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내가 저 셋을 믿지 못하는 건 그간의 공백 탓이니 에르켈의 안목으로 대신 하겠다만, 여전히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건 그 부분이었다.
얻을 게 없고, 잃을 가능성만 높은 일에 얘네를 끌어들여도 될까. 자칫 일이 틀어진다면 가문의 힘으로 무마할 수 있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 루이스가 손을 들며 튀어나왔다.
“뭐,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겠어.”
왜인지 아벨을 연상시키는 과장된 제스처와 말투였다. 혹시 마법사들은 모두 연극을 좋아하는 걸까. 현대에서 CG를 사용했을 법한 작업들을 모두 마법사들이 만들어내니 그쪽과 친하기는 하겠다.
“몇 년 만에 얼굴을 본 친구가 의심하는 건 서운하지만, 사실 다행이기도 하지. 네가 그런 고민도 없이 두 팔 벌려 환영해 줬으면 자기 직전에 침대에서 생각났을 것 같거든. ‘얘를 믿어도 되나? 이렇게 경각심 없는 애를?’ 하면서 이불을 발로 차댔을 거라고.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기사들이 몰려와서 나를 끌고 가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야.”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그럼에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루이스가 엘리엇의 옆구리를 찔렀다. 황자 앞이라고 짝다리 짚지 않고 바르게 서 있던 엘리엇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금색의 종이였다. 루이스는 펜 뚜껑까지 야무지게 열어 내게 건넸다.
“이게 뭔데?”
“단시아 포엘의 계약서.”
그건 또 뭔데.
루이스가 연신 재촉하듯 펜과 종이를 들이밀었다. 일단 받으며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듯 바라보았지만, 둘 다 딴청이었다.
“혹시 우리가 왜 전하를 돕기로 했는지에 대한 감동적인 스토리를 다시 늘어놔야 할까?”
“그건 나중에.”
“좋아. 역시 그렇지, 엘리엇? 그럼 그건 미뤄 두고.”
“바로 본론으로 가지.”
대본이라도 써 온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대사 처리다. 최소한 연습은 하고 온 것 같다. 루이스가 여태 에르켈 옆에 서 있던 에이든을 향해 손짓했다. 에이든은 눈을 꾹 감더니 힘겹게 걸음을 뗐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동정심이 피어오를 만큼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네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해. 우리도 방금 가서 사실 ‘난 에르켈 전하를 돕고 있는데, 너도 그런 거지?’ 하면서 눈물겨운 우정을 확인하고 왔거든.”
“입으로만 하는 맹세는 도움이 되지 않아. 설사 지금 진심이었다고 해도 나중에는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고. 인간은 믿을 수 없지만, 계약서는 믿을 수 있어. 뭐가 됐든 효력 있는 문서를 남겨야 하는 건 기본이라고. 나는 오리온이 10만 골드를 빌려 달라고 해도 차용증을 쓸 거다.”
10만 골드는 제대로 된 보석도 못 살 돈이다. 제 형에게 유독 박하게 구는 녀석이니 10만 골드가 아니라 만 골드라고 해도 차용증을 썼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바는 알아들었다.
나는 루이스가 내민 종이를 열었다. 금색이 액체처럼 출렁거리는 계약서에는 상단에 쓰인 ‘루이스 클로이, 엘리엇 딜런, 에이든 루스터는 이 서약의 당사자이며, 위 셋을 포함해 르웰린 에드윌과 에르켈 아카레온를 제외한 자에게 서약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한다.’라는 문장 밑으로 공간이 비었다. 제일 아랫부분에 적힌 셋의 이름을 보자 새삼스러운 감정이 차올랐다.
단시아 포엘의 계약서가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정황상 효력을 갖춘 서류라는 건 알 수 있다. 믿음을 주겠답시고 이걸 작성해온 어린 친구들이, 조금 감동적이었다.
“나도 서명하면 되는 거야?”
“목록 먼저 채우고. 전하와 함께. 모두 서명하면 효력이 즉시 발동되니까.”
“뭐, 그래….”
나는 엘리엇의 말에 떨떠름해 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런데 효력이라는 게 뭔데?”
“주, 죽, 끕. 죽, 는대…….”
감동을 깨는 말에 뿌듯하게 올라오던 입꼬리가 멈췄다. 에이든이 ‘끄흐윽, 흡.’하고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엘리엇과 루이스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너네, 진심이냐…….”
“어차피 성물 조사한 게 걸리면 반역 의혹받고 당장 끌려갈걸. 서궁 지하 감옥은 좀 나은 편이래. 습기도 적고 벌레도 없어서.”
“탑이 아니라 지하 감옥으로 갈까?”
“바랄 걸 바라. 반역자를 탑에서 호의호식하게 둘 리가.”
“이런. 그쪽으로 갈 수 있게 미리 로비라도 시작해야 하나?”
미친놈들아.
반역을 논하면서도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에 절로 욕이 나왔다. 그 와중에 당연하다는 듯 튀어나오는 성물 이야기에 에르켈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 중 내가 제일 늦게 알았으면서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다는 둥 떠들어댔다는 걸 이제야 자각했다. 뒤늦게 몰려오는 쪽팔림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까 나를 달래던 에르켈의 얼굴이 다정했던 걸 떠올리자 더 그랬다.
“너한테 연락할 방법이 있어야 말이지.”
그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한데.
결국 자업자득이었다. 나는 이제 와서 저들을 말릴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제 와서 의미 없는 질문인 건 아는데, 한 가지만 물어보자. 대체 언제부터였어?”
“좀 됐지.”
어울리지 않게 해사하게 웃는 엘리엇의 뒤로 백작 부인의 얼굴이 겹쳤다.
나는 자연히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딜런 백작 부인은 보통 남편과 일을 분업해 집에 있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운이 좋으면 내가 엘리엇의 집에 가는 날과 그녀가 수도에 와 있는 기간이 겹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칼같이 단호하고 냉정한 사업가라는 말만 들었을 때는 엘리엇의 어른 버전을 상상했는데, 실제로 만난 그녀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엘리엇은 제 어머니를 꼭 빼닮았는데, 외관뿐 아니라 기회를 놓치지 않는 본성도 그랬다. 아들에게 물려준 은회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나는 순간이면 나는 다정함으로 포장한 껍데기 아래에 있는 실체가 마냥 상냥하지 않음을 실감해야 했다.
하긴. 가끔 놀러 오는 아들의 친구인 내게, 어린 아들을 통해 뇌물 같은 선물을 보낸 사람이니 그 상냥함이 정말 깨끗한 선의에서 비롯됐을 리 없다.
그래도 그녀는 내게 쿠키뿐 아니라 값비싼 조언도 종종 내주었다.
‘정보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중 가장 값진 것 중 하나고, 돈은 정보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흔한 것 중 하나지.’
제국 상권을 틀어쥔 사람의 말이다. 나는 그녀의 조언을 귀담아들었다.
사람들이 괜히 강연, 식사 자리 따위에 돈을 지불하고 조언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 능력을 발휘해 위로 올라간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다. 딜런은 둘 중 무엇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자부심이 아직도 생생했다.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었다. 사실 에르켈이 보여준 문서가 엘리엇의 필체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곧 눈치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계속 아카데미에 머무르며 감시당하던 에르켈이 자력으로 그만한 정보를 알아낼 수는 없었을 테고, 남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성물에 대해 꾸준히 조사하고,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만한 정보력이 어디서 나왔을지는 뻔하니까.
“좋아. 다 좋다고.”
“표정을 보면 다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
“쟤는 너무 생각이 많아서 탈이야. 아까 그 반응도 우리를 끌어들이는 게 미안하다, 그런 거였을걸.”
루이스의 말을 엘리엇이 받았다. 저렇게까지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두 사람은 생각 외로 지나치게 잘 맞았다.
*
결전의 날이다.
나는 에이든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셔츠에 타이, 각 잡힌 재킷 위 금속 배지. 꼭 제복처럼 보이는 교복을 입은 거울 속 내 모습이 어색해 괜히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방의 주인은 새벽 일찍 자리를 비웠다. 오늘부터 빠듯한 일정으로 진행되는 검술부 토너먼트를 위해서다.
놀랍게도, 에이든은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 물론 결승에 올라갈 것으로 거의 확정된 녀석은 따로 있었지만, 거기에 함께 이름이 언급될 만큼 실력이 좋았다.
사실 나는 그 이야기를 바로 믿지 못했다. 물론 체격이야 또래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좋았고, 손이 단단한 걸 보면 노력을 많이 한 것도 알겠지만…. 아무래도 우유부단하고 심약한 인상이 깊게 박혀 있는 탓이다.
바로 직전까지 훌쩍이던 모습을 봐 놓고, 갑자기 우승 후보로 점쳐질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라니. 믿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거울에 비친 허여멀건 얼굴과 대비되는 검은 교복을 보자, 만약 내가 원작대로 아카데미에 왔으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졌다.
글쎄…. 모르긴 몰라도 그, 이름도 처음 듣는 우승 후보보다야 내가 낫지 않을까.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단지 산에서 구르며 마수들과 싸웠다는 이유로 붙은 자신감은 아니었다.
나는 어린 천재들을 모아 놓았다는 스펠먼가에서 디멘시온을 제외한 모두를 꺾어 봤다. 아직 아카데미 검술부가 스펠먼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게 정설이니, 이곳에 디멘시온 같은 괴물이 하나 더 있는 게 아니라면 우승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