형님들은 여전하시구나….”

루이스가 혀를 찼다.

에드윌가 형제들의 막내 사랑이 지극하다는 건 유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애가 어릴 때나 귀엽게 넘어갈 얘기지. 벌써 르웰린이 성인식을 앞두고 있고, 장남인 케일은 결혼 적령기를 넘긴 나이다.

아직도 그러고 있다면 문제가 좀 생긴다. 정말 문제가 생긴다기보다는, 문제가 있다고 해석될 여지가 생긴다.

백작이 은퇴를 선언한 지 벌써 7년이다. 아무리 그가 한때 재상부의 맹수 소리를 들었고, 지금도 자문회의 일원으로서 그 자격을 유지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가문을 이끌어가는 게 케일 에드윌이라는 건 모두 알고 있다.

그가 유독 빠른 속도로 승진해 재상부 서기관이 된 데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능뿐 아니라 위치도 한몫했다. 이런 상황일수록 후계자의 자리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는데, 그를 위해서는 힘이 될 가문과의 결혼을 통해 안정을 얻는 게 제일 빠르고 확실하다. 일찍 후사를 보면 더 좋고.

그런데 이렇게 동생만 찾아서야 결혼은 무슨….

루이스는 복잡한 얼굴로 계약서를 주인에게 넘겼다. 엘리엇이 단시아 포엘의 역작을 품에 챙기며 한숨지었다. 루이스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저 과장된 제스처가, 상황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써먹던 것임을 알아봤다.

“룬칸델이 멀긴 하구나. 에드윌과 로즈벨의 약혼 소식은 아직이야?”

놀라서 눈만 깜빡이던 루이스가 “뭐!”하고 소리를 높였다가, 급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로즈벨? 설마 이사벨 로즈벨? 네 형의 전 약혼, 아니, 아무튼. 그 로즈벨을 말하는 거야?”

케일의 약혼도 놀라운데 상대는 더 놀랍다. 루이스가 놀라자 엘리엇이 자신의 형을 떠올렸는지 혀를 찼다. 하여간 여러모로 한심한 인간.

“이지가 들었으면 네 목을 졸랐을 거야. 일단 그 멍청이와 약혼했던 이사벨 로즈벨이 맞긴 해.”

“맙소사.”

아무리 룬칸델과 수도의 거리가 멀다고 해도 그렇지. 두 도시 사이 교류는 적은 편이 아니었고, 특히 철로가 놓인 후로는 활발해졌다. 이런 엄청난 소식을 하필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며 말하는 법 없는 엘리엇에게 듣다니. 루이스는 조금 억울해졌다. 하다못해 르웰린이 말해도 저것보단 문장이 길고 풍부했을 것이다.

“어쩌다? 둘이 연애라도 한 건 아닐 테고. 정략혼이라기엔 너무….”

가문 사이의 거래로 이루어진 약혼이라면 실질적으로 로즈벨의 뒤에 있는 건 수에닐 공작일 것이다. 공작과 에드윌 백작은 다른 걸 다 제쳐 두고 둘 사이만 봐도 좋다고 하기 어려웠다. 개인적 유감을 숨기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굳이 그걸 내려놓고 약혼을 감행해야 할 필요는 없다. 수에닐과 에드윌은 서로에게 아쉬울 게 없었다.

“놀랍지만, 열렬한 연애였다고 하던데.”

“말도 안 돼.”

충격에 빠진 루이스를 뒤로하고 엘리엇이 에이든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에이든, 너도 그만 정신 차리고 나와.”

“그… 나는.”

“나라고 해도 계약서를 두 장이나 챙기지는 못했어. 이거 빼돌리느라 머리 빠지는 줄 알았다고.”

엘리엇 딜런이 빼돌리기 어렵다고 하면 정말 어려운 가격인 거다. 에이든은 가격에 왼발을 묶이고 서명에 오른발을 묶인 기분으로 일어났다. 그대로 방을 나서려는 매정한 딜런가 후계자를 마법부 만년 차석이 붙잡았다.

“잠깐, 잠깐! 그런데… 그, 둘이… 둘만 방에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도 될까?”

루이스가 부끄러운 척 손으로 뺨을 감싸며 눈을 내리깔았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비트는 모습을 본 엘리엇이 질색하며 떨어졌다. 혈기 왕성한 열일곱이니, 연애에 관심 많은 거야 이해한다. 하지만 적당히 해야지. 엘리엇은 황실 모독죄로 잡혀갈 생각이 톱밥만큼도 없었다.

“아직도 그 로맨스 서사에서 못 벗어난 거야?”

“그렇지만!”

“그놈의 그렇지만! 앞으로 금지야. 그것도 계약서에 넣어.”

*

벌떡 일어난 루이스가 흠, 흠 목을 가다듬었다. 바닥에 엎어진 모습으로 들킨 게 어지간히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아닌 척해도 얼굴과 목까지 온통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르웰린, 전하. 저는….”

“들어가서 해, 들어가서.”

안쪽으로 루이스와 에이든을 몰아넣은 엘리엇이 문을 닫았다. 뭔가 비장해 보이는 셋과, 상황을 알고 있던 하나, 그리고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뿐인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헛기침조차 못 하는 숨 막히는 적막을 깬 건 에르켈이었다. 잔뜩 웅크린 에이든의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냐고 물은 에르켈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루이스와 엘리엇이 내 조력자야.”

“뭐?”

“같이 온 걸 보면 에이든도 도와주기로 한 거 같고.”

“뭐…?”

놀랐지만, 내용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셋이 방 앞에 찾아왔을 때부터, 아니, 정확히는 에르켈이 종이를 꺼내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다. 자신이 캐낸 정보를 빼곡하게 적은 필체는 모른 척하기에 너무 익숙했다.

다만 매번 단둘이 은밀하게 나누던 이야기에 타인이 끼어들었고, 그걸 에르켈이 덤덤하게 전하는 것이 놀라웠다.

낯설고 어색한 기분이다.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을 한 에르켈의 조력자들을 보았다.

고작 10대 초반. 그것도 자의가 아니라 어른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어울린 사이다. 쉽게 친해지는 나이라고 해도 오래갈 거라 믿기에는 어린 우정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우정을 이유로, 지금 도움을 주겠다고 찾아온 그들은 결연한 표정이었다. 언제나 시큰둥한 엘리엇은 물론이고, 떨고 있는 에이든마저 눈만은 단단한 각오로 빛났다.

나는 내가 꺾을 수 없는 그들의 의지를 바라보며,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나와 에르켈에게는 공통의 목적이 있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고, 살려야 하고, 벗어나야 한다. 서로의 정체도 안다. 이 세계에서 다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걸, 서로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다. 우리는 함께하는 이유가 충분하다.

하지만 얘네는. 루이스와 에이든은 에르켈과 함께 아카데미에 왔지만, 학부가 다르다.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사용할 만큼 큰 아카데미 부지에서 그들이 과연 얼마나 자주 마주칠 수 있었을까.

얼굴을 자주 보며 친분을 다질 기회도 없었던 황자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쪽과, 다른 목적을 위해 도와주는 척을 하는 쪽 중 어느 쪽이 가능성이 높을까. 짧은 우정에 기대 그들을 믿어도 되는 걸까.

엘리엇의 경우는 더하다. 이쪽은 제일 타당성을 갖췄으면서도, 제일 이해하기 힘든 케이스다.

어린 시절 함께 모여 어울렸으니, 거리가 한참 떨어진 수도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느라 바빴다고 해도 맥락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때도 나와 에르켈, 엘리엇은 어린애답지 않은 주제로 논쟁을 벌였고, 정치적 이익을 위해 친분을 나눌 상대를 골랐다.

하지만 동시에 엘리엇 딜런이 얼마나 실익을 계산하는 인간인지 생각해 본다면 의문이 생긴다. 엘리엇은 고작 10대 초반부터 자기 스케줄을 분 단위로 쪼개 가며 일에 매진하던 녀석이다. 로베누스에 머무를 때 나를 위해 카일 베리넌을 견뎠다고는 하지만, 그건 결국 내가 로베누스에서 얻어야 하는 게 원작과 관련된 게 아니라, 정치적인 무언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철저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의도에 의심을 품지 않아도 될까?

나는 엘리엇이 생각보다 자기 사람을 잘 챙긴다는 걸 알고, 우리 사이에 우정이 있다는 것도 믿는다. 루이스와 에이든이 선한 사람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목숨을 걸 정도인가? 사르바잔의 성물이 정말 실존한다면, 그리고 그게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황자인 에르켈이 그걸 찾고 있다는 것만으로 위험한 일이다. 누군가 이 일을 안다면 그대로 반역으로 몰고 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힘들 만큼 큰 사안이다.

이 위험이 나와 에르켈에게는 의미가 있다. 그걸 가지고 돌아간다는 목표가 있는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저들에게는 아니다.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이에 드는 생각이 이들을 믿을 수 있는지 따위라니. 순간 올라오는 죄책감에 입이 썼다.

사실 저게 진심이라고 해도 문제다. 이들은 아직 어리고, 앞길이 창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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