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오늘부터 아카데미 졸업회가 시작된다. 아카데미 대부분이 개방되고, 학생과 외부인이 섞인다. 외부 투자를 받기 위한 부스와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으니 소란스러울 테고, 사람 하나쯤 사라지는 건 눈에 띄지도 않을 거다.
루이스가 미리 교장실에 가서 함정을 해제한 후 피사 테콘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잘 붙잡아 두고, 내가 검술부 학생인 척 교장실로 가서 성물을 훔치고, 에이든은 일찍 예선 탈락을 한 후 에르켈과 합류해 교장실 외에 다른 입구로 추정되는 곳으로 향한다. 그동안 엘리엇은 외부에서 통 큰 투자자인 척 학생과 교수들의 이목을 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실패하는 엉성한 계획이다. 불안감이 치밀 때마다 나는 이게 최선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그나마 넷이 머리를 맞대고 한참 떠든 결과 나온 게 이거였고, 이제 와서 불안해한다고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호흡을 고르며 루이스가 만들어온 반지를 검지에 끼웠다.
어제저녁, 마지막 회의 시간에 루이스는 퀭한 얼굴로 반지를 가져왔다. 반지는 모두 다섯 개로, 같은 모양을 하나씩 나눠 가질 수 있었다.
빛나지 않는 투박한 은색 링 가운데에는 투명한 마법석이 박혀있었고, 안쪽에는 고대어가 쓰여 있었다. 빠르게 날려 쓰느라 글씨체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우리는 각자 색을 정했고, 반지를 나눠 가졌다. 이틀 밤을 새웠다더니. 루이스가 횡설수설하며 말을 늘어놓느라 설명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사용법이 간단해 금방 익힐 수 있었다.
자신이 맡은 바를 마치고 마법석을 돌려 작동시키면 다른 네 개의 반지가 달아오르며 보석의 색이 달라진다. 그 이후 다시 색을 조절해 푸른색, 혹은 붉은색을 보내 임무의 성공 여부를 알리는 방식이었다. 신호를 보낼 수 있는 거리가 짧다는 단점이 치명적이었지만, 아카데미 내부에서 눈치를 봐 가며 움직인다면 이 정도 제한 조건은 맞출 수 있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반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건 에르켈이었다.
믿고 있다며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본 루이스는 눈을 굴리다가 아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만 해낼 수 있다는 압박감과 마법사 특유의 호승심을 적절히 건드리자 결국 루이스는 해냈다.
반지의 기능 자체는 단순했지만, 급하게 만든 것을 생각해 보면 기대 이상의 성능이었다. 어차피 그레도르의 편지 같은 물건을 기대한 건 아니니까. 문장을 써서 보낼 만큼 세밀한 작업이 가능하다 해도 그걸 할 여유가 없었을 거다.
그 와중에 루이스는 외관이 투박한 게 자존심 상한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어차피 일회용으로 쓰고 말 것에 웬 외관 타령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직업 정신을 존중하기로 했다.
사실 루이스와 동년배로 세드릭 클라인이 있어 그렇지, 그의 재능도 대단했다. 아벨이 ‘머저리들’이라고 칭하곤 하는 다른 학부생이었다면 아무리 시간을 준대도 루이스가 만든 반지 기능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을 거다.
에이든도 그렇고, 루이스까지. 솔직히 루이스가 아카데미 마법부에 간다고 했을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어린 시절 친구들이 기대 이상으로 잘하고 있자 내가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뿌듯한 마음이 차올랐다.
그런 내 감상을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예의를 지키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급한 소리였다. 나는 문을 두드릴 때도 사람 성격이 어딜 가는 건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이참에 편입이라도 하는 건 어때.”
얘는 왜 잘 차려입어도 묘하게 껄렁해 보이는 걸까. 평소와 달리 머리를 넘겨 이마가 드러난 엘리엇은 차분한 코트를 걸쳤는데도 반항을 즐기는 도련님 같은 태가 났다.
반듯하게 선 자세와 달리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자세 때문일까. 아니면 재수 없게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미소 때문에?
“잘 어울린다고 하면 될걸. 말을 그렇게 해서 인기나 얻겠니?”
내가 바로 받아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고 있었던 것은 그 옆에 있는 사람 때문이었다.
엘리엇은 키도 크고 인상도 더럽다. 예법을 철저하게 익혔고, 필요할 때면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말할 줄도 알았지만, 어디까지나 필요할 때다. 평소 시큰둥하다 못해 세상이 다 귀찮다는 태도의 엘리엇은 말을 붙이기 어려운 타입이다.
그런 엘리엇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상당한 담력이 있거나, 그와 친분을 쌓아야 한다. 나는 저 화려한 미인을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꿀처럼 진한 금발. 깊게 파인 네크라인과 빠듯하게 몸에 맞춘 허리선 덕에 가녀리게 보이는 몸. 혈색 도는 장밋빛 뺨과 잊기에는 지나치게 인상적인 벽안. 통 감을 잡지 못하고 헤매던 나는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인 후에야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안녕, 르웰린. 오랜만이라는 말은 요즘 많이 들었을 거라 식상하려나.”
“…루시아?”
“많이 놀란 얼굴인데. 생각보다 더 예뻐져서 놀랐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니?”
루시아 아이센은 유쾌한 말투와 달리 수줍게 웃었다. 옅은 라일락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옆에서 꽃이 만개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화사했다. 그녀의 말대로다. 원래 예쁜 얼굴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릴 때와 달리 마음먹고 단장한 모습은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엘리엇 옆에 있는 사람의 정체가 루시아 아이센이라고 해도 의문이 남는다. 오늘이 중요한 날이라는 걸 모를 리도 없고. 외부인을 끌어들이면 위험부담이 커질 뿐이다. 나는 루이스와 에이든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아직 루시아까지 받아들이기에는 내 담이 작았다.
나는 답을 바라며 엘리엇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그는 보지 못한 척 무시했다.
루시아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다 안다는 듯, 대신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기에는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네가 왜 교복을 입고 있는지, 엘리엇은 갑자기 왜 관심도 없던 투자 건으로 교수님들을 들쑤셨는지. 그런 건 내가 알아야 할 게 아니야. 관심 분야가 아닌 데다, 척 봐도 위험해 보이잖아. 그러니 아무 말 말아 줘. 나는 진심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있고 싶거든.”
“그럼…?”
루시아는 친근하게 엘리엇의 팔에 붙으며 말했다.
“엘리엇이 도와 달라기에. 언제 또 딜런가 차기 가주에게 빚을 달 수 있겠어. 흔하지 않은 기회지.”
엘리엇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구기며 반박했다.
“빚이라니? 거래였어.”
“아직 네가 내게 대가를 주지 않았으니 빚이지.”
루시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안타깝다는 듯 찌푸린 얼굴은 상황을 눈앞에서 다 본 나조차 안쓰럽다고 느낄 정도였다. 엘리엇은 그걸 보고 기가 찬다는 듯 짧게 웃었다. 숨이 빠지는 것처럼 들리는 허탈한 웃음이었다.
“…부족했다고, 그게?”
“세상에, 엘리엇…. 만약 진심으로 하는 말이면 조금 실망할 거 같은데.”
나는 둘의 대화를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엘리엇에게서 저런 반응을 끌어내다니. 어릴 때보다 대단해진 건 미모뿐이 아닌 모양이다. 엘리엇은 입을 굳게 다물고 인상을 썼고, 루시아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었다. 승리자의 미소였다. 그림에 나올 것처럼 완벽한 레이디의 모습이었다.
“시선을 끌어야 한다기에.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지.”
그러니까, 둘이 팔짱을 끼고 아카데미를 휘젓고 다니겠다는 뜻이다.
확실히 엘리엇 혼자 움직이는 것보다 효과가 클 것이다. 루시아 정도로 외모와 가문을 갖춘 영애가 아카데미에서 인기가 없을 리 없고, 사람들은 연애 가십에 흥분하니까. 확실히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잘 어울리는 걸 골랐네.”
“도움을 좀 받아서.”
루시아가 엘리엇의 행커치프를 칭찬하고, 엘리엇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답하는 모습을 보자 속이 거북했다. 나는 얹힌 것처럼 꽉 막힌 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헬레나 탓이다. 엘리엇에게 목을 매던 분홍 머리 아가씨를 떠올리자 내 일도 아닌데 괜히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엘리엇이 루시아를 고른 이유야 알겠다. 엘리엇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하늘에 달려 있는 놈이었고, 내게 ‘루시아 아이센 정도면 괜찮다.’고 평했다. 그리고 그 정도는 돼야 이렇게 중요한 날 파트너로 선택할 엄두가 났겠지.
다만, 문제는 둘이 잘 어울려도 너무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언약식과 데뷔 파트너로 루시아를 추천한 거야 상관없다. 엘리엇이라면 정말 합리적인 상대를 골라 말해 줬을 테고, 그 과정에 자신의 연애 감정 따위는 들어 있지 않았을 테니까. 아카데미에서 데이트를 한 번 했다고 둘의 관계를 못 박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엘리엇이 한 번도 헬레나를 받아 준 적 없다고는 하지만, 루시아는 헬레나의 친척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다. 작든 크든 오늘 둘의 행보는 논란이 될 테고, 반드시 헬레나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시아가 엘리엇과 함께 있었다는 걸 알면 상심할 것이다.
물론 나는 오래 떠나 있었고, 현재 셋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지 모른다. 헬레나가 어린 시절의 짝사랑을 잘 마무리했을 수도 있고, 루시아와 헬레나 사이가 전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엘리엇에게 정말 혼자 이목을 끌 방법이 부족했을까? 나는 가시가 잔뜩 박힌 내 고민에 대해 눈치 빠른 둘이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지만, 둘 다 모른 척 시침을 뗐다.